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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4/15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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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박해하는 적에게 저를 넘기지 마소서. 거짓 증인들이 저를 거슬러 일어나 사악한 거짓을 내뱉나이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가 주님 수난의 성사에 끝까지 함께하여 모든 죄를 용서받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4월 15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4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주간 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4월 15일 성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49,1-6)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

  • 오늘 복음
    (요한 13,21ㄴ-33.36-38)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이사 49,1-6
오늘 제1독서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

1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2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4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요한 13,21ㄴ-33.36-38
오늘 복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때에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21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23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24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 

25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27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28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축제에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30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36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37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3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4월 15일
김동일 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8:0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며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는 장면으로, 배신과 인간의 나약함 속에 드러나는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을 전해 줍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들여다보시고 그가 배신할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비난하시거나 단죄하시지 않고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7)라고 말씀하시며 그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일을 하도록 존중하십니다.

배신을 당하는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이들을 멀리하고 미워하며 앙심을 품기까지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유다를 안타깝게 여기시며 그 선택을 받아들이십니다.

또한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13,37)라며 충성을 다짐하는 베드로에게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13,38)라고 예고하시며, 그가 자신의 연약함과 마주하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였지만, 위험 앞에서 두려움에 굴복하고 맙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우리와 닮아 있으면서 또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느님 앞에서 굳은 결심을 하였더라도 현실의 두려움과 유혹 앞에서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유다와 베드로의 나약함과 불완전함 앞에서 사랑을 드러내셨음을 기억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실수하더라도 우리를 향한 사랑을 멈추시지 않기에, 그 사랑으로 우리가 실패와 나약함을 딛고 다시 하느님께 돌아갈 힘을 얻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실패를 이기는 법

어제에 이어 계속되는 오늘 주님의 종 얘기에서 주님의 종은 쓸데없이 고생만 했다고 자기의 실패를 토로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만 실패를 경험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누구나 실패를 경험하기 마련이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그 실패가 어떤 실패냐가 다르고 실패를 어떻게 이기느냐가 다를 뿐일 것입니다.

실패를 이기는 법으로 가장 대표적으로 얘기되는 것이 바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그 실패는 사실 실패가 아니라는 것이고, 진짜 실패는 실패로 끝난 것이 실패이며, 실패 이후에 다시 일어서지 못한 실패이고, 실패를 교훈 삼아 진정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이 실패라고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그렇지요. 한 번의 실패로 인생 전체를 실패하는 것이 진짜 실패지요. 그리 여러 번 실패했으면 더는 실패하지 않는 법을 찾았어야지요.

그런데 그러지 않고 내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요 나는 실패자라고 낙심하기에 더는 실패하지 않는 법과 실패를 이기는 법을 찾지 않은 것이 진짜 실패지요.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도 이런 낙심을 토로합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런데 쓸데없는 일이 있습니까? 다 쓸 데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보통 고생고생했는데 실패로 끝났을 때 그 고생이 쓸데없었다고 느끼고, 그런 일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느끼며 낙심하는 것 같습니다.

복음에서 보면 주님의 제자들이 이렇게 낙심하고 유다 이스카리옷이 제일 낙심했던 것 같습니다. 자기들이 그렇게 믿고 그렇게 고생고생하며 따랐던 주님이 자기들의 믿음을 배신하고 콱 죽어버리시는 일이 벌어졌을 때 자기들이 믿고 따른 것과 고생이 다 쓸데없게 되었다고 느껴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배신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제자들의 믿음을 배신한 것입니다. 로마에서 이스라엘을 구해내고 다윗 왕국의 왕이 되실 것이라는 믿음을, 자기들은 그 왕국의 신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배신한 거지요.

주님도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고 낙심하실 수 있습니다. 3년 동안 그렇게 제자들을 교육하고 또 교육하였는데 쇠귀에 경 읽는 것처럼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고 헛된 꿈이나 꾸다가 낙심하고 배반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역시 제자들과 다릅니다.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은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고 낙심하다가도 ‘아니다’라고, ‘쓸데없는 고생만은 아니다.’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제자들에게 쏠렸던 눈을 하느님께 돌립니다. 제자들만 보면 당신의 수고가 헛수고이지만 하느님만은 당신의 고생을 알아주시고 힘이 되어주시고 보상을 주심을 봅니다.

이것이 인간적으로 실패한 것을 신앙적으로 이기는 법입니다. 우리도 인간적으로 수없이 실패하였으면 신앙적으로 이기는 법을 배워야 하고 배웠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인간적인 실패를 거듭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게 실패하고도 이기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는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절망과 어둠이 더해가는 이야기

우리는 <성삼일>을 이틀 앞두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절망과 어둠이 더해가는 이야기입니다. 빛으로부터 떠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개의 밤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배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의 밤이요, 또 하나는 베드로의 밤입니다. 유다의 밤은 캄캄한 어둠이 짙어져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닭이 울기 전, 새벽이 밝아져오는 밤입니다.

유다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이 제자들을 덮치자,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사실, 예수님께서는 배반하는 제자를 마지막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빵을 적셔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빵을 적셔서 주는 것은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당신을 배반할 제자에게 끝까지 베푸는 충실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랑을 등지고서 밤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면밀히 계획한 바를 어둠 속에서 행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장담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새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할 의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약한 순간에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닭이 울면, 어둠은 밝아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나친 자기 과신으로 넘어졌습니다. 사실, 우리가 넘어질 때는 가장 약할 때가 아니라, 가장 강할 때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해질 것입니다(2고린12,10).

그렇습니다. 유다의 밤은 어둠과 악으로부터 오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약함과 과신으로부터 오는 밤입니다. 유다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도 더 짙은 어둠으로 빠져들어 멸망으로 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는 어둠을 헤치고 빛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베드로같이, 유다같이 곧잘 넘어집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넘어지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일어서는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혹 넘어진 사실을 까달아 알고 뉘우치고 성사를 본다고 해도, 일어선 사람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넘어진 채로 넘어진 자신을 본 것일 뿐, 비록 용서는 받았다할지라도 일어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일어서서 넘어졌던 자신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 속으로 건너와서 어둠을 바라보아야 할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나는 새벽을 만날 것이요, 일어선 자만이 빛 속에 들 것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그분의 사랑을 만난 자만이 그분의 빛 속을 걸을 것입니다.

하오니, 빛이신 주님! 저를 비추소서! 제가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오늘 제가 비록 넘어지더라도 일어나 빛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3,38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주님!
어둠에 휩싸여 
넘어지고 또 넘어집니다.

빛을 비추어 주소서.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넘어지기도 전부터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하여, 이제는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사랑의 길을 걷게 하소서. 

빛을 받아 
빛을 밝히리이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같은 날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유다는 끝내 아닌 척하지만, 예수님은 아십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기 위해 나갑니다. 예수님의 예언을 완수하러 나가는 것입니다. 

그다음엔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어놓겠다며 자신만만해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인간이 자신만의 힘만으로는 자신 안에 있는 뱀의 욕구를 이겨낼 수 없음을.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예언에 대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유다는 긍정했고, 베드로는 부정했습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착한 뜻’의 차이입니다. 베드로는 ‘의지적으로’ 자신에 대한 예언을 부정하려 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그는 ‘겸손’이라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유다는 어떻습니까? 그러한 예언을 부정하려 하지 않고 의지적으로 순응했습니다. 결말은 자살이었습니다.

우리 심판을 위해 중요한 것은 죄를 짓고 안 짓고가 아닙니다. 의지의 문제입니다. 언젠가는 세속과 육신과 마귀를 완전히 이길 수 있다는 의지입니다. 이 의지가 무너지면 유다가 되고 무너뜨리지 않으면 베드로가 됩니다.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은 본래 화과산에서 태어난 돌원숭이로, 뛰어난 재주와 강력한 힘을 갖췄지만, 동시에 큰 교만과 통제되지 않는 욕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손오공은 천상에서도 말썽을 피워 천계를 뒤흔들었고, 결국 부처님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해 오행산 아래 오백 년간 갇히는 벌을 받게 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삼장법사가 경전을 얻기 위해 인도로 향하는 여정 중 손오공을 해방시킵니다. 손오공은 삼장법사의 제자가 되어 함께 서역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 여정에서 손오공은 수많은 잘못과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특히, 그의 본성이 쉽게 분노하고 자만에 빠져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탓에 여러 번 어려움을 겪습니다.

중요한 에피소드 중 하나는, 손오공이 삼장법사의 오해로 인해 질책받고 마음에 상처받아 여정을 떠나기로 결심한 사건입니다. 어느 날 손오공은 마귀가 변장한 사람을 알아보고 공격하여 삼장법사를 보호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를 본 삼장법사는 손오공의 행동을 오해하여 그가 무고한 생명을 해쳤다고 생각하고 손오공을 엄하게 꾸짖습니다. 이 질책에 상처받은 손오공은 스승과 동료들을 떠나 화과산으로 돌아가 홀로 지내게 됩니다.

홀로 있던 손오공은 처음에는 자유와 힘을 누리며 만족스러운 듯 보였지만, 이내 내면의 공허함과 외로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과거의 잘못과 자신이 지켜야 할 동료들, 그리고 스승 삼장법사의 신뢰를 떠올리며 깊은 고민과 갈등 속에 빠집니다. 마침내 그는 스스로 깨닫습니다.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제멋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분노와 욕망을 제어할 줄 아는 진정한 힘이라는 것을.

손오공은 마침내 삼장법사와 동료들 곁으로 다시 돌아와 무릎을 꿇고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며 깊은 참회를 합니다. 삼장법사는 그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손오공은 다시 길을 떠나게 됩니다.

삼장법사와의 긴 여정 속에서 손오공이 진정으로 얻은 것은 바로 스스로를 제어하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본성을 깨닫고, 자신을 통제하여 동료들과 조화롭게 지내며, 세상에 선한 일을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는 손오공이 원숭이에서 신의 존재로 승화되는 과정이며, 아기가 자라 어른이 되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즉, 사람은 많은 실수 속에서도 결국 자신의 교만함과 돈, 쾌락에 대한 욕망을 제어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존재와 함께 머물러야만 비로소 진정한 성장을 이루고 참다운 인간성을 갖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 왕과 다윗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둘 다 죄를 지었습니다. 사울은 그 죄를 통해 왕권에 대한 집착하는 마음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밧세바를 탐하고 죄를 짓고 뉘우칩니다. 예수님과 동행함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함이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으면서 죄를 이길 수 있는 분은 성모 마리아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유다는 관계를 위해 돈에 대한 욕심이 있어도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타협하는 사람에겐 착한 뜻이 없습니다. 착한 뜻과 삼구와는 동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삼구는 뱀입니다. 반면 베드로는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삼구를 버린 사람입니다. 여전히 죄를 짓기는 하지만, 조금씩 나아집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함은 바로 내 안의 삼구를 없애기 위한 목적이어야 합니다. 마치 오공이 삼장법사와 동행함이 자기 자신의 욕망을 제어함을 배우기 위함이었던 것처럼. 자캐오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집에 모시려고 했을까요? 예수님이 아니면 돈의 욕심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피노키오는 제페토 할아버지를 찾아 고래 입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분과 함께가 아니면 인간이 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착한 뜻이란 삼구를 없애고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그 삶의 목적으로 삼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스마트폰을 거의 모든 사람이 사용할 것입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약간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근시가 심한 사람은 스마트폰을 눈 가까이에 가져다 놓고 보고, 돋보기를 써야 하는 원시가 심한 사람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서 봅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에게 맞는 거리에 두어야 제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만약 정상인 사람이 스마트폰을 자기 눈에서 10cm 정도만 떼어놓고 본다면 어떨까요? 가까이 있지만 스마트폰의 화면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빛 때문에 눈물이 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 거리를 10m 정도 떼어놓고 본다면 어떨까요? 이번에는 너무 멀어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조금이라도 그 내용을 보려고 온갖 인상을 쓰게 될 것입니다.
 
자기에게 맞는 거리가 있습니다. 잘 보이는 거리,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스마트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또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런데 완전히 눈을 붙여 놓고 보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가까이에서 봤는데….”
 
부정적인 마음이 생겼을 때, 특히 누군가를 판단하게 될 때, 지금 제대로 볼 수 있는 간격을 두고 있는지를 따져 봐야 합니다. 그 간격을 무시하면서 보는 우리의 판단은 모두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3년 동안 먹고 마시면서 가까이에서 생활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직접 뽑은 12명의 제자입니다. 가까이에서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신앙의 모범을 보여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 유다 이스카리옷이 있었습니다. 또 제자 중에서 으뜸으로 뽑았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증언하기도 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붙잡히자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에 우리 모두 충격을 받습니다.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도 배신하고 도망친다는 것을 믿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까이에만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거리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받아들였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고,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둠 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십자가의 거리가 필요합니다. 무조건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만을 원하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의 거리를 통해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야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완벽함이란 더 이상 보탤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완성된다

- 생텍쥐페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말로 다 옮기지 못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제 돌아갈 영광의 시간입니다.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우리의 신앙입니다. 마음을 뒤집어놓으니 혼자서는 닦을 수 없는 애달픈 마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연약한 우리 마음들을 안고 영광의 길을 가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사랑의 반대자가 다름아닌 제자신임을 발견합니다. 막혀버린 마음에서 마음의 돌파구(突破口)를 찾습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던 지난 시간을 회개합니다. 마음은 있어도 마음을 삶으로 살아내지 못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맹세했던 그 무엇도 지켜지지 않는 우리의 허약함을 수난의 빛이 먼저 비춥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더 힘겨운 수난을 따릅니다. 우리의 마음도 수난을 통해 양심이 됩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의 배신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길을 가십니다.

피를 흘려야 우리가 가시에 찔려야 믿음이 되는 아픈 현실에서 수난은 우리의 나아갈 마음의 방향을 제시하여 줍니다.

배신과 배반의 순간에도 우리를 따뜻이 바라보시는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허약함을 인정합니다. 수난은 우리 자신의 허약함 위에 세워진 믿음입니다.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요한 13, 36)

이것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시는 예수님의 진정한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8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요한 13,38) by 피어나네 말씀카드 말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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