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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4/04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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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당신 이름으로 저를 구하시고, 당신 권능으로 제 자유를 찾아 주소서. 하느님, 제 기도를 들으시고 제 입이 아뢰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느님, 나약한 저희를 이 제사로 도와주시니 저희가 구원의 은혜를 기쁘게 받아들여 그 은혜를 새로운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4월 4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살아있는 성경 말씀
온라인에서 함께해요!

2025년 4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디지털 공간을 밝히는 살아있는 말씀, 온라인 속에서 연결되는 믿음의 길로 초대해요!

2025년 4월 4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지혜 2,1ㄱ.12-22)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 오늘 복음
    (요한 7,1-2.10.25-30)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지혜 2,1ㄱ.12-22
오늘 제1독서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악인들은 


옳지 못한 생각으로 저희끼리 이렇게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3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14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15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 

16 
그는 우리를 상스러운 자로 여기고 우리의 길을 부정한 것인 양 피한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21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22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요한 7,1-2.10.25-30
오늘 복음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4월 4일
고병관 요셉 신부

 

✚ 교황님 4월 기도지향 00:24

✚ 미사시작 00:45

✚ 강론시작 07:4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목격한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하고 말하며 예수님께서 메시아일 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그들”(7,25)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데서 ‘그들’과 같은 생각을 지닌 부류라고 판단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메시아가 어디에서 오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잘못된 지식에 기대어 예수님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메시아께서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누룩을 조심하고 경계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영향으로 예수님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잘못된 지식으로 그분을 메시아라고 하는 증언까지 거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당신을 거부하고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공공연하게 큰 소리로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는 “와서 보아라.”(1,39)라는 말씀을 듣고 편견이나 왜곡된 시선이 아닌 그저 있는 그대로 와서 보고 처음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볼 수 있도록 숨으시지 않고, 들을 수 있도록 공공연하게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그분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데 걸림돌이 무엇인지 살펴 마음을 그분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의인과 악인 사이에서 나는?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오늘 독서 지혜서는 악한 자들이 하느님의 자녀에게 어떻게 하는지 그런 내용인데 복음에서 주님을 죽이려는 자들도 이와 같다는 뜻이고, 여기서 우리는 악한 자들이 하는 짓과 하느님의 자녀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악한 자의 짓을 보면 -의인에게 덫을 놓고 -고통으로 의인의 인내를 시험하고 -하느님이 의인을 어떻게 하시는지까지 시험합니다.

다음으로 이에 대해 의인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먼저 자기는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임을 확신하고, -악인의 생각과 하는 짓들이 율법과 배운 것과 다르다고 모조리 나무라고, -아무리 악인들이 덫을 놓고 고통을 줘도 하느님이 자기 편이라고 믿기에 자기들이 승리한다고 확신하며 끝까지 인내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하느님의 자녀인지는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DNA가 다릅니다. 하느님 자녀라는 의식이 남다르고 뚜렷합니다. 머리뿐 아니라 뼛속까지 이 의식이 들어가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지만 악인은 그런 자아의식이 약한 데 비해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아의식과 자부심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하느님 자녀로서 자녀답게 행동하고 악한 짓을 하는 사람과 부화뇌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잘못을 나무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저를 반성하면 나만 그런 짓 하지 않으면 돼지 하며, 적당히 침묵할 수도 있는데 의인은 그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 결과 엄청난 박해와 고통과 따돌림을 당하는데 이때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견뎌 승리하고 맙니다.

사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부심이 약한 사람은 이때 흔들립니다. 고통을 견뎌내는 힘 곧 인내심이 약해 지조가 흔들릴 뿐 아니라 끝까지 견딜 자신도 없고 끝내 이기리라는 확신도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봐야 합니다. 악인과 의인 사이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의 자아의식과 자부심은 어떤 것이고 어느 정도인지.

고통을 견디는 나의 인내심과 인내력은 어느 정도인지. 고통 한가운데서 나는 고통을 보는지 하느님을 보는지. 다음으로 현재의 자신에 실망하고 주저앉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은 비록 확신도 인내심도 약하여 많이 흔들리지만 흔들리면서 차츰 강해지고 꽃은 피는 것이니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우리는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며, '위'로부터 난 사람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초막절 축제일을 맞으러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을 때 벌어진 일, 곧 예수님을 향한 대립과 배척이 고조되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극대화 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약 6개월 뒤, 유월절에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30)

사람들은 우왕좌왕 합니다. 예수님을 두고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인성은 알지만, 신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그들은 비록 그분이 나자렛 사람이고,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그리스도에 관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2,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당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적이고 그들 삶의 중심적인 장소인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7,28 참조).

여기서 ‘큰 소리로 말하다’의 뜻은 성령의 영향을 받아서 ‘급박하게 외치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마치 희년선포 때처럼 성령의 힘으로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위’에서 오신 분이심을 밝히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7-8)

분명, 우리는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며, ‘위’로부터 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수난의 사순시기를 당신과 함께 걸으며, 새로운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7,29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주님!
위로부터 
새로 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있고, 
당신이 흘러들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흐르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생명이 
피어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타협하는 신앙은 매력이 없다, 그래서 희망도 없다.

예수님께서 초막절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을 때 몇몇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동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만큼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본인들도 그 믿음을 계속 유지하기 힘이 듭니다.

일본은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선교로 천주교 신앙이 급속히 전파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그리스도교 금교령이 내려지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하고 극심한 박해를 겪었습니다.

박해의 공포 앞에서 일부 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신앙을 숨긴 채 잠복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을 ‘가쿠레 기리시탄(잠복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박해를 피해 숨은 신자들은 겉으로는 불교나 신토(神道)의 신앙을 따르는 척 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천주교 신앙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들의 신앙은 원래의 가톨릭 교리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리아 관음(マリア観音)’상입니다.

원래의 성모 마리아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당국에 적발되어 처형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성모 마리아를 일본식 불상인 관음보살(観音菩薩)과 비슷하게 만들어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본래의 성모 마리아 신심은 점점 희미해지고, 마리아 관음상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아닌 일본 토착 종교의 신적인 존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박해를 피하기 위해 기도문과 성가도 일본 토착 종교적 표현으로 은밀히 바꾸고 위장하게 되었습니다. 미사 전례도 점차 원형을 잃어버렸으며, 성사의 정확한 의미와 방법 또한 잊혀졌습니다.

이러한 변형은 수 세대에 걸쳐 지속되었고, 19세기 중반 일본이 개항하고 천주교 선교사들이 재입국했을 때, 많은 잠복 기리시탄들은 이미 정통 천주교와는 전혀 다른 신앙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가쿠레 기리시탄들은 오랜 세월 박해 속에서 죽음을 피하려는 두려움으로 인해 정통 신앙을 잃고, 그들만의 왜곡된 신앙 체계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혹독하고 오랜 박해에도 신앙을 지켜온 것은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의 가톨릭교회는 거의 죽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역사를 기억하며, 신앙을 보존하고 전하는 일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죽음을 피하고자 했던 가쿠레 기리시탄의 역사는 결과적으로, 두려움이 신앙을 왜곡하고 궁극적으로는 신앙의 쇠퇴와 소멸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 가톨릭 신앙은 일본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민족성 자체가 밟으면 더 기를 쓰고 일어나는 민족성이 우리나라입니다. 한국의 천주교회는 18세기 말, 외국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 학자들 스스로 진리를 찾아 받아들인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형태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독특한 출발은 초기에 사제가 없다는 치명적 약점을 가졌습니다. 초기에는 임시로 평신도가 성직자의 역할을 대신하는 ‘가성직(假聖職) 제도’를 만들어 교회의 모습을 갖추려 했으나 이것이 정통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는 반드시 교회의 공식 절차를 통해 안수를 받은 정통 사제들을 목숨을 걸고 영입하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또한 초기 한국 천주교회는 당시 조선 사회에서 일반적이었던 유교의 조상 제사나 불교적 요소와 결합하는 방식을 철저히 거부하고, 오직 교황청의 지침에 따라 정통적인 신앙만을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필연적으로 당시 조선 사회의 전통적인 관습과 충돌을 빚게 되었고, 이는 곧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오히려 신자들에게 더욱 굳은 신앙을 불러일으켰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는 신앙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순교 정신은 또한 정통 사제를 초빙하는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신자들은 중국 베이징 교구에 여러 차례 대표단을 파견하여 사제 파견을 요청했습니다. 그 결과,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최초로 한국에 입국하여 성사를 집전하고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후에도 사제의 영입운동은 계속되어, 마침내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의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 등이 조선 땅에 들어와 비로소 한국 천주교는 본격적인 성직 중심의 정통적인 교회 체계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비록 가성직제도와 같은 불완전한 모습으로 시작되었지만,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왔을 때는 거의 로마보다 더 로마다운 보편 교회가 요구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이 형태는 목숨을 걸고 지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켜내는 이들에게 많은 열매를 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믿는 사람 손 들어보라고 하면 신자 중의 몇 프로나 들까요? 거의 들지 않습니다. 조선시대는 성체 한번, 고해성사 한 번 하려 목숨을 걸었었습니다. 신앙은 죽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신앙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세상과 타협하고 변질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신앙은 더는 매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가톨릭 신앙은 어떻습니까? 세상과 타협하기 위해 지옥도 없다고 하고, 성체를 왜 영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십일조도 더는 이야기하지 않고, 삼위일체 교리까지도 쉬운 방식으로 변질시켜 설명합니다.

사랑도 제 목숨을 지키려 하는 타협적인 모습을 보일 때는 믿을 수 없는 게 되어버립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왜 지금도 매력적입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숨에 관계된 것입니다.

성 라우렌시오나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 초대교회의 성인인 폴리카르포 주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타협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수많은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과 믿음을 주었습니다. 종교나 사랑이나 다 목숨을 내어주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매력을 잃는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들은 그분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길도 험하고 날씨도 안 좋은 날에 두 명이 달리기 시합을 하면 어떤 사람이 이길까요? 여러 가지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더 빠른 사람이 이긴다고 말할 수 있고, 더 건강한 사람이 이긴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의 답은 이러했습니다.
 
“더 긍정적인 사람.”
 
더 긍정적인 사람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크게 타격받지 않고 웃으며 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길 수 있고 또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긍정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고, 또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살지도 않습니다. 자기의 한 걸음, 한 걸음에 기쁨을 담으면서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최종 결승선에 웃으며 들어올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긍정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힘이 센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함께해 주심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게 되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웃으며 다시 한 발을 내딛게 됩니다. 분노와 원망이 생겨나는 순간에도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사랑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결승선에서 이기는 사람은 과연 누가 될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믿고 따랐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고, 그래서 죽이려고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에 대해 말씀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시지 않습니까?
 
최고 의회 의원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지만, 손도 대지 못합니다. 그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이 두렵고, 자신들이 하려는 일에 대해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일은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합니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때 주님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음의 위험에서도 하느님의 일을 하기에 두려움 없이 말씀하시는 모습을 말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부족한 우리입니다. 그래서 계속 불안하고 두려워합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주저합니다.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과거 성인 성녀들이 보여주셨던, 어떤 순간에서도 잃지 않았던 긍정의 마음을 간직한다면 우리 역시 힘차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힘든 날에도 정신을 차리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 심페웨 은툴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그분을 안다.

우리가 누군 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오신 줄을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모르는 아픔이 하느님을 향한 모독이 되고 혼돈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을 아는 기쁨으로 수리하고 수선하는 사랑의 사순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책임진 적이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모르는 우리들에게 계속하여 빛을 비추시고 꽃 피는 봄을 아낌없이 선사하십니다.

우리의 삶이란 일직선이 아니라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휘어진 우리 삶에서 진정한 삶을 깨워내시는 하느님을 깨닫는 절실함이 삶이 됩니다. 오늘도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알고 믿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새로운 길을 생명의 길을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십니다. 명백함과 모호함의 받아들임의 차이가 아니라 하느님의 생생한 현존을 우리가 알고 믿는 것입니다.

마음이 맑아져야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아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압니다. 예수님을 알기에 예수님께서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를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봄을 우리의 행복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믿고 하느님의 때가 바로 오늘임을 믿습니다.

앎과 믿음 사이에 굴곡이 있고 우리의 삶이 있습니다. 굴곡의 계곡 사이에도 어김없이 봄이 있고 하느님의 참된 뜻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오늘 되십시오.

 

 

 

요한복음 7장 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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