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의 기도가 당신께 다다르게 하소서. 은총의 때이옵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은 참된 구원이시옵니다.
하느님, 의로운 이에게 상을 주시고 참회하는 죄인을 용서하시니 죄를 고백하는 저희를 자비로이 용서하소서.
살아있는 성경 말씀
온라인에서 함께해요!
2025년 4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4주간 수요일
디지털 공간을 밝히는 살아있는 말씀, 온라인 속에서 연결되는 믿음의 길로 초대해요!
2025년 4월 2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49,8-15)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다. - 오늘 복음
(요한 5,17-30)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이사 49,8-15
오늘 제1독서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다.
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9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10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12
보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온다. 보라, 이들이 북녘과 서녘에서 오며 또 시님족의 땅에서 온다.
13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14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요한 5,17-30
오늘 복음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4월 2일
김민수 프란치스코 신부
✚ 교황님 4월 기도지향 00:24
✚ 미사시작 00:49
✚ 강론시작 07:17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안식일의 주인”(마태 12,8)이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그때부터 쉼 없이 일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처럼 일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다인들이 문제 삼은 안식일이라는 특정한 때에 관한 말씀이면서 또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그 방식이 바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보여 주신’(요한 5,20 참조) 그 모습 그대로 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그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살리시려는 이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당신의 말씀을 듣고 당신을 보내신 분을 믿는 신앙을 간직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안식일 규정에 얽매여 ‘안식일의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고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한 줄도 모르는 유다인들과는 다릅니다(루카 6,6-11 참조).
죽은 글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말씀을 듣고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서른여덟 해나 앓던 이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의 오랜 아픔을 참으로 낫게 하시고 또한 더 큰 일도 이루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우리가 ‘건강’해지기를 바라시는 동시에 ‘더 큰 일’을이루고자 하십니다. 이 일들이 이루어지려면 말씀이 우리 안에서 생명력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라는 말씀 안에 담긴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규정에 얽매이는 대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 모습대로 우리도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의 포기를 포기하는
어제 성전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 생명을 살리는 것에 대해서 봤는데 연장선상에서 오늘 얘기도 해보겠습니다. 오늘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는 이 사랑을 어미의 사랑에 비유합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를 잊으셨다.’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복음은 살리는 일을 성부처럼 성자께서도 계속하고 계심을 얘기합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이렇게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을 묵상하며 자연스럽게 저의 사랑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분의 문제로 제가 오랫동안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제가 아는 것만 해도 세 차례나 수도원을 들락날락한 분으로서 다시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을 도와달라고 계속 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가능성도 없고 포기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그분이 계속 조르니 저로서도 난감하기만 합니다.
그분은 한마디로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분입니다. 물론 알면서도 배은망덕한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부르시고 계속 인도하시는 하느님께 계속 배은망덕했고, 도움을 주도록 그때그때 보내 주신 분들에게 배은망덕했습니다.
수도자가 되기에 근기도 부족하고 되려는 동기도 불순하지만 하도 되고 싶어 하니 살면서 변화되기를 바라며 기회를 줬는데 번번이 상황 탓이나 상대방 탓을 하며 은혜를 배신한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어딜 추천해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 거의 뻔합니다. 그런데도 제가 계속 도와야 하는지 오늘 말씀 때문에 고민이고, 도와주지 않는 것은 사랑의 포기가 아닌지 고민이 되는 겁니다. 물론 머리로는 분명합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자세를 바꾸지 않는 한 입회를 도와주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충고해줘도 바꾸려고 하지 않고 또 다른 은인이 나타나길 바라는 그를 더 이상 충고하기를 포기하고픈 마음이 들기 때문에 고민인 것인데 오늘 말씀 때문에 저는 충고의 포기를 포기합니다.
그런데 충고의 포기를 포기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닙니다. 충고의 포기가 그에게 불행이기 때문이 아니라 제게 불행이기 때문에 포기를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충고의 포기는 저의 사랑 포기이고 저의 사랑 포기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은 제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일 뿐입니다.
어제 얘기와 연결하면 성전의 샘이 말라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전에서 물이 계속 나와 흘러가야 하는데 샘이 말라버린 겁니다.
제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랑의 물이 그에게 흘러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샘이 말라버려 사랑의 물이 제게서 나오지 않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이 야단치는 것이든 설득하는 것이든 벌을 주는 것이든 샘이 말라버린 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랑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살리는 일을 주님께서 내 안에서 계속하시고 그래서 사랑의 샘이 내 안에서 말라버리지 않는다면 저는 그리고 우리는 사랑의 포기를 포기하고, 사랑의 물이 우리 안에서 계속 흐르게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사랑의 연합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에 38년 동안 누워 있는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 문제를 삼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하신 일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5,19)
이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이 지상에서 하시는 당신의 일에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며, 그 하시는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5,24)
그것은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요한 5,26)이며,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30)
이는 신적 생명이 사람의 행동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행동에서 온다는 말씀입니다. 곧 신적 생명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사람의 믿음이 온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 속에 생명을 넣으시기에, 사람이 믿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신적 생명은 믿음의 결과나 믿음의 보상으로가 아니라, 믿는 자가 이미 자기 속에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믿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하나 되어 일하십니다. 곧 벳자타의 병자를 고치신 일도 아버지와 하나 되어 함께 하신 정당한 일임을 밝히십니다.
이처럼, 아들의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 아버지와의 사랑의 연합에서 하셨듯이, 우리도 일할 때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연합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5,30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
제가 하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맞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사랑의 연합으로 당
신께서 행하신 바를 행하고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이 당신 뜻 안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올바른 심판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이 걱정 때문
우린 흔히 사람들의 평가에 자주 휘둘리고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곤 합니다. 물론 그 사람들의 평가가 다 옳지는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더라도 모든 사람이 나를 잘 평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실 이 때문에 휘둘리다가 망하는 예가 한둘이 아닙니다.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대표작은 「외투」입니다. 소설은 페테르부르크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는 아까끼 아까끼예비치 바시마치킨의 일상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서기관으로서 문서를 정서(正書)하는 일을 맡은 그는 다른 사람들의 무시와 비웃음에도 자기 직분에 매우 충실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업무에 대한 만족감은 물론 애정도 있어서 별다른 취미 생활도 갖지 않은 채로 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문제가 생기는데, 그것은 이 혹독한 러시아의 추위를 막아줄 새 외투가 필요해진 것입니다. 무수히 고쳐 입었던 낡은 외투가 더 이상 수선 불가하다는 재봉사 페트로비치의 말에 따라 그는 큰마음을 먹고 새 외투를 마련하기 위해 절약을 시작합니다.
밥을 굶고, 집에 불을 끄고, 움직임을 최소화해 옷과 신발을 아껴가며 그는 드디어 재봉사의 손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외투를 건네받습니다. 그 황홀한 순간과 기쁨은 그의 동료들에게도 전해져, 이들은 아카키를 파티로 초대합니다.
하지만 파티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강도를 만나 외투를 빼앗기는 충격적인 일을 겪게 됩니다. 외투를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던 그는 한 고위층 인사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가 엄청난 핀잔과 멸시를 겪게 되고, 그 결과로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카키의 모습을 한 유령이 나타나 사람들의 외투를 빼앗아 가기 시작하고, 그를 핍박했던 고위층 인사가 자신의 외투를 던지고 혼비백산 달아나면서 소설은 결말에 다다릅니다.
계급적 관료 세계에서 늘 말단에 머물러야 했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유령의 모습으로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주먹”을 내미는 마지막 장면은 유쾌한 전복이 누구의 평가도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왜 사람들의 시선에 휘둘릴까요? 결국 타인의 판단이 자기 ‘생존’에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타인의 시선에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소설 ‘외투’는 주인공의 자유는 죽어서야 비로소 얻어집니다. 죽으면 생존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으므로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실 수 있으셨을까요? 당신 생존을 책임져 줄 아버지께 좋은 평가를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옳게 평가하실 수 있는 분은 아버지 한 분뿐이라는 것이고 당신이 아버지와 대등한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판단 또한 올바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한 판단에 항상 자기 이익을 위한 의도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판단에서도 자유로운데, 오직 자기 생존의 문제에 대해 더는 걱정하지 않게 해 줄 누군가에게 좋게 평가받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에디슨이 7살이 되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그가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편지 한 장을 건넸습니다. 교사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읽어달라고 부탁하자, 어머니 낸시는 조용히 편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천재입니다. 이 학교는 그의 교육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더 좋은 교육을 받게 하십시오.”
에디슨은 감격했습니다. 어머니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러니, 엄마가 너를 직접 가르칠 거란다. 너는 특별하니까.”
그날 이후 낸시는 직접 아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에디슨은 어머니의 사랑과 신뢰 속에서 마음껏 실험하고 탐구하며 자랐습니다. 그는 후에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믿어주었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만들어 주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어머니 덕분이다.”
수십 년 후, 어른이 된 에디슨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그 오래된 편지를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더 이상 교육시킬 수 없습니다.”
에디슨은 그 편지를 들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날 어머니는 학교의 평가를 지워버리고, 자신의 아들을 정의하는 새로운 문장을 써준 것이었습니다.
“너는 천재야.”
그 한마디는 세상의 모든 평가를 무너뜨리고, 에디슨을 자유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세계를 바꾸는 수많은 발명을 가능케 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평가받아야 합니다. 나의 생존을 위해 의지해야 할 대상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 죽음을 해결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오직 창조자뿐입니다. 생존의 문제에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만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죄를 지으면서 어떻게 하느님께 좋게 평가받는다고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자녀로서 예수님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어느 마을에 사탄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사탄의 정체를 깨달은 뒤에 소리치고 고함과 비명을 지르면서 가능한 한 빠르게 그리고 멀리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연세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할머니에게 “너는 내가 무섭지 않으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사탄이잖아. 사람들은 너를 악의 화신이라고 말하지.”
사탄은 “그런데 너는 왜 나를 무서워하지 않지? 사람들은 모두 내가 무서워서 저렇게 줄행랑을 치는데?”라고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전혀 무섭지 않다면서 태연하게 말했고, 사탄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사탄! 내가 네 형과 결혼한 지 벌써 61년이 되었어.”
사탄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남편이 사탄처럼 죄를 많이 짓는 사람이었고, 그 죄에 대해 익숙한 상태였기에 무섭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스갯소리로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죄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사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정작 두려워할 분은 하느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를 숨기려고만 합니다. 죄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니 사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도 함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렇기에 죄 자체보다 하느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죄에 매여 있으면 하느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서 사탄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안식일을 어기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들었다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죄를 숨기면서 계속해서 죄에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이 좋아하는 일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 곧 가르치시고 병을 고쳐주시는 일들은 모두 아버지와 일치하는 것을 근거로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을 아드님께서도 그대로 하실 따름이며,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당신의 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보지 못하면서, 자기만 옳다고 생각합니다.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면서도 자기 죄를 숨기면서 ‘자기는 옳고, 예수님은 틀렸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숨겨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고해성사가 있지요. 겸손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자기를 낮출 수 있는 사람만이 사탄을 두려워하지 않아 사탄의 일보다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다른 능력보다 훨씬 뛰어나고 드문 능력이 있다. 바로 능력을 알아보는 능력이다
- 엘버트 허버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지금이 바로 그때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다시 마음이 살아나고 다시 생명이 살아나는 하느님의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시작입니다.
생명의 모든 소식은 이와 같이 생명으로 전달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뜻인 생명을 합치면 가장 좋은 생명이 됩니다.
바로 여기에 있는 생명은 가장 좋은 하느님의 생명을 향합니다. 생명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영원하신 생명으로 우리들 안에 머무시며 우리를 비추십니다.
하늘의 일이 땅에서도 이루어집니다. 무너지지 않는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안에는 꺼지지 않는 하느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예수님께서 너무나 잘 보여주십니다.
생명을 바쳐 생명을 이루십니다. 생명의 뜻은 언제나 올바르십니다.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생명이며 회개입니다.
생명과 심판 사이에 가장 좋은 믿음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믿음은 가장 좋은 선(善) 추구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선을 추구하는 가장 좋은 지금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이사야서 49장 15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오늘 성경 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피어나네
말씀카드 성경구절 더 보기
pieonane.com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04/03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1) | 2025.04.03 |
---|---|
25/04/01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4.01 |
25/03/31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31 |
25/03/30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30 |
25/03/29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1) | 2025.03.29 |
25/03/28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28 |
25/03/27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