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으니,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네.
하느님, 성자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고 원수의 세력을 물리치셨으니 하느님의 종인 저희에게 부활의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4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주간 수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4월 16일 성주간 수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50,4-9ㄴ)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오늘 복음
(마태 26,14-25)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이사 50,4-9ㄴ
오늘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9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마태 26,14-25
오늘 복음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4월 16일
유경선 첼레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7:50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작정하고 수석 사제들에게 먼저 말을 건넵니다. 예수님의 몸값으로 고작 은돈 서른 닢을 받은 유다는 예수님과 다른 사도들 앞에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있다가 최후의 만찬에서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라고 묻는 뻔뻔함마저 보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처음부터 배신할 만큼 악한 이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이들”(마르 3,13)로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 선택하실 만큼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는 이였지만 점점 돈과 탐욕에 사로잡혀 주님에게서 마음을 돌리고 맙니다. 유다의 배신은 한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점차 타락하여 마음이 변한 결과라는 점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배신할 것을 미리 아셨지만, 끝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그에게 선택할 자유를 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사랑으로 대하십니다. 나약한 우리가 세속적인 욕망에 붙잡혀 있을 때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시며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유다와 베드로 모두 주님을 떠나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 둘의 마지막은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뒤 회개하고 돌아왔지만, 유다는 절망에 빠져 스스로 파멸을 선택하였습니다. 우리가 나약함으로 유혹에 빠져 있을 때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시편 34[33],9)
우리가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를 제대로 헤아릴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살펴봅시다. 깨어 기도하면서 주님 아닌 다른 것에 매이지 않도록,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회개하며 주님께 돌아가 새롭게 시작하는 믿음이 필요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제자의 귀와 제자의 혀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시고,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나는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어제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제자에 관해 얘기했는데 오늘 이사야서는 제자의 혀와 귀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런데 먼저 제자의 귀에 관해 얘기하려고 합니다.
들어야 말을 하고 듣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귀는 복음의 제자들과 달리 하느님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데 이사야서가 말하는 주님의 종이 바로 복음의 예수님이고,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주님의 종이요 제자의 귀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종은 주님의 말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귀를 가진 사람입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자들의 말을 듣는 귀는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퍼부어대는 모욕과 수치의 말은 아무리 퍼부어대도 모욕당하지 않고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오늘 ‘주님의 종의 세 번째 노래’는 노래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주시니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우리도 이런 편리한 귀와 현명한 귀를 가져야 합니다. 쓸데없는 인간의 말과 욕이나 모욕의 말은 자동 차단하고 생명을 주는 쓸 데 있는 주님의 말씀만 허용하는 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는 아주 멍청한 귀를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얼마나 멍청한지 하느님 말씀은 듣지 않고 유튜브에 귀가 점령당하여, 쓸데없는 소리만 듣고 들을 필요가 없는 모욕의 말은 소리를 키워 잘도 듣습니다.
다음으로 제자의 혀에 관해 얘기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자의 귀를 가진 사람이 제자의 혀도 가집니다.
제자란 스승에게서 들은 것을 말하는 사람이니 제자의 귀를 가져야 제자의 혀로 말하겠지요. 오늘 이사야서에서 주님의 종은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제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주님의 종은 지친 이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데 지치지 않는다. 하느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위로와 격려를 받는 사람은 끊이지 않는 물줄기를 가진 샘처럼 샘이 마르지 않아 아무리 위로와 격려를 해도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일 것입니다. 사랑과 위로와 격려를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기도, 이런 기도를 잘하는 사람은 끊이지 않는 사랑의 샘을 가진 사람이고, 지친 이를 지치지 않고 위로와 격려를 할 수 있음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주님,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건져주십시오.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은전 30냥에 팔려 배신당하는 예수님을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배신자에게 마지막까지 인정을 베푸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야, 네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21)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음으로써 마지막까지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묻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다도 묻지만, 그는 “주님”이라 부르지는 않으며,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라고 묻습니다.
그가 올리브동산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마태 26,50)하고 여전히 그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사랑을 끝까지 외면하고 맙니다. 그는 뒤늦게 후회는 했지만, 결국 자책과 죄책감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그런데, 대체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했을까?
그것은 은전 30냥에 대한 탐욕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라고 원했던’ 정치적 민족적 메시아가 되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채워주지 않자, 자신의 그릇된 신념과 이상을 고집한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완고함’이란 이처럼 무섭습니다. 곧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과 이념이라는 ‘우상’을 섬긴 까닭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이상을 파괴시키는 혁명가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버리지 않고는 결코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정녕, 진정한 혁명가는 자신이 먼저 혁명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혁명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상을 쫒는 자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고, 그리스도에 의해 혁명당한 자만이 진정한 변혁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마태 26,24)
이 말씀은 비단 유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인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말할 용기가 없습니다. 제가 유다처럼, 배신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 당신을 배신하는 줄을 알면서도 악에 조정당하고 있고, 오늘도 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건져주십시오.”라고 자비를 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26,22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주님!
더 이상 고집 부리지 않게 하소서.
생각을 움켜잡기보다,
생각에 붙잡히기보다,
생각을 바꿀 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조정 당하게 하소서.
저의 바람이 아니라
당신의 바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특징
오늘 복음에서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기 위한 작전을 벌입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할 파스카 상을 차립니다. 예수님은 식사 자리에서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유다는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고,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라고 하십니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이것은 성경에 예언된 예언입니다. 다시 말해 유다도 예언이 되어있고, 유다 자신도 그 예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야 합니다. 구약부터 예언된 시편의 말씀이 이것입니다.
“제가 믿어 온 친한 벗마저,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듭니다.”(시편 41,10)
예수님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물음에 성경의 예언대로 응답을 주셨습니다. 자기 말만 하며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 것은 유다입니다. 자신의 말과 예언 중에 자기 말을 더 신뢰하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운명은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운명입니다.
자기 의견에 빠져 묻지만 듣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밀링거 대주교는 아프리카 잠비아 출신의 가톨릭 사제로, 주로 구마 사제로 유명했습니다. 정말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고, 제2의 예수라 불릴 정도로 신자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교황청에서 중책을 맡고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생각이 더 옳아서 성경을 자기 생각대로 해석하는 잘못을 저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통일교와의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통일교 신자인 한국인 여성 성 마리아와의 결혼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문성명을 찾아가서 결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라는 말씀을 들은 것이겠지요.
유다도 예수님 앞에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성경 말씀보다는 자기 생각이 더 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예언이 유다의 죄를 멈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체중계에 매일 올라가는 이유는 우리 자신을 명확히 체크하지 않으면 제대로 느끼지 못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종합검진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번 점검하지 않으면 큰 병에 걸려도 마지막에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생각을 믿지 않게 하는 말씀에 자기를 자주 저울질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내 생각에 대한 신뢰를 줄이고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자주 저울에 올라갈수록 더 겸손해집니다. 매번 자기 생각이 틀림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왕관을 절대 벗지 않는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사실 임금님의 머리에는 당나귀 귀가 달려 있었지만, 들키면 큰 벌을 주겠다고 엄포를 놓아 아무도 그 비밀을 몰랐습니다. 어느 날 이발사가 임금님의 귀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두려워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속이 답답해, 들판에 구덩이를 파고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친 뒤 흙으로 덮어 버렸습니다.
그 자리에 대나무가 자라나 바람이 불면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쳤고, 백성들은 모두 그 비밀을 알게 됩니다. 임금님은 화가 났지만, ‘어차피’ 더는 숨길 수가 없게 되자 오히려 귀를 드러내고 백성들과 신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은 임금님의 ‘당나귀 귀’보다 자애로운 정치와 열린 마음을 더 소중히 여겼고, 임금님도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부끄러움을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이 내 생각을 누르게 할 수 있을까요? 물어보고 응답받고 실천해보는 것입니다. 저는 십일조를 실천해 본 것이 가장 큰 체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도 안 되는 명령에 결국엔 순종함으로써 겸손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말씀에 신뢰를 두고 내 생각은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체험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물을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베드로도 마찬가입니다. 내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 않기 위해서 성경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겸손해지기 위해 말씀을 듣고 읽어야 합니다. 겸손해지기를 원하는 이들은 잘 듣습니다. 내 귀를 막는 존재는 내 안의 교만한 뱀입니다. 그러니 겸손해지려는 의지를 가집시다. 그러면 말씀이 잘 들립니다. 착한 뜻이란 곧 자신을 버리고 겸손해지려는 마음입니다. 좋은 뜻을 가진 이들만이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의 아들은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지금부터 눈을 감고 딱 30초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과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생각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계속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걸 왜 하지?’, ‘30초가 왜 이렇게 길어?’, ‘지루하다’ 등의 생각도 나올 것이고, 오늘 해야 할 일이 생각날 수도 있습니다. 그밖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이 짧다고 말할 수 있는 이 30초 동안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생각을 멈춘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또 생각은 규칙적이지 않고 두서없이 계속 떠오릅니다. 이렇게 자기 생각도 통제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 바로 ‘나’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대단하다는 듯이 말하지만, 자기 생각도 통제하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연결되어야만 비로소 제대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안에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없이도 살 수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지만, 과연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 살 수 있을까요? 세상에 자기 혼자만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살 수 없습니다. 그 누군가가 있기에 편리를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해도,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 역시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괘씸하다고 인간을 향한 구원을 포기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십자가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지금 삶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은 더 기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은돈 서른 닢에 수석 사제들에게 넘겨주려고 합니다. 그가 배신하기로 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파스카 음식을 함께 먹고 있을 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21)라고 중대 발표를 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모두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물었고, 유다 역시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라고 하시면서 그가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배신을 멈추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당함을 알고 계셨고, 큰 사랑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모욕과 조롱을 받으신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집중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을 거부하시겠습니까? 그 사랑에 더 머물러야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 성주간 주님의 사랑에 더 깊이 머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이지만, 주님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진정한 사랑 이야기는 끝이 없다
- 리처드 바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여기에 계신 하느님은 대체 얼마입니까. 하느님을 두고 인간들끼리 서로 거래를 합니다. 같이 살아야 할 하느님을 감히 우리가 파는 꼴입니다. 약속을 어기는 쪽은 언제나 우리 자신입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함께 하는 최고의 행복을 우리는 누릴 줄도 몰랐습니다. 최고의 행복이신 하느님조차 돈벌이를 위한 사업의 수단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우리 삶에 가장 빛났던 첫 마음까지 우리가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다시금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묻는 성주간입니다. 영혼의 변절과 변질이 괴물을 만듭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저는 아니겠지요." 하며 예수님을 떠나고 벗어납니다.
감사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남는 것은 교만과 거짓 주장만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을 끝까지 섬기지 못하는 얄팍한 우리의 신앙을 세차게 회개합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날들이며 가장 치욕스러운 이날을 기억하는 깨어있는 시간입니다. 목숨을 바치시는 사랑 앞에 할 말을 잊는 깊은 감사의 성주간 되십시오.
마태오복음 26장 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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