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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3/30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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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하느님, 말씀이신 성자를 통하여 오묘하게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그리스도인들이 다가오는 파스카 축제를 열렬한 믿음과 정성으로 준비하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3월 30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살아있는 성경 말씀
온라인에서 함께해요!

2025년 3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4주일

 

 

 

디지털 공간을 밝히는 살아있는 말씀, 온라인 속에서 연결되는 믿음의 길로 초대해요!

2025년 3월 30일 사순 제4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여호 5,9ㄱㄴ.10-12)
    하느님의 백성은 약속된 땅에 들어가서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 제 2독서
    (2코린 5,17-21)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5,1-3.11ㄴ-32)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여호 5,9ㄱㄴ.10-12
오늘 제1독서

하느님의 백성은 약속된 땅에 들어가서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그 무렵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 버렸다.” 

10 
이스라엘 자손들은 길갈에 진을 치고, 그달 열나흗날 저녁에 예리코 벌판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11 
파스카 축제 다음 날 그들은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 바로 그날에 그들은 누룩 없는 빵과 볶은 밀을 먹은 것이다. 

12 
그들이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멎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해에 가나안 땅에서 난 것을 먹었다.

 

 

 

2코린 5,17-21
오늘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19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5,1-3.11ㄴ-32
오늘 복음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3월 30일
박규흠 베네딕 신부

 

✚ 미사시작 00:38

✚ 강론시작 13:1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큰아들은 작은아들이 환대받고 있다는 소리에 너무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큰아들을 찾아와서 타일렀습니다. 그렇게 찾아온 아버지에게 큰아들은 그동안 속으로만 간직해 왔던 섭섭함을 꺼내 놓습니다.

사실 큰아들은 “종처럼”(루카 15,29) 아버지가 시키는 것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 때로는 자신도 친구들과 즐기고 싶었고, 아버지께서 염소 한 마리 정도는 내주시면 좋겠다고 기대하였습니다.

큰아들의 처지에서 보면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고맙다는 표현조차 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큰아들이 섭섭함을 꺼내 놓은 상황에서 아버지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였을까요?

요즘 시대의 상담가들이라면, 마음을 몰라주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하고, 억울한 마음을 달래 주라고 조언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사과 대신에 큰아들에게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15,31)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의 ‘종처럼’이라는 표현에 가장 마음이 쓰였을 것입니다. 그가 모든 것이 큰아들의 것이라고 한 말은 “너는 결코 종이 아니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마음속으로 큰아들처럼 우리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를 기대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만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아서 하느님께 섭섭할 때가 있기도 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사과하시거나 달래 주시지 않습니다. 어렵겠지만 한 가지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과 화해하셨나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프란치스코가 주님께서 자기의 회개를 시작하게 하셨다는 말을 상기시키고, 그리스도를 통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중재자임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화해하려고 하지 않고 화해를 잘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화해하기 위해서는 화해할 마음이 생겨야 하고, 화해할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화해의 기술을 배워야 하는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 모든 것을 하게 하셨다고 사도는 말하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여간해서는 화해하려고 하지 않고 하느님과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싸운 적도 없고 원수진 일이 없는데 무슨 화해냐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럴 겁니다. 많은 사람이 사람과는 싸우고 원수지고 하여 화해할 일이 있지만 하느님과는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그렇기에 화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싸운 적도 없고 원수진 일이 없다고 하는데 그것이 실은 하느님과 아무 상관 없이 산다는 것이 아니고 뭡니까?

나의 출생에 대해서 하느님께 아무 불만이나 원망이 없습니까? 욥처럼 자기가 태어난 것을 하느님께 원망해야 하지 않습니까?

야곱처럼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제가 왜 이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냐 하면 저의 체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하느님께 왜 나를 태어나게 했냐고 원망한 적이 있습니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왜 나를 태어나게 했냐고 그리고 왜 아버지를 일찍 데리고 가셔서 이 고생을 하게 했냐고 하느님을 원망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를 더 먹어 이런 나로 만드신 하느님 실수에 대해서는 용서해드리고 실수는 하셨어도 사랑으로 나를 태어나게 하신 것을 오해한 것에 대해서는 제가 용서 청하며 하느님과 화해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를 더 먹어 복음을 통해 그리고 수난받으신 주님을 통해 믿음이 더 깊어지면서 하느님 사랑을 더 크게 느끼게 되었을 때부터는 그 하느님 사랑에 충실치 못하고 다른 사랑에 빠진 저를 뉘우치며 하느님께 더더욱 용서 청하는 제가 되었고 오늘 복음의 작은아들처럼 하느님께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하느님과 화해한 사람이 되었는데 오늘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보면서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셨다고 또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절이라고 하잖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 직분의 저임을 그리 의식하지 않고 살았고, 당연히 그리스도 사절로서의 삶을 성실히 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과 아예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 하느님을 원수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 하느님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하느님과 먼저 화해한 경험이 있는 제가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역할을 더 적극적으로 수행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느님을 원망한 적이 있고 화해한 적이 있는가요? 그리고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화해의 직분을 수행하고 계신가요? 저나 여러분이나 이런 질문과 도전을 받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느님의 기쁨

오늘은 사순 제4주일은 ‘장미주일(기쁨주일)’이라고 불립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사순절이 지향하고 있는 부활의 희망과 기쁨을 전해줍니다.

오늘 <입당송>에서는 노래합니다.

“즐거워하여라. ...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이사 66,10-11 참조)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여호수아와 함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기쁨의 파스카 축제를 지냈고, 그 다음 날에는 만나가 멈추고 그 땅에서 난 음식을 먹었음을 전해줍니다(여호 5,10-12 참조). 이는 부활과 함께 먹게 될 생명의 양식을, 나아가서 하느님과 함께 벌어질 천상의 식탁을 미리 암시해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고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게 된 기쁨을 전해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기쁨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밝혀줍니다. 흔히, 이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 혹은 ‘돌아온 탕자의 비유’로 불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두 탕자 아들들에 대한 아버지의 자비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에서,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의 차이는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어제 <복음>인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루카 18,9-14)와 흡사합니다. 곧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루카 18,9) 바리사이와 ‘큰 아들’이, 그리고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는 세리와 ‘작은 아들’이 비교되며, 대조를 이룹니다.

이들은 ‘보는 눈’이 서로 다릅니다. 곧 큰 아들은 자신을 의인으로, 작은 아들은 자신을 죄인으로 바라보며, 큰 아들은 다른 이들을 업신여기며, 작은 아들은 다른 이들을 존중하며, 큰 아들은 바라보는 곳이 자기 자신이지만, 작은 아들은 하느님과 아버지입니다.

<첫째 이야기>는 ‘돌아온 탕자 작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0,18)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성공해서 귀환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러 가는 것이기에 더욱 아름답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지었었음에 대해 뉘우치고 통탄해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곧 ‘뉘우친 바를 행동으로 고백하는 일’에 일입니다.

바로 이 일을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을 요청합니다. 예컨대, 베드로와 가리옷 유다가 다 같이 스승을 배반하고 통탄해 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 돌아와 구원의 길을 갔고, 유다는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파멸의 길을 간 것과 같습니다.

<둘째 이야기>는 ‘죄도 모르고 돌아오지도 않은 탕자 큰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동생이 유산을 챙기는 바람에 함께 유산을 받았을 것입니다. 유다 법에 따르면, 큰 아들은 다른 아들의 두 배를 받으니 동생의 두 배를, 곧 3분의 2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나머지 재산이 모두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31).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아들로서가 아니라 종으로서 섬겼습니다. 그는 돌아온 동생을 동생으로 맞아들이지도 않으며, 그를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처신에도 화내며,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며, 잔치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몰랐기에, 회개하지도 않은 돌아오지 않은 탕자였습니다.

<셋째 이야기>는 ‘자비로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큰 아들과 작은 아들에게 드러나는 것은 ‘아버지의 자비(르하밈)와 신실하심(헤세드)’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유산을 챙겨 집을 떠나는 아들을 떠나보내는 아버지는 그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그에게서 결코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바로 그처럼,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살진 송아지를 잡아 연회를 베풉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우리는 바로 이 아름다운 장면의 주인공들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저희가 이 자리에 이렇게 있을 수 있음은 바로 당신께서 저희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신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온갖 죄와 허물과 탓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마저도, 결코 저희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단지 죄를 용서하신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죄를 덮어주고 가려주고 보호해 주신 까닭입니다. 결코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결코 희망을 거두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이는 우리도 그렇게 용서하라는 뜻이요, 단지 용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지켜주고 보살펴주라는 뜻입니다. 그에게서 결코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하시듯이 우리도 형제들을 신뢰하고 자비로우라는 말입니다. 형제에게서 결코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일이요, 희망을 놓지 않는 일이며, 결코 사랑을 거두지 않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5,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
오늘 제가 뉘우치고 돌아가서 
아버지께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죄보다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고 품으시는 
그 사랑에 안기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회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사탄의 가장 큰 계략

이무석 교수의 책에 ‘작은 눈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던 한 여자의 사연이 나옵니다. 그녀는 사회에서 이름만 대면 누군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한 여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정신분석학 대가인 이무석 교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고민은 남편이 자신과 같은 완벽한 여자를 두고 술집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남편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돌아오면 1시간마다 어디에 있었는지 물어보고, 혹시 거짓말이 아닌지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그 여자를 만나러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 전날 꿈을 꾸었는데 얼굴도 모르는 그녀가 나타났고 눈이 얼굴의 반은 돼 보일 정도로 컸다는 것입니다.

이무석 교수는 ‘혹시 눈 작은 콤플렉스가 있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흠칫 놀라더니,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녀는 눈이 작지 않고 단지 쌍꺼풀만 없었습니다. 자기 동생은 쌍꺼풀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동생만 예뻐하는 것입니다. 아빠의 사랑을 받기 위해 심부름도 잘하고 공부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자 그 탓을 자신이 아빠와 동생이 가진 쌍꺼풀이 없는 것으로 판단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눈 작은 콤플렉스를 가지게 되었고 남편이 바람을 피운 것도 분명 다른 여자의 눈이 크기 때문이라고 판단해버린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다시 아버지께 돌아가는 일입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던 아들은 아버지께 돌아왔고, 형은 집 밖에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회개하였고 첫째는 하지 못했습니다. 둘째는 왜 회개할 수 있었을까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둘째가 느낀 고통의 원인은 ‘아버지의 부재’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첫째는 고통의 원인이 ‘아버지가 주실 수 있는 것의 부재’였습니다. 곧 친구들과 함께 먹고 놀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은 것에 있습니다. 그에게 고통은 아버지 자체가 아닌 아버지가 주실 수 있는 무엇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자꾸 그 부족한 것으로 돌아가려 하고 둘째는 아버지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인간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처럼 가장 큰 고통이 하느님의 부재가 아닌 하느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의 부족함으로 믿게 해야 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예에서 여인이 자기 고통이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 때문이라고 믿게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고통의 원인이 아버지의 부재였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것에 고통의 원인임을 알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쌍꺼풀 수술을 하면 될까요? 둘째는 어떻게 아버지께 돌아갔을까요? 아버지가 지금까지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묵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에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길은 아버지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반면 첫째는 아버지께 돌아가는 길을 자기에게 염소 새끼 한 마리 주는 것으로 여깁니다. 자기의 문제가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아버지를 사랑하려고 하는 노력이 없는 것이 아닌, 아버지가 줄 수 있는데도 주지 않는 무엇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사탄의 속임수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뱀은 인간이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담에게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원인을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저 여인 때문이라고 믿게 한 것입니다. 실상은 에덴동산의 모든 행복을 주신 하느님 사랑을 묵상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 자신에게 있는데도 말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가난한 것, 그래서 200원짜리 크레파스도 사 갈 수 없는 처지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진짜 어머니가 계신다는 다리 밑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처지가 되자,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 부모에 대한 확신이 적었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부모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머니가 가져온 단팥빵과 흰 우유, 우리를 위해 일하신 아버지의 굳은살이 그 증거였습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갱년기에 들어서 가끔 잠이 안 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수많은 원인을 제거하려 방법을 썼습니다. 그러나 바로 내려가서 성체조배 한 시간만 하면 바로 잘 잘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는 하느님의 부재에 있습니다. 이것을 앎이 회개의 첫걸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잃어버린 아들

건강한 몸을 가지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균형 잡힌 식사를 하고, 매일 꾸준히 운동하면 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알고 있지만, 모두 건강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알지만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루 1시간의 운동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할까요? 그렇다면 인스턴트 음식을 피하는 것은 가능할까요? 불가능할까요?
 
모두 가능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마음만 먹으면’이라는 조건이 붙게 됩니다. ‘마음먹는다’를 뜻하는 단어는 ‘결심’입니다. 이 뜻은 ‘물길을 틔운다. 물길이 터진다’라는 의미의 결(決)과 ‘마음’을 나타내는 심(心)이 합쳐진 단어로, ‘마음의 물길을 바꾸는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마음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행동과 실천이 뒤따라옵니다. 하지만 쉬우면 쉬울수록 마음먹는 것을 뒤로 미룹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다면서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사실 건강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의 대부분은 건강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건강을 잃고 나니 너무 많은 제약이 찾아오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신앙인도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려면 하느님 뜻에 맞게 살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뜻은 사랑의 길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삶을 살면 됩니다. 어렵지 않아 보이기에 ‘마음만 먹으면’이라면서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이 역시 죽음 앞에서 후회하게 만듭니다.
 
지금 당장 마음먹어야 합니다. 마음의 물길을 바꿔서 하느님께 향해야 합니다. 후회를 만들지 않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 아닐까요?
 
사순 제4주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말씀입니다. 사랑 넘치는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작은아들이 구속받지 않는 자유를 누리겠다며 나눠 받은 재산을 들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과는 배고픔과 모욕과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냥 좌절하고 포기하며 절망의 길을 가는 것이고, 방향을 바꿔서 아버지께 향하는 희망의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큰아들은 재산을 탕진한 동생이 왔다고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는 옳고 동생은 틀렸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잘못되었다며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움과 원망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사랑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미움과 원망의 길이 아닌 사랑의 길을, 좌절하고 포기하는 절망의 길이 아닌 사랑의 하느님께 향하는 희망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데, 과연 그 뜻을 따르고 있나요?

 

오늘의 명언

부끄러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신채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꽃샘추위 속에서도 개나리 목련화가 피어납니다. 봄의 경이로운 생명입니다. 하느님의 세계를 회복하는 사랑이며 우리 자신을 내려놓는 회개입니다. 사랑의 회복이 사랑의 진정한 회개입니다. 자기만을 내세우는 아집을 내려놓는 비움의 시간이 사순입니다.

낮추는 것이 비우는 것이며 비우는 것이 끝내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참사람이 되는 길은 이렇듯 서로가 서로를 살려내는 사랑의 길입니다. 탄생과 변화의 두려움까지 끌어안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왜곡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어느 누구도 소외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떠하신 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이신지를 잘 보여주십니다. 영혼을 되살리는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m는 일입니다.

우리의 회개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다시 하느님을 얻게 되었습니다. 떠나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머무르는 것도 깨닫는 것도 모두 아버지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여기부터가 아닙니다. 지금부터가 중요한 우리들의 인식과 시각의 변화입니다.

우리의 삶은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하는 맞아들임의 잔치이며 되찾는 생명의 축제이며 하나되는 일치와 머무름의 기쁜 향연(饗宴)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만 있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큰아들 작은아들의 삶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되찾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지극한 사랑과 함께하는 기쁜 주일되십시오.

 

 

 

코린토2서 5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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