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로지 주님만 믿나이다. 가련한 저를 굽어보시니, 당신 자애로 저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하느님, 거룩한 성사로 세상을 새롭게 하시니 현세의 교회를 도우시어 영원한 나라로 이끌어 주소서.
살아있는 성경 말씀
온라인에서 함께해요!
2025년 3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4주간 월요일
디지털 공간을 밝히는 살아있는 말씀, 온라인 속에서 연결되는 믿음의 길로 초대해요!
2025년 3월 31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65,17-21)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 오늘 복음
(요한 4,43-54)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이사 65,17-21
오늘 제1독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7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18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19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20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아기도 없고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으리라. 백 살에 죽는 자를 젊었다 하고 백 살에 못 미친 자를 저주받았다 하리라.
21
그들은 집을 지어 그 안에서 살고 포도밭을 가꾸어 그 열매를 먹으리라.”
요한 4,43-54
오늘 복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43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다.
44
예수님께서는 친히,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증언하신 적이 있다.
45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가시자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분을 맞아들였다. 그들도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축제 때에 그곳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46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47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
48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49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51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52
그래서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53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5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어 두 번째 표징을 일으키셨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3월 31일
홍용택 테오필로 신부
✚ 미사시작 00:38
✚ 강론시작 08:07
매일미사 말씀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우리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오늘 복음에서 왕실 관리는 카파르나움에서 멀리 떨어진 카나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죽기 직전인 자기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이 안타까운 사정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절박한 상황에 있는 왕실 관리에게 표징을 말씀하신 것이 그에게는 요청에 대한 거부로 들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조금도 위축되거나 실망하지 않고, 다시 한번 예수님께 아들을 살려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는 예수님께서 함께 가셔야만 아들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4.50)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가지 않으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더라도 아들은 살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들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요청에 대한 거절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 기회였습니다. 영적 성장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이 바라는 방식대로 하느님께서 답을 주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거부하신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사랑을 베푸십니다(마태 7,11 참조).
이 사랑을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완성해가는 믿음
오늘 복음은 공관복음에 나오는 백인대장의 종 치유 얘기와 같은 얘기인데 백인대장이 아니라 왕실 관리이고 종이 아니라 아들인 점이 다른 점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다른 것이 아니고 내용으로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곧 백인대장은 종의 치유를 청하지만 와서 고쳐 달라지 않는데 왕실 관리는 직접 가셔서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애걸합니다.
그래서 백인대장은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는 칭찬을 받는데 왕실 관리는 “이적과 표징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질책을 주님으로부터 받습니다.
그런데 왕실 관리의 믿음 부족보다 더 큰 문제가 겸손과 순종의 자세 부족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선 그는 겸손하지 않습니다. 왕실 관리라는 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도 자주 경험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감 때문인지 제게도 부탁이랄까 청탁을 잘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탁할 일이 있어도 감히 하지 못하거나 너무도 절실하여 부탁하더라도 아주 조심스럽게 하는데.
아무튼 백인대장은 자기 아들의 치유를 청할 뿐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 집에 가서 치유해주시기를 청함으로써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다고 고백할 기회를 놓칩니다.
자기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랬겠지요. 그런데 그가 부족한 것은 겸손만이 아닙니다. 그는 한 말씀만 하시면 병이 나을 거라는 고백의 기회도 놓칩니다.
백인대장은 자기 말에 종들이 그대로 순종한다며 자기도 주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겠다는 자세를 보이지요.
어쨌거나 왕실 관리는 백인대장과 비교할 때 겸손과 순종의 자세가 부족하여 주님께 대한 완전한 믿음과 의탁의 자세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왕실 관리를 나무라기는 하셔도 내치지는 않으시고, 왕실 관리도 야단맞고 난 뒤라도 주님 말씀을 믿고 주님 말씀에 순종했기에 그의 아들은 치유되고 그와 그의 온 가족이 주님을 믿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얘기에서 그의 믿음은 두 단계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떠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두 번째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처럼 주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믿고 떠났기에 믿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첫째 믿음은 믿기로 한 믿음이고, 둘째 믿음은 믿게 된 믿음입니다.
첫째 믿음은 믿기 시작한 곧 시작 단계의 믿음이고 둘째 믿음은 믿음이 열매 맺는 성장과 성숙 단계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백인대장에게서도 배워야지만 오늘 복음의 왕실 관리에게서도 배워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의 겸손과 순종 자세가 부족한 점은 우리가 타산지석 삼아야 할 점이고, 믿기 시작하여 성장해나가고 완성해나가는 점은 우리가 모범 삼아야 할 점이라는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믿음과 사랑의 표징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일련의 표징과 증거들, 곧 일곱 개의 표징과 일곱 개의 예수님의 자기 선언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징’이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신성을 증거 하는 ‘하느님의 계시가 구체화 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님의 파스카에 집결되어 있고, 우리는 지금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순시기’의 한 가운데 이르렀습니다. 이제, 전례주년에 따라 ‘기쁨주일’이 지나고, 십자가의 수난이 다가올수록 새로운 창조에 대한 희망의 빛을 점점 더 밝게 비추어집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에 대한 희망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복음>은 갈릴래아의 카나에서 행하신 왕실관리의 아들을 살리신 ‘두 번째 표징’입니다. 이 역시 희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곧 아픈 아들 때문에 절망에 빠져있던 왕실관리가 예수님에게 희망을 걸고 찾아가 기쁨을 찾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에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요한 4,47)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사실, 왕실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한 것 자체가 그의 희망과 믿음의 표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실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굳이 청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불완전했습니다.
그는 백인대장이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 하셨을 때,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루카 7,7)라고 고백했던 것과는 달리,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요한 4,49)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까지 가야만 치유하실 수 있는 정도로만, 혹은 죽기 전에 치유해야만 되는 정도로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라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그렇습니다. 그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아직 표징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종들이 와서 아들이 나은 것을 알려 주었을 때,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표징과 이적을 보고서” 비로소 온전히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병든 아들의 치유만이 아니라, 마음이 병든 아버지도 치유하시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두 영혼을 치유하셨습니다. 비록 그의 믿음이 불완전할지라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비록 겨자씨만한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왕실관리 아들을 살리신 이 ‘두 번째 표징’은 믿는 이들에게는 확증을 주기 위함이요,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는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함이요,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신성과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4,48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주님!
믿음이 부족하오니
도와주소서.
보고도 믿지 못하는
불신을 몰아내소서.
의혹하고 믿지 못하는
병든 마음을 치유하소서.
사랑받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완고함을 몰아내소서.
제 삶이 믿음과 사랑의
표징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가 누군지 알아야 있어야 할 곳이 보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언자는 당신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나자렛을 떠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카나라는 동네로 가십니다. 그 동네에서 카파르나움에서 온 왕실 관리를 만납니다. 그의 아이가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자렛에서의 실망 때문인지,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며 부정적인 표현을 하십니다. 그러나 왕실 관리는 계속 졸랐고 예수님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하였는데, 그 종들에게 아이가 살아난 시간을 묻자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신 시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나자렛이라는 동네를 떠나시어 당신에 첫 번째 표징을 일으키신 카나로 오셨습니다. 여기에서 또 두 번째 표징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는 마치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모르면 결국 자신과 이웃의 파멸을 불러옵니다. 영화 ‘피츠카랄도(Fitzcarraldo)’는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1982년 작품으로, 한 남자의 어리석고 집착적인 꿈이 어떻게 그의 인생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그린 작품입니다.
주인공인 피츠카랄도는 아마존 정글 한복판에 오페라 하우스를 건설하려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남자입니다. 그는 부유한 사업가로서 오페라의 열렬한 팬이며,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과 문화에 대한 열정이 매우 강합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꿈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며, 그로 인해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피츠카랄도는 아마존 강을 따라 오페라 하우스를 건설하기 위해 대규모 투자를 하게 되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방법은 점점 더 무모한 선택들을 포함하게 됩니다. 그는 오페라 하우스를 지을 자원을 얻기 위해, 정글을 가로지르는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세운 계획은 두 개의 증기선을 아마존의 두 강을 잇는 산을 넘어 끌고 가는 것입니다. 산을 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산 중턱을 넘는 과정에서 그가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무모한 꿈에 집착했는지가 극명히 드러납니다.
피츠카랄도의 계획은 점점 더 위험하고 극단적인 상황을 초래하며, 이를 위해 현지 원주민들과 협력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고, 그는 결국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을 위험에 빠뜨리게 됩니다. 그의 집착은 결국 사람들의 희생을 초래하고, 자신이 이룬 것이라곤 모든 것을 잃은 채 끝내게 되는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머물 곳을 아셨습니다. 저는 더 젊었을 때는 저를 싫어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싫은 사람이 거의 없고 모두에게 잘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를 위해 에너지의 99%를 쏟고 1%만 다른 이들에게 쏟았습니다. 그랬더니 결과는 어땠을까요? 똑같았습니다. 저를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저를 싫어한 사람은 제가 목숨을 바쳐도 싫어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다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쏟아주었어야 할 에너지를 그 사람에게 다 소진한 것이 아깝게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이런 경우를 많이 겪습니다. 에너지도 시간도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득이 나지 않는 곳에 투자한다면 어리석습니다. 사막에 씨를 뿌리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열매를 내는 곳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에 믿음의 씨를 뿌리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라는지 관찰하십니다.
나자렛이라는 동네는 처음부터 그들의 교만으로 그 씨가 싹이 트고 자라나 열매를 맺기를 허락하지 않는 동네였습니다.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이끄실 때 에돔과 모압, 그리고 암몬은 싸움을 걸지 말고 아모리 족속과는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머물 수 있는 땅을 지정해 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당신이 어디 머무셔야 하심을 아셨습니다. 당신에 대한 믿음의 열매가 맺히는 곳에 머물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한 번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선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마을이 당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마을을 떠나 다른 마을로 가기로 결심하십니다. 이미 열매가 맺혔기 때문입니다. 열매가 맺혔는데 농부가 계속 일할 필요는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머무실 줄 아셨습니다. 당신을 환영하는 믿음이 성장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풍성히 맺혔다면 다른 곳으로 옮기셨습니다. 우리의 머묾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나를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머물러 봐야 에너지 낭비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곳을 고집하다가는 그들처럼 자신도 말라버립니다. 좋은 땅이 되지 않았는데, 계속 그 땅에 귀한 씨를 뿌리는 것은 어리석은 낭비입니다. 좋은 땅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가 맺히는 땅이 내가 머물러야 할 땅입니다. 그것을 통해 나도 보람이 있고 열매로 가득한 에덴에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에덴이 아닌 곳에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동산을 가꾸는 동산지기와 같습니다. 아직 내가 뿌린 씨의 열매를 맺을 땅이 아니거든 그 땅이 비옥한 땅이 될 때까지 그 시간에 열매를 맺어줄 다른 땅으로 이동하여 일해야 합니다. 우리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그 땅이 ‘신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에게 나자렛 땅이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대사제들은 좋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시간 낭비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받아들이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우리가 성체성사로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말하였을 때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아주 잘 받아들이시고, 지금도 그 숫자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있어야 할 자리가 사제들 속이라기보다는 신자들 속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안에서 분명 더 행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들 속이 많은 열매가 맺히는 에덴동산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들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 이 세상에서부터 에덴동산 안에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어느 심리학 책에서 긍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의 황금 비율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비율은 ‘1.6:1’이었습니다. 전에 다른 책에서 ‘3:1’의 비율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을 읽었었는데, 이 책은 그보다 훨씬 낮은 비율이었습니다. 3:1은 조금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1.6:1은 어떤가요? 이 정도라면 충분히 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긍정과 부정이 교차합니다. 그런데 딱 0.6만큼의 긍정이 더 있으면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계속 긍정만 있어야 잘 사는 것으로 잘 사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부정보다 조금 더 긍정의 마음만 있으면 잘 사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니 희망을 품게 됩니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 신부에게 “요즘 어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냥 그렇죠. 뭐.”라고 답합니다. 부정부터 시작하는 모습에서 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 역시 이런 모습을 자주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제게 “요즘 어때?”라고 물으면, 곧바로 “너무 좋아.”라고 말합니다. 긍정부터 말해야 1.6:1의 황금 비율을 지킬 가능성이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많은 이가 말씀하십니다. 이를 위해 나의 시작되는 말만큼은 긍정으로 해 보면 어떨까요? 황금 비율 도달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 세상을 행복하고 기쁘게 살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을 가진 사람만이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됩니다.
갈릴래야 카나에서 왕실 관리가 카파르나움에 앓아누워 있는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래도 이 왕실 관리는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여기에 이렇게 답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
카파르나움까지 직접 내려가 주지 않는 예수님께 불평불만을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자기 지위를 이용해서 강제로 내려갈 수 있도록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실 관리는 이 말씀을 믿고 떠나갑니다. 부정이 아닌 긍정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아들의 건강으로 나타났습니다.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마음을 내려놓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먼저 믿는 자세가 필요했습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며 예수님 말씀을 믿은 것은 요한복음 안에서 드러나는 가장 높은 신앙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표징과 이적을 떠나 말씀 자체에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더 큰 은총으로 다가오십니다.
오늘의 명언
힘은 이기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서 나온다
- 저머니 켄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우리가 사는 땅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치유입니다. 모든 관계는 기도로 이어져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깨우치는 참된 실천입니다.
믿음은 아픈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껴안습니다. 현실을 치유하는 놀라운 힘은 우리의 믿음이며 우리의 실천에 있습니다.
우리의 실천은 자아 중심성을 벗어나 하느님의 은총을 만나는 공동체의 신앙이 됩니다. 신앙은 인간 생존을 결정짓는 가장 가치있는 가치의 참된 움직임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절박한 요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를 살리는 치유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우리의 일입니다. 헛된 환상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기쁨을 만나는 믿음의 축제가 부활의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실천력을 만나는 은총의 사순 되십시오. 우리의 실천성과 실천력이 만나면 공동체는 살아납니다. 개인과 공동체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몸입니다.
요한복음 4장 5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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