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기쁘게 마셔라.
주님, 이 참회와 기도의 때에 저희 마음을 바로잡아 주시어 파스카 신비를 올바로 깨닫고 열심히 살아 형제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하게 하소서.
살아있는 성경 말씀
온라인에서 함께해요!
2025년 4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디지털 공간을 밝히는 살아있는 말씀, 온라인 속에서 연결되는 믿음의 길로 초대해요!
2025년 4월 1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에제 47,1-9.12)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파스카 성야 세례 서약 갱신 후 따름 노래). - 오늘 복음
(요한 5,1-16)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에제 47,1-9.12
오늘 제1독서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파스카 성야 세례 서약 갱신 후 따름 노래).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3
그 사람이 동쪽으로 나가는데, 그의 손에는 줄자가 들려 있었다. 그가 천 암마를 재고서는 나에게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발목까지 찼다.
4
그가 또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무릎까지 찼다. 그가 다시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허리까지 찼다.
5
그가 또 천 암마를 재었는데, 그곳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있었다. 물이 불어서, 헤엄을 치기 전에는 건널 수 없었다.
6
그는 나에게 “사람의 아들아, 잘 보았느냐?” 하고서는, 나를 데리고 강가로 돌아갔다.
7
그가 나를 데리고 돌아갈 때에 보니, 강가 이쪽저쪽으로 수많은 나무가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
요한 5,1-16
오늘 복음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1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의 ‘양 문’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3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4)·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6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7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9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10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11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13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14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5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16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4월 1일
최연준 사도요한 신부
✚ 교황님 4월 기도지향 00:26
✚ 미사시작 00:49
✚ 강론시작 08:59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어떤 한 사람이 서른여덟 해나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를 돌보아 주지 않았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저마다 아픈 이들이었기에 다른 이의 아픔이 눈에 들어올 리 없던 것이지요.
모든 이가 같은 희망을 가지고 모여 있는 벳자타 못에서 물이 출렁거릴 때마다 이 사람 또한 온 힘을 다하여 물에 들어가 낫기를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힘이 있어 일어날 수 있었더라면 다른 사람이 먼저 물에 들어갈 때 아쉬워하며 다음을 기약하였겠지만, 이제는 병세가 나아지지 않는 데다가 그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였다면, 그는 희망을 잃고 좌절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건강을 되찾고 싶은 마음만을 미련처럼 간절하게 붙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만 이 사람에게 관심을 두시고 “건강해지고 싶으냐?”라고 물으신 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6.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한말씀으로 그는 병이 나아 건강해졌습니다. 연못에 먼저 들어가야만 낫게 되는 것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그저 한말씀만 하시어 낫게 하셨습니다.
서른여덟 해나 앓던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 일어날 의지를, 들것을 들 힘을, 그리고 걸어 나갈 용기를 얻어 지금까지 갇혀 있던 삶에서 벗어나 참된 삶으로 갔습니다.
생명을 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우리도 오랜 아픔과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다만 일어나 나아가려는 의지와 용기를 지닐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건강하게 해주는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오늘 복음에서 병자는 주님을 ‘건강하게 해주신 분’이라고 합니다. 그렇지요. 주님은 건강하게 해주시는 분이시지요. 그런데 주님을 생각하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는 어떤 사람일까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그 병자가 38년 앓는 동안 성전을 오간 사람이 부지기수였지요. 그런데 그들 중 아무도 그를 건강하게 해주지 않았고 주님만 건강하게 해주셨지요. 그래서 저도 그 부지기수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성찰을 했던 것입니다.
아울러 건강하게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병들게 하는 사람이 아닐까도 성찰해봤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가 의도적으로 누구를 병들게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긴 하지만 제 기가 너무 세서 기가 약한 사람을 병들게 할 수 있겠지요.
또 사랑하긴 하지만 제 사랑이 적절치 않아 어떤 때는 사랑의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잘못되게 만들고, 어떤 때는 사랑의 물을 좀 적게 줘서 잘못되게 만들지요.
또 어떤 때는 너무 오냐오냐하다가 온실 속의 꽃처럼 연약하게 만들고 어떤 때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너무 들볶아 시들시들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요.
어쨌거나 나라는 성전에서 사랑 곧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지 않고, 미움 곧 죽음의 물이나 욕심으로 오염된 물이 흘러나오는 겁니다. 바오로는 사도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지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성전이어야 하는데 성전이 아니니, 하느님의 영께서 머무셔야 하느님의 성전이 되는데 사랑의 영이 머물지 않으니 우린 성전도 아니고 생명의 물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나 개인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이 머물지 않고 육의 영이 머물면 우리는 욕심과 탐욕이 충돌해 싸울 것이고, 주장과 주장이 충돌해 싸울 것입니다.
비난과 욕설이 충돌해 싸울 것이고, 미움과 분노가 충돌해 싸울 것입니다. 그러다 서로 다치고 병들어 자기도 죽고 생명의 물이 아니라 죽음의 물이 흘러나와 주변도 죽을 것입니다. 여기서 옛날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가 물 위에 떠 오르고 여린 살이 썩어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죠.”
오늘 에제키엘서에서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나고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라고 하는데 우린 생물이 우글거리는 성전인지 죽음이 판치는 복마전인지 돌아보는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들것을 들고 걸어가자.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들은 왕실관리의 아들을 치유하신 ‘두 번째 표징’에 이어 벌어진 ‘세 번째 표징’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축제 때가 되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안식일에 ‘벳자타 못’을 방문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병자들과 서른여덟 해나 앓아누워 있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른여덟 해 동안 광야생활에 찌들고 문드러진 이스라엘 백성의 표상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표상입니다.
그가 있는 ‘벳자타 못’에는 ‘물’이 있었습니다. ‘물’은 <성경>에서 죽음과 생명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의 상징과 동시에 정화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홍해의 물은 파괴와 죽음임과 동시에 정화와 생명의 상징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의 물과 <복음>의 ‘벳자타’의 물도 그렇습니다. 정화와 생명의 물은 첫 번째 표징인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새 생명의 포도주로, 파괴와 죽음의 물은 여섯 번째 표징인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장면’에서 발아래 짓밟혀질 것입니다.
‘벳자타’라는 말은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은혜의 집’인 여기 ‘벳자타’에서 은혜로운 생명의 물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어쩔 수 없는 약함과 무능력을 한 아름 보듬고서 말입니다. 벗어나지 못한 질병과 악습과 상처를 부둥켜안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
“예”라고 즉각적인 믿음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자를 물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하면서 구실과 변명을 들이대며 투덜대는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이는 당신이 참된 “물”이심을 말합니다. 곧 ‘벳자타의 물’로가 아니라, 당신 ‘말씀의 물’로 그를 적셔주시어 그를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씀이 바로 ‘생명의 물’입니다. 곧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의 물’이심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받은 병자에게 들것을 버리고 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들것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십니다. 자신의 몸을 얹어놓았던 들것을 이제는 스스로의 손으로 들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말씀의 물을 마시고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들것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치유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누워있던 들것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꺼이 사랑의 표지로 들고 가는 것임을 말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시로 지니신 오상처럼, 그 상처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그 자비, 그 사랑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 이제는 다른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처에서 십자가를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에게 베풀어진 자비와 구원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절망과 무기력한 사순이 아니라, 파스카를 향한 희망과 기쁨의 사순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다른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면서 말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5,8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주님!
깔고 있던 들것을 떨치고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가게 하소서.
입은 자비를
들것에 들고 다니게 하소서.
이제는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순종을 위해 가슴을 찢은 만큼 은총이 스며든다.
저는 항상 교회에 반항하며 살았습니다. 처음에 사제가 되고자 하는 부르심을 어렸을 때부터 받기는 하였습니다. 25살까지 저항하였습니다. 계속 저항했다면 사제가 되는 축복은 받을 수 없었습니다. 신학교 때는 유학 가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저는 거부의 의사를 밝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승낙하기는 하였으나 교수와의 갈등으로 논문도 힘겹게 마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순종이 없었다면 성서 석사학위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제가 되어서 다시 유학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싫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주교님이 한 달 기도해보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시 교수님들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가장 힘든 일입니다. 순종이란 것이. 덕분에 교의 신학 석박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은총의 크기가 커질수록 순종의 무게도 커졌습니다. 본당 생활을 조금 하다가 보니 교구청으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저는 못 참고 2년 반 만에 주교님께 내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중도에 교구영성관으로 가서 6년 동안 있게 되었습니다. 저의 역사만 이렇겠습니까? 신앙은 단 한 가지, 순종을 배우는 과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38년이나 병이 고쳐지기를 바라며 매일같이 벳자타 연못에 나와 있는 한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에게 다가가 먼저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는 당연한 것을 물어보는 예수님이 이해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합니다.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이 하려고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예수님은 많은 병자가 있는데, 이 병자의 무엇을 보고 고쳐주셨을까요? 우선은 이 병자가 은총을 바라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매일 38년을 같은 병원에 다니며 병을 고치려고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사람은 그 병을 반드시 그 병원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희망의 크기는 믿음의 크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해 보입니다. 다른 많은 병자들도 그런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벳자타 연못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병자가 38년 동안이나 희망하도록 내버려 두신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을 배우게 하려고? 바로 ‘순종’입니다.
영화 『가라테 키드』에서 스승 미야기는 제자인 다니엘에게 이해되지 않는 반복적인 작업(자동차 닦기, 바닥 닦기, 페인트칠 등)을 지시합니다. 다니엘은 순종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노동이라고 생각하며 항의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진짜 대련 상황에서, 그 모든 반복적인 동작들이 몸에 익어 방어 기술로 쓰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니엘은 비로소 스승에게 순종한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결과적으로 큰 은혜와 승리를 얻게 됩니다.
이런 일이 신앙에서도 일어납니다. 성녀 파우스티나는 예수님으로부터 환시와 계시를 받았지만, 고해신부가 그것이 진정한 계시인지 시험하기 위해 그녀에게 모든 환시를 기록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내적 고통으로 가슴이 찢어질 듯 힘들었지만, 파우스티나는 고해신부를 통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모든 환시를 멈추고 기다렸습니다.
결국 고해신부는 그녀의 순종을 보고 그녀가 받은 계시를 기록하도록 허락했고, 그 기록들은 훗날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의 일기』로 전파되어 전 세계 수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총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오상의 성 비오 신부(Padre Pio da Pietrelcina)는 교회로부터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약 2년여 동안 공식적으로 신자들 앞에서 미사를 집전하거나 고해성사를 주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교회 당국은 비오 신부의 성흔(오상)의 진위에 대한 의혹과 그의 인기에 따른 혼란을 염려하여 이러한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비오 신부는 이 금지령 앞에서 매우 힘든 시간을 겪었지만, 교회의 결정에 대해 철저히 순종하며 겸손하게 인내했습니다.
마침내 1933년 교회는 금지령을 철회했고, 성 비오 신부는 다시 공식적으로 신자들 앞에서 미사를 집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의 성덕과 겸손한 순종의 모범은 더욱 널리 알려졌고, 많은 신자들에게 큰 은총을 끼쳤습니다.
은총은 선물입니다. 선물을 주는 사람은 그 받는 사람에게 무언가 기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거저 주는 젖 안에도 실제로는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 숨어있습니다. 이 기대를 저버릴수록 젖을 주고 싶은 마음도 감소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오늘이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병자가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나사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갈 수 있도록 자기를 낮출 수 있도록 38년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38년은 그 병자가 순종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에 유다인들은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는 은총을 주는 이에게는 반드시 순종의 그릇으로 다가가야 함을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라고 말하며 증거합니다.
우리는 가정에도 있을 수 있고, 회사에도 있을 수 있고, 나라나 교회 안에 속해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공동체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은총이 다릅니다. 가끔은 능력 있는 사람에게 은총이 주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순종이 없고 능력만 있는 사람은 그 조직에 위해가 될 수 있기에 은총을 주는 이는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언제나 순종의 능력을 첫째로 꼽을 수밖에 없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아이에게 그 아이가 달라는 것을 다 사준다면 부모의 권위가 실추되고 가정은 콩가루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심부름이라도 시키고 용돈을 주는 것입니다.
은총을 받기 위해 먼저 그릇을 준비합시다. 그 그릇은 순종입니다. 성모님께서 은총을 받으시기 위해 어떤 순종의 그릇을 준비하셨습니까? 주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겠다는 존재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총의 그릇을 준비하는 기도를 매 삼종기도 때 되풀이합니다. 그냥 바치지 말고 은총의 그릇이 된다고 여기며 삼종기도를 바치면 많은 은총을 이 세상에서부터 받는 은총의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가끔 비행기를 탈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제주도 갈 때도 탔고, 또 해외로 나갈 일이 있으면 비행기를 탑니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 종종 난기류를 만나서 심하게 흔들릴 때가 있지요. 기내 방송에서 안전벨트를 하라는 소리가 들리면서 심하게 흔들립니다. 이때의 기분은 어떻습니까? 비행기 사고를 뉴스에서 많이 접했었기에 ‘혹시’라는 생각과 함께 약간의 두려움도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안전벨트만 잘하고 있으면 난기류로 인해 사고가 날 확률은 1%도 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사실 난기류에 흔들리는 것은 비행기가 단순히 바깥 상황에 휩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면서 기체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입니다. 괜찮아지려고 흔들리는 것이기에 만약 이때 흔들리지 않으면 진짜로 위험하게 됩니다.
우리 삶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내 삶이 난기류를 만난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으면 이 난기류를 이겨내지 못하기에 흔들리는 것을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난기류와 고통과 시련이 아예 없으면 좋겠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볼 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이라는 난기류에서 흔들리면서 균형을 잡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잘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와 늘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흔들린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행기가 난기류 뒤에 다시 고요해지는 것처럼, 흔들린 뒤 곧바로 평화를 얻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또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시기에 우리는 절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연못에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 연못에는 하나의 전설이 있었지요. 물이 출렁일 때, 처음으로 그 물에 뛰어든 사람이 은혜를 입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병자는 앓아누워 있었고, 물이 출렁거릴 때 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그마치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건강해지고 싶으냐?”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이 병자는 벳자타 연못에 제일 먼저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연못에 들어가는 목적이 건강인데, 이는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는 건강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그가 원하는 것을 해 주시지 않고, 필요한 것을 해 주셨습니다.
이런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난기류와 같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주님을 떠올리며 주님께 대한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오늘의 명언
귀 기울여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두드릴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좋은 관계가 아닐까?
- 나쓰메 소세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건강해지고 싶으냐?
정작 건강해지고 싶은 우리의 진실한 고백이 전혀 없습니다. 변명과 핑계의 합리화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변명과 핑계를 멈추고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오는 것이 주님을 받아들이는 치유의 시작입니다. 자신을 받아들일 때 바뀌는 믿음의 성장입니다. 직면하지 않고서는 자유로울 수 없고 해방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먼저 돌아보는 것이 정신의 참된 회복입니다. 건강한 삶을 바란다면 절망과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소중한 정신을 우리가 지녀야 합니다. 소중한 정신은 우리 자신이 진짜의 삶을 살게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건강한 삶은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참된 우리의 이야기에서 멀어지지 않는 사순이길 기도드립니다. 누군가가 내버린 아픔의 이야기가 실은 예수님의 고통이고 우리의 역사였습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 삶의 치유입니다. 치유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건강하게 되는 우리의 진실한 고백이 열리는 뜻깊은 사순의 아침입니다.
에제키엘서 47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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