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불충한 백성에게 맞서 제 소송을 이끌어 주소서. 거짓되고 불의한 자에게서 저를 구해 주소서.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의 힘이시옵니다.
주 하느님, 성자께서는 죽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셨으니 주님의 도우심으로 저희도 그 사랑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게 하소서.
살아있는 성경 말씀
온라인에서 함께해요!
2025년 4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5주일
디지털 공간을 밝히는 살아있는 말씀, 온라인 속에서 연결되는 믿음의 길로 초대해요!
2025년 4월 6일 사순 제5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43,16-21)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나의 백성에게 물을 마시게 하리라. - 제 2독서
(필리 3,8-14)
그리스도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을 것입니다. - 오늘 복음
(요한 8,1-11)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사 43,16-21
오늘 제1독서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나의 백성에게 물을 마시게 하리라.
16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은 바다 가운데에 길을 내시고 거센 물 속에 큰길을 내신 분,
17
병거와 병마, 군대와 용사들을 함께 나오게 하신 분. 그들은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꺼져 가는 심지처럼 사그라졌다.
18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20
들짐승들과 승냥이와 타조들도 나를 공경하리니 내가 선택한 나의 백성에게 물을 마시게 하려고 광야에는 샘을 내고 사막에는 강을 내기 때문이다.
21
이들은 내가 나를 위하여 빚어 만든 백성, 이들이 나에 대한 찬양을 전하리라.
필리 3,8-14
오늘 제2독서
그리스도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을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8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10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11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
13
형제 여러분, 나는 이미 그것을 차지하였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14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니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요한 8,1-11
오늘 복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3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4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6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7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8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4월 6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13:18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라는 말씀을 이루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분을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 처분을 여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지니시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며 중풍 병자와 죄 많은 여인을 용서하셨고(마태 9,1-8; 루카 7,36-50 참조),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마태 26,28) 당신을 희생하실 만큼 큰 자비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앞세워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거스르시지 않고 한말씀만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그 말씀을 듣고 모두 자리를 떠나자 예수님과 그 여인만이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죄가 없으시기에 여인을 심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지만 그를 단죄하시는 대신 “다시는 죄짓지 마라.”(8,11)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을 처벌에서 구하실 뿐만 아니라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시고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지은 우리를 심판하시기보다 용서하시며, 다시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고 악에서 구할 것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 주님 앞으로 나아가 겸손되이 용서를 청하고 죄에서 돌아서서 회개의 결심을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훌훌털고 앞으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제 생각에 사순 제5주일은 우리를 해방하는 용서, 앞으로,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용서가 주제입니다.
죄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느님 계명을 거스르며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이지만 자기와의 관계 또는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우리를 죄에 매이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죄를 지으면 인간은 자신의 죄이건 남의 죄이건 거기에 매이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에는 멀어지고 자신이건 남이건 죄에는 매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을 보면 여인이 욕망에 사로잡혀 하느님께 떨어져 나가고 죄에 매이게 된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도 시선이 간음한 여인에게 꽃이고 결과적으로 여인의 죄에 매이잖습니까?
그저께 대통령이 파면될 때 저는 그것을 애써 보지 않고 일에 전념했습니다. 어떻게 될지 저도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어떻게든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거기에 매인 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파면이 선고될 때 그걸 보느라 아무도 오지 않던 손님들이 파면되자 식당에 와서는 찬성파는 찬성파대로 기쁨을 서로 나누고, 반대파는 반대파대로 분노를 터트리는데 저는 그런 그들과 일희일비했습니다.
그의 파면이 우리나라 전체를 보면 잘됐다는 면에서 함께 기뻐하면서도 윤석열이라는 한 인간을 보면 너무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나라에 오시면 어떻게 하실까? 헤로데에게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실로암 탑이 무너져 죽었을 때 그들만 죄가 있다고 너흰 생각하느냐?
너희도 회개하라고 하셨듯이 주님께서는 너희에게는 윤석열 같은 죄가 없느냐? 너희도 회개하라! 하실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도 죄에서 해방되고, 주님처럼 이웃도 죄에서 해방되게 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용서가 내 죄든 남의 죄든 죄에서 나와 너를 해방하게 해줍니다. 죄의 나와 죄의 너를 진정 사랑하고 연민할 때 우리는 용서할 수 있게 되고 너도나도 해방하게 해줍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여인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죄로 돌아가라는 것도 아닙니다.
더 이상 과거의 죄에 사로잡혀 있지 말고, 다시 말해서 과거의 죄를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미래, 생명의 미래를 향해 가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과거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돌아간다면 하느님께 돌아가야 하고 그것이 오늘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정방향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사람이 그리워야 사람이다. (양광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통은
그리움이라 하지요
어려서는 어른이 그립고
나이가 드니 젊은 날이 그립다
여름이면 흰 눈이 그립고
겨울이면 푸른 바다가 그립다
헤어지면 만나고 싶어서 그립다
돈도 그립고
부모님도 그립고,,
내 사랑하는 모두가 자주 그립다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다
어떤 사람은 따뜻했고
어떤 사람은 차가웠다
어떤 사람은 만나기 싫었고
어떤 사람은 헤어지기가 싫었다
어떤 사람은 그리웠고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누군가에게
그리운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나를
그리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가 나를 그리워 해주고
나도 누군가가 그리운
따뜻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그리워야 사람이다
여러분은 누가 그리운가요? 어떤 사람이 그리운가요?
저는 따뜻한 사람, 용서해준 사람이 그립습니다. 그것도 끝없이 용서해주는 그분이 그립습니다. 죄보다 큰 자비를 보게 해 준 그분이 그립습니다.
사순 5주일입니다.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서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놀라운 자비를 베푸시어 구원하심과 보살핌을 주셨음을 기억하고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자비를 마음 깊이 간직하고자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필리 3,10)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의 용서’를 통해, 실제로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십니다.
혹, 우리는 가슴에 돌덩이 한 두 개 정도 품고 살아가지는 않는지요? 차마 던지지는 못하고,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돌덩이 말입니다. ‘화’라는 돌덩이, ‘상처’라는 미움의 돌덩이, ‘원망’과 ‘심판’의 돌덩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돌덩이는 스스로 들게 된 돌덩이든, 타인들이 들려주어서 들게 된 돌덩이든, 타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짓누르고 있고 자신을 무겁게 할 뿐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고발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11,7)
그러자 고발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나이 많은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 돌을 손에 든 채로 갔는지, 땅에 내려놓고 갔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차마 지금은 던지지 못하고 나중에 더 세게 던지려고 그냥 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그들은 여인을 구실로 삼아, 이미 예수님에게도 여인에게도 돌을 던진 이들입니다. 단지 더 이상 돌을 던지지 못했을 뿐입니다. 단지 그 자리를 피하였을 뿐입니다. 죄송하다고 말하지도 않고, 용서해달라고 말하지도 않고, 단지 떠나갔을 뿐입니다. 아마 그들을 또 다시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진정으로 회개한 이들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회개는 단지 심판하지 않고 돌을 던지지 않는 것에 머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돌 맞은 이의 아픔과 상처를 위로하고, 쓰러진 이를 일으켜 세우는 일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신의 죄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용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를 위하여 그에게 선을 베푸는 일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지은 여인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돌 맞은 그의 상처를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또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의 표시입니다. 그것은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도와주고 기도해주고 이끌어주는 일입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우리 주님께서는 죄인은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새롭게 살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주십니다. 도와주시고 이끌어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가슴에 돌덩이를 품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보게 하소서. 차마 던지지도 못하고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돌덩이가 있지는 않는지 보게 하소서. 돌덩이를 품은 바람에 오히려 그 무게에 짓눌린 자신을 보게 하소서. 화라는 돌덩이, 상처와 미움의 돌덩이, 원망과 심판의 돌덩이를 내려놓게 하소서. 돌덩이가 아니라, 그를 위하는 마음을 품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도와주시어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8,7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주님!
제 가슴에 돌덩이를 품고
살아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돌덩이로 오히려 저 자신이
짓눌려 있지 않게 하소서.
돌덩이를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품고
만지작거리게 하소서.
위하는 마음을 품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위로하고 축복하고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체조배를 해야 죄가 녹는다.
영화 ‘밀양’의 주인공은 신앙을 가지고 자신이 죄가 용서받았다고 믿지만, 나중에 평온한 마음이 된 유괴범을 보자 분노가 치밉니다. 그래서 하느님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더 큰 죄들을 짓습니다. 이는 용서 받았다는 것을 마음으로는 믿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왜 용서받았음을 마음으로 믿을 수 있어야 죄가 사해질까요?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는 명제로 유명합니다. 그가 타인은 지옥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 것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을 ‘출구 없음’(No Exit)으로 보았습니다.
설정은 신비한 방으로, 주인공들이 죽음 이후 일종의 사후 세계 역할을 합니다. 이 방은 거울, 창문 또는 탈출 수단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캐릭터가 소개됩니다. ‘가르생’은 언론인이자 평화주의자입니다. 가장 먼저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을 영웅이자 순교자로 소개하지만, 실상은 겁쟁이요 배신자였습니다. 다음 ‘이네스’가 등장합니다. 레즈비언 우체국 직원인 그녀는 교활하고 잔인했습니다. 마지막 ‘에스텔’은 외모에 관심이 많은 상류층 여성으로 가장 늦게 도착합니다. 그녀는 연인과 자신이 낳은 아기를 죽인 사실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전생과 저주받은 이유를 천천히 드러내면서 연극이 전개됩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얽히면서 드라마는 더욱 강렬해지고,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합니다. 가르생은 자신의 용기를 증명하기 위해 방을 떠나고 싶어 하고, 이네스에게 자신이 영웅처럼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레즈비언인 이네스는 에스텔을 유혹하려 합니다. 에스텔은 유일한 남성인 가르생의 관심을 끌기 위해 필사적으로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소용이 없었고 끊임없는 좌절과 괴로움으로 이어집니다. 나중에 문이 열려도 그 문에서 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욕망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극은 등장인물들이 영원히 심리적 지옥의 고통 속에 갇혀 서로나 자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어쨌건 욕망과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을 하려고 이 극본을 썼습니다. 그러나 죄에서 해방되는 출구가 있다면 어떨까요? 모든 죄의 시작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바로 뱀이요 자아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죄짓게 만들고는 ‘죄책감’을 일으킵니다. 행동으로 나오는 모든 죄는 다 자신 안의 죄책감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의 발동입니다. 하와는 죄책감을 아담과 나누려고 선악과를 아담에게 주었습니다. 아담은 그 죄책감을 하와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따라서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죄책감을 없애면 됩니다. 이 죄책감은 그 죄에 상관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분에 의해 사라집니다. 사람에게 학대당한 한 강아지가 좋은 주인을 만나서 결국엔 인간과 다른 동물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유튜브 동영상이 있습니다. 그 강아지에게 세상은, 특별히 인간은 자신을 심판하고 학대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인간 한 명의 사랑만으로는 그 마음을 바꾸는 게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주인’이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주인만 사랑해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일시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밥 한 번 주고, 한 번 쓰다듬어준다고 자신이 용서받는 존재라는 것을 마음으로 믿기 어렵습니다. ‘밀양’에서 주인공이 용서에 실패한 원인은 한 번의 체험으로 자기 아들을 죽인 이를 용서하러 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를 앞에 놓고 돌을 들고 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는 “너희도 죄가 있으면서 단죄한다면, 너희 죗값도 반드시 치러야 한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판단을 받지 않고 그들의 판단을 할 수 있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바닥에 그들의 죄를 쓰시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도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죄가 다 사해졌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도, 간음한 여인도 기다리게 만듭니다. 한 명 한 명 떠나가 결국 당신만 용서해 주면 되게 상황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간음한 여인의 믿음이 확고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돌을 들고 있는 바리사이들은 한 번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와 가장 가까운 모습은 우리가 성체 앞으로 나아오거나 성체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곧 성체조배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체이십니다. 분명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신다는 확신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합니다. 저에게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에게 붙어있어라.”라고 하셨습니다. 성체성사만으로는 저의 죄를 완전히 없애는데 충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체조배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가지게 되는 똑같은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남편이 바람피워서 매우 미워했던 한 신자에게 성체조배를 하라고 했더니, 남편이 저절로 용서되었다고 합니다. 성체조배 안에서 자신이 용서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식을 주시는 분은 부모이자 창조자이십니다. 창조자께서 괜찮다면 괜찮은 것입니다. 우리 죗값을 대신 다 치러서 세상 모든 나에 관한 판단을 무력화 시킨 그분 품 안에서 우리는 결국 죄에서 벗어나게 되고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삶이 힘드신 분들에게 꾸준한 성체조배를 권해드립니다. 성체조배를 통해 성체의 힘이 나에게서 발휘됩니다. 바로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이고, 이 믿음이 죄를 없앱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거대한 배가 많은 승객을 태우고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근처를 항해하던 다른 선박으로부터 지금 당신 배가 유빙 지대로 들어서고 있다는 다급한 전갈을 받습니다. 그러나 선박은 이 전갈을 그냥 무시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배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선박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정도 유빙 지대는 손쉽게 통과할 수 있다고 자신한 것입니다. 1시간 남짓 뒤, 또 다른 선박이 항로에 빙산이 떠다닌다고 전신(모스 부호)으로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시끄러워. 꺼져.”
이 배는 영화를 통해서도 잘 알려진, 1912년 4월 14일에 침몰한 ‘타이타닉호’입니다. 그 당시 안개가 너무 심해서 바로 앞에 있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바다가 파도 하나 없이 너무나 잔잔했기 때문입니다. 또 배 안에 망원경이 없어서 모든 것을 육안으로만 살펴야 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배, 가장 튼튼한 배, 가장 화려하고 멋진 배…. 등의 수식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만심이 엄청난 사고를 만들었습니다. 2,224명 탑승자 중에서 1,514명이 사망하게 됩니다. 자만심이 불러일으킨 대참사였습니다.
우리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쉽게 판단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자연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함을 보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겸손함과 더불어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예수님께 묻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돌로 쳐 죽이라고 했지만, 당시 로마제국의 통치하에서 누구든 직접 사형에 처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자를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하면 로마 행정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반대로 풀어 주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하십니다.
이번이야말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자만심이 한 여인을 죽음의 위험으로 몰아세우는 죄를 범하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앞에서 그들의 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어, 나이 많은 자들부터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나게 됩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주님께서도 단죄하지 않는데, 우리는 자만심을 가지고 나의 이웃을 너무나 쉽게 단죄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의 명언
동기 부여는 성공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게 하는 연료와 같다.
- 브라이언 트레이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흙으로 빚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다잡는 용서의 사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서로의 잘못만을 들추어내고 서로의 약함만을 단죄하는 단죄의 돌들로 가득합니다.
용서의 마음과 함께할 수 없는 단죄의 마음입니다. 용서하기 위해 부서지며 사는 것이 우리들 삶입니다.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모르기에 하느님을 우리가 자주 배신하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배신은 빠르고 용서는 더딥니다. 길이 아닌 길을 걸어가려 합니다. 우리의 단죄가 집어삼킨 한 사람을 예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땅바닥에 바로 너라고 쓰시며 단죄의 돌을 던져야 할 우리가 아니라 용서를 청해야 할 우리임을 보여주십니다. 날마다 용서가 필요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용서에서 자라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단죄를 이겨내는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저 수 많은 단죄의 돌들은 우리자신에게서 나온 부끄러운 돌들입니다.
하느님의 귀한 자녀들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죄짓지 않게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참된 어른들이 많아지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단죄가 아닌 용서로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용서로 다시 만나는 용서의 기쁜 주일 되십시오.
요한복음 8장 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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