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를 짓밟는 사람들이 온종일 몰아치며 억누르나이다.
하느님, 헤아릴 수 없는 은총으로 온갖 복을 내려 주시니 저희가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시작하여 하늘 나라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하소서.
살아있는 성경 말씀
온라인에서 함께해요!
2025년 4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디지털 공간을 밝히는 살아있는 말씀, 온라인 속에서 연결되는 믿음의 길로 초대해요!
2025년 4월 7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다니 13,1-9.15-17.19-30.33-62)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 8,12-20)
나는 세상의 빛이다.
다니 13,1-9.15-17.19-30.33-62
오늘 제1독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1
바빌론에 요야킴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2
그는 수산나라고 하는 힐키야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수산나는 매우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이었다.
3
수산나의 부모는 의로운 이들로서 그 딸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교육시켰다.
4
한편 요야킴은 아주 부유한 사람으로서 넓은 정원이 그의 집에 맞붙어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큰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늘 그를 찾아오곤 하였다.
5
그런데 그해에 어떤 두 원로가 백성 가운데에서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바로 그들을 두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바빌론에서, 백성의 지도자로 여겨지는 재판관인 원로들에게서 죄악이 나왔다.”
6
그들이 줄곧 요야킴의 집에 있었으므로, 소송거리가 있는 이들은 모두 그리로 그들을 찾아갔다.
7
한낮에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수산나는 남편의 정원에 들어가 거닐곤 하였다.
8
그렇게 그곳에 들어가 거니는 수산나를 매일 눈여겨본 그 두 원로는 수산나에게 음욕을 품게 되었다.
9
그들은 양심을 억누르고 하늘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돌린 채, 의로운 판결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15
그들이 알맞은 날을 엿보고 있을 때, 수산나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녀 둘만 데리고 정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날이 무더웠으므로 그곳에서 목욕을 하려고 하였다.
16
거기에는 숨어서 수산나를 엿보는 그 두 원로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17
수산나는 하녀들에게, “내가 목욕을 하게 올리브 기름과 물분을 가져오고 정원 문들을 닫아걸어라.” 하고 말하였다.
19
하녀들이 나가자마자 두 원로는 일어나서 수산나에게 달려가
20
말하였다. “자, 정원 문들은 잠겼고 우리를 보는 이는 아무도 없소. 우리는 당신을 간절히 원하오. 그러니 우리 뜻을 받아들여 우리와 함께 잡시다.
21
그러지 않으면, 어떤 젊은이가 당신과 함께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당신이 하녀들을 내보냈다고 증언하겠소.”
22
수산나는 탄식하며 말하였다. “나는 꼼짝 못할 곤경에 빠졌소. 그렇게 하면 그것은 나에게 죽음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여도 당신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을 것이오.
23
주님 앞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그렇게 하지 않고 당신들의 손아귀에 걸려드는 편이 더 낫소.”
24
그러고 나서 수산나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 두 원로도 수산나를 향하여 소리를 지르더니,
25
그 가운데 하나가 달려가서 정원 문들을 열어젖혔다.
26
집에 있던 사람들이 정원에서 나는 고함 소리를 듣고, 옆문으로 뛰어들어 가 수산나에게 일어난 일을 보았다.
27
원로들이 저희 쪽의 이야기를 하자 하인들은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수산나를 두고 누가 그와 같은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28
다음 날, 수산나의 남편 요야킴의 집으로 백성이 모여들 때, 그 두 원로는 수산나를 죽이겠다는 악한 생각을 가득 품고서 그리로 갔다.
29
그들이 백성 앞에서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어 요야킴의 아내, 힐키야의 딸 수산나를 데려오게 하시오.” 그러자 백성이 사람을 보냈다.
30
수산나는 부모와 자녀들과 모든 친척과 함께 나왔다.
33
그러자 수산나 곁에 있던 이들과 그를 보는 이들이 모두 울었다.
34
그 두 원로는 일어나 백성 한가운데에서 수산나의 머리에 자기들의 손을 얹었다.
35
수산나는 눈물이 가득한 채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마음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6 그 두 원로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단둘이서 정원을 거닐고 있을 때, 이 여자가 여종 둘을 데리고 정원으로 들어가더니, 정원 문들을 닫아걸고서는 여종들을 내보냈소.
37
그때에 숨어 있던 젊은이 하나가 이 여자에게 가더니 함께 누웠소.
38
정원 구석에 있던 우리는 그 죄악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서 그들에게 달려갔소.
39
그리고 둘이서 정을 통하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그자가 우리보다 힘이 세어 붙잡을 수는 없었소. 그래서 그자는 문을 열고 달아나 버렸소.
40
그 대신 이 여자를 붙들고 그 젊은이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41
이 여자는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려고 하지 않았소. 이것이 우리의 증언이오.” 그들이 백성의 원로이며 재판관이었기 때문에, 회중은 그들을 믿고 수산나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42
그때에 수산나가 크게 소리 지르며 말하였다. “아, 영원하신 하느님! 당신께서는 감추어진 것을 아시고 무슨 일이든 일어나기 전에 미리 다 아십니다.
43
또한 당신께서는 이자들이 저에 관하여 거짓된 증언을 하였음도 알고 계십니다. 이자들이 저를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 낸 것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44
주님께서 수산나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45
그리하여 사람들이 수산나를 처형하려고 끌고 갈 때,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라고 하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셨다.
46
그러자 다니엘이 “나는 이 여인의 죽음에 책임이 없습니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47
온 백성이 그에게 돌아서서, “그대가 한 말은 무슨 소리요?” 하고 물었다.
48
다니엘은 그들 한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여러분은 어찌 그토록 어리석습니까? 신문을 해 보지도 않고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어찌 이스라엘의 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49
법정으로 돌아가십시오. 이자들은 수산나에 관하여 거짓 증언을 하였습니다.”
50
온 백성은 서둘러 돌아갔다. 그러자 다른 원로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자,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원로 지위를 주셨으니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설명해 보게.”
51
다니엘이 “저들을 서로 멀리 떼어 놓으십시오. 제가 신문을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2
사람들이 그들을 따로 떼어 놓자, 다니엘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불러 말하였다. “악한 세월 속에 나이만 먹은 당신, 이제 지난날에 저지른 당신의 죄들이 드러났소.
53
주님께서 ‘죄 없는 이와 의로운 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당신은 죄 없는 이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죄 있는 자들을 놓아주어 불의한 재판을 하였소.
54
자, 당신이 참으로 이 여인을 보았다면, 그 둘이 어느 나무 아래에서 관계하는 것을 보았는지 말해 보시오.” 그자가 “유향나무 아래요.” 하고 대답하였다.
55
그러자 다니엘이 말하였다. “진정 당신은 자기 머리를 내놓고 거짓말을 하였소. 하느님의 천사가 이미 하느님에게서 판결을 받아 왔소. 그리고 이제 당신을 둘로 베어 버릴 것이오.”
56
다니엘은 그 사람을 물러가게 하고 나서 다른 사람을 데려오라고 분부하였다. 그리고 그자에게 말하였다. “유다가 아니라 가나안의 후손인 당신, 아름다움이 당신을 호리고 음욕이 당신 마음을 비뚤어지게 하였소.
57
당신들은 이스라엘의 딸들을 그런 식으로 다루어 왔소. 그 여자들은 겁에 질려 당신들과 관계한 것이오. 그러나 이 유다의 딸은 당신들의 죄악을 허용하지 않았소.
58
자 그러면, 관계하는 그들을 어느 나무 아래에서 붙잡았는지 나에게 말해 보시오.” 그자가 “떡갈나무 아래요.” 하고 대답하였다.
59
그러자 다니엘이 말하였다. “진정 당신도 자기 머리를 내놓고 거짓말을 하였소. 하느님의 천사가 이미 당신을 둘로 잘라 버리려고 칼을 든 채 기다리고 있소. 그렇게 해서 당신들을 파멸시키려는 것이오.”
60
그러자 온 회중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당신께 희망을 두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1
다니엘이 그 두 원로에게, 자기들이 거짓 증언을 하였다는 사실을 저희 입으로 입증하게 하였으므로, 온 회중은 그들에게 들고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이 이웃을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 낸 그 방식대로 그들을 처리하였다.
62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형에 처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에 무죄한 이가 피를 흘리지 않게 되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
요한 8,12-20
오늘 복음
나는 세상의 빛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12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13
바리사이들이 “당신이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으니, 당신의 증언은 유효하지 않소.” 하고 말하자,
1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여도 나의 증언은 유효하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또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15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16
그리고 내가 심판을 하여도 내 심판은 유효하다. 나 혼자가 아니라,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함께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17
너희의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은 유효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8
바로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에 관하여 증언하신다.”
19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 있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20
이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곁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을 잡지 않았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4월 7일
김민수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16:25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고 또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곧 당신께서이스라엘 땅에서 유다인들만을 비추는 작은 빛이 아니라 온 세상을 비추는 생명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때에 바라는 만큼만 비추는 ‘그들만’의 조명을 찾고 있기에 예수님의 증언이 유효하지 않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증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의 기준이 아닌 사람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당신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아시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함께”(8,14.16) 계시므로 당신의 증언이 유효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께 열려 있으시기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내십니다. 사람이 만든 규정에만 몰두하여 진리를 알지 못하는 바리사이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알고 계시고 그 하느님을 우리가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고 또 그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세상의 빛을 바라보고 따르면 우리는 어둠이 자리하지 않는 찬란한 미래를 마주하게 됩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 하시며 우리 또한 그 광채로 빛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서는 어디나 계시기에, 우리가 유혹에 빠져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려 할지라도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를 두고 가시지 않습니다.
‘나만’의 이기심으로 닫힌 문을 열고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그 빛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생명의 빛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죄와 은총을 같이 사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오늘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에 두 가지 의미 곧 사랑과 정의 두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사랑이지만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정의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희망을 주는 사랑이지만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죄를 들추는 정의입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복음을 보면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은 우선 정의의 차원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왜냐면 오늘 이 말씀은 주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빛은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비추는 기능과 들추는 기능 두 가지입니다. 세상은 사람들의 죄와 악으로 늘 어두운데 죄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자기가 그 어두움의 근원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이럴 때 빛은 모든 것을 밝히고 죄악을 들춰냄으로써 세상의 죄악에 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주지만 죄를 저지르는 악한 사람들에게는 쇠망치가 되겠지요.
그러니까 주님을 세상의 빛으로 모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바리사이들은 세상의 빛이라고 믿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히는 존재라고 주님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믿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의 빛을 빛이 아니라고 믿으면 그에게는 빛이 사라지고 오늘 주님 말씀처럼 그는 어둠 속을 걷고 생명의 빛을 잃겠지요? 그런데 주님을 믿는 사람 가운데서도 어둠 속을 걷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지만, 아직 죄 중에 있기에 그 죄가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난 뒤 숨었듯이, 어둠 속으로 숨는 겁니다.
우리도 처음엔 주님에게서 빛을 발견하고 빛이신 주님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아직도 자기에게 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빛을 보지 않고 빛 때문에 드러난 자기 죄를 보게 되고, 죄의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모든 빛을 피해 자기 안으로 숨어들게 됩니다.
그래서 자폐증 환자처럼 하느님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도 피해 숨게 됩니다. 혼자 있는 것이 좋고 어둠 속에 있는 것이 숫제 마음 편한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깨달아야 하고 떨치고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늘 죄와 은총을 같이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러므로 늘 죄에 대해 겸손하며 빛의 은총을 청하며 주님을 따라나서는 겁니다.
죄에 대해서는 겸손하며 하느님 은총에 대해서는 늘 감사하며 주님을 따라나서는 오늘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빛”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성경>에서 “빛”은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하느님의 현현과 계시의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떨기나무 가운데 태우지 않는 불꽃으로 현현하셨습니다. 그리고 “빛”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상징하였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심을 빛으로 드러내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선언은 곧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하느님이다.’라는 선언이 됩니다.
동시에, <구약> 전승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빛”은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이사 46,6; 60,19-22). 따라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이 선언은 결국, ‘나는 메시아다.’라는 선언이 됩니다.
<둘째>로, “빛”은 하느님께서 백성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쫓아오는 파라오의 군대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할 때도, 어둔 밤 광야의 온갖 짐승들로부터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해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빛”이라 하심은, 곧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셋째>로, “빛”은 하느님의 백성을 인도하심을 나타냅니다. 이정표가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방황할 때, 하느님께서는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빛”이라 하심은, 곧 당신께서는 하느님 백성을 어둠으로부터 이끌어 내는 인도자라는 선언이 됩니다. 곧 죄와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선언을 통해, 당신께서는 하느님이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보호하실 분이시며, 더 나아가 백성들을 인도하실 분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 하심은 당신은 세상에 속해 있는 분이 아니라, ‘세상을 비추는 빛’이심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세계에 속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세상’을 비추어, 구원하실 구세주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빛”은 곧 ‘생명’이 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당신을 선언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빛’을 비추는 이가 되어, 그 역시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곧 이제는 ‘위에서 비추는 빛’이 ‘안에서 비추는 빛’이 되고, ‘안에서 비추는 빛’은 ‘밖을 비추는 빛’이 될 것입니다.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다.
주님!
당신께서는 늘 세상을 비추시니
저희를 어둠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진리로 이끄소서.
무지로부터 비추시고
빛을 입히소서.
하여, 당신 빛으로
생명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빛이 되려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하는 게 핵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갈 길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는 장 폴 사르트르의 ‘출구 없는 방’이란 극본을 보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는 명제로 유명합니다. 그가 타인은 지옥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 것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을 ‘출구 없음’(No Exit)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출구 없음’의 연극 대본을 봅시다.
설정은 신비한 방으로, 주인공들이 죽음 이후 일종의 사후 세계 역할을 합니다. 이 방은 거울, 창문 또는 탈출 수단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캐릭터가 소개됩니다.
‘가르생’은 언론인이자 평화주의자입니다. 가장 먼저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을 영웅이자 순교자로 소개하지만, 실상은 겁쟁이요 배신자였습니다. 다음 ‘이네스’가 등장합니다. 레즈비언 우체국 직원인 그녀는 교활하고 잔인했습니다. 마지막 ‘에스텔’은 외모에 관심이 많은 상류층 여성으로 가장 늦게 도착합니다. 그녀는 연인과 자신이 낳은 아기를 죽인 사실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전생과 저주받은 이유를 천천히 드러내면서 연극이 전개됩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얽히면서 드라마는 더욱 강렬해지고,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합니다. 가르생은 자신의 용기를 증명하기 위해 방을 떠나고 싶어 하고, 이네스에게 자신이 영웅처럼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레즈비언인 이네스는 에스텔을 유혹하려 합니다.
에스텔은 유일한 남성인 가르생의 관심을 끌기 위해 필사적으로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소용이 없었고 끊임없는 좌절과 괴로움으로 이어집니다. 극은 등장인물들이 영원히 심리적 고통 속에 갇혀 서로나 자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들의 고통은 출구가 없습니다. 빛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욕망을 제어할 줄 알아야만 참 평화를 가질 수 있음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욕망은 ‘생존’을 위한 욕구인데, 그것을 제어함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블랙스완’에서도 엄마가 자기 욕망을 버리지 못해서 빛이 되지 못했고 딸도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사랑이란 누군가에게 빛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빛이 되는 법을 알려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욕망을 죽여야 함을 보여준 본보기가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빛을 보았고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여도 나의 증언은 유효하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또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심판을 하여도 내 심판은 유효하다. 나 혼자가 아니라,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함께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세상의 빛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파견받으셨듯이, 우리는 그리스도께 파견받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와서 다시 그분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직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이들에게는 우리가 빛입니다.
그러나 빛이 꺼질 때가 있습니다. 마치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또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살면 그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일까요? 이 세상에서 무언가 필요한 존재처럼 살 때입니다. 빛은 빛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다른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태양이 지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그것은 창조자에게서 나왔고 빛나는 일을 끝낸다면 다시 창조자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은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사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사람의 특징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아이들은 세상에서 무엇을 요구할까요? 요구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다 해주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들에 대한 욕구가 있는 사람들은 아직 빛이 되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가리옷 유다가 그렇습니다. 그는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바라는 게 너무 많았습니다. 진정한 해방은 욕구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렇게 빛이 된 존재들은 너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설리번 선생’일 것입니다. 앤 설리번은 1866년 4월 14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뉴 윌밍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앤지 앤 설리번(Anne Sullivan)이었고, 그녀의 가족은 매우 가난하고 불행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앤은 어린 시절부터 불행한 가정에서 자라며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고, 어머니는 앤이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시절 앤은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폭력적인 성격 속에서 살아가며 정서적 상처를 받았습니다. 또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결핵을 앓으며, 나중에는 트라코마라는 안구 질환에 걸려 시력을 잃어갔습니다.
앤 설리번의 불행은 그녀의 어린 시절에 그쳤다면 더 견디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는 정신병동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앤은 15세 때, 자신의 정신적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 부모의 동의로 정신병원에 갇히게 됩니다. 이 시기 앤은 정신적인 고통과 불안을 극복하려고 애썼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졌습니다.
당시의 정신병동 환경은 매우 열악했으며, 치료보다는 억제와 처벌이 주를 이루었고, 앤은 치료의 희망을 잃고 결국 삶에 대한 절망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앤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선, 주변에서의 인정과 치유보다 자신의 의지와 인내가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를 지나면서 그녀는 스스로를 일으키며 치료를 시작할 결단을 내립니다. 이때 그녀를 도운 인물 중 중요한 인물이 바로 로라라는 나이 든 간호사였습니다.
로라는 앤이 정신병동에 있을 때 만난 간호사로, 앤에게 정신적 지지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로라는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간호사였지만 그 당시까지는 실직적인 치료보다는 정서적인 지원이 부족한 환경 속에서 일하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앤의 내면적인 고통을 깊이 이해했고, 앤에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로라는 앤에게 "너는 결국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며, 그녀의 자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독려했습니다. 이 인연은 앤에게 큰 힘이 되었고, 그녀는 로라의 말대로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한 길을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로라의 영향을 받으며 앤은 퍼킨스 학교(Perkins School for the Blind)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교육을 받으며 점차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나갔습니다. 앤은 장애인 교육에 대한 열정을 품고, 스스로 배운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1887년, 앤 설리번은 헬렌 켈러와 만나게 됩니다. 헬렌 켈러는 1880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 열병에 걸려 청각과 시각을 모두 잃었고, 그로 인해 언어와 의사소통에 전혀 능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헬렌의 부모는 절망에 빠져 있었고, 그들은 헬렌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해 줄 사람을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헬렌의 부모는 앤 설리번을 만나게 되었고, 앤은 헬렌의 가정에서 가르침을 맡게 되었습니다.
앤 설리번은 헬렌과의 만남을 통해 그녀의 내면에 숨겨진 잠재력을 발견하고, 끊임없는 사랑과 인내로 헬렌에게 언어와 소통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앤은 헬렌에게 수화와 점자를 가르쳤고, 특히 손끝으로 세상을 느끼는 방법을 제시하며 그녀의 삶을 바꿔나갔습니다.
헬렌이 '물'이라는 단어를 이해한 순간, 그녀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고, 이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한 순간이었습니다. 앤의 교육 덕분에 헬렌은 점차 언어를 배우고, 그와 함께 수학과 작문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헬렌은 라드클리프 대학(Radcliffe College)을 졸업하며, 그 후에는 작가이자 강연자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인권 운동가로도 유명해졌습니다.
앤 설리번은 헬렌에게 단순히 지식을 전달한 것을 넘어서, 그녀에게 사랑과 희생의 중요성을 가르쳤습니다. 헬렌은 앤 덕분에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고, 이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앤 설리번은 자신의 힘든 과거를 극복하며 헬렌 켈러에게 사랑과 교육을 베푼 결과, 헬렌은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헬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보거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봉사로 가득 찬 삶이다”라고 말하며, 두 사람의 이야기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로라는 빛이었습니다. 그녀는 무언가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빛이었습니다. 로라는 노년의 간호사로서, 앤의 정신적 고통과 어려움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녀에게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앤에게 과자를 가져다주고, 책을 읽어주며, 기도해주는 등 정서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바라지 않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빛이고, 빛을 만난 사람입니다.
재물이나 욕정, 명예 등을 원한다면 아직은 빛을 만난 것도 아니고 빛이 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아직은 누구에게서 와서 누구에게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빛은 자기 욕망을 태워서 어둠에 있는 이들이 볼 수 있도록 자신을 태우는 촛불과 같은 존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세상의 빛이다.
젊은 신부에게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강론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강론에 신자들은 졸거나 딴 짓 하기 일쑤였습니다. 무관심한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도 관심을 끌 수 있는 강론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교님을 찾아가 이 고민을 말씀드렸습니다. 주교님께서 이렇게 하면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어젯밤 좋은 여인의 따뜻한 품에 안겼어요.’라고 말하면, 신자들에게 큰 관심을 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얼마나 나를 잘 받아줬는지 말씀하세요. 마지막에 ‘그분은 바로 나의 어머니입니다.’라고 말하면, 신자들은 신부님 강론에 큰 감명을 받을 것입니다.”
다음 주일, 젊은 신부는 긴장하면서 강론대에 섰습니다. 그런데 강론대에 서는 순간, 준비된 강론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면서 생각나는 대로 말했습니다.
“어젯밤, 나는…. 나는 뜨거운 여인의 따뜻한 포옹을 받았어요.”
이 말만 하고, 그 뒤의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여인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여인을 추천해 주신 분은 우리 주교님이십니다.”
강론이 잘 되었을까요? 주교님은 아주 이상한 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주님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주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특히 사랑보다 욕심과 이기심이 앞서면 주님을 믿는 우리의 모습에서 주님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이상한 주님이 되고 맙니다.
실제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당신 신원에 관해 직접 말씀해 주셨지만, 바리사이들은 그분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의심합니다. 그 의심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했고,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자기들은 올바르고 전혀 거짓이 없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은 거짓말쟁이로 몰면서 이상한 분으로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선포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세상의 빛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으로 사랑에 반대되는 삶이 아닌, 가득 찬 사랑으로 세상을 환하게 비출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하면서 기쁨과 행복의 삶을 지금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주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명언
지혜는 바깥이 아닌 우리의 내면에서 생긴다. 단순히 정보를 얻는 것과 앎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 요한 크라우네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눈부신 햇빛에 투영된 연분홍 진달래꽃잎에 흠뻑 빠지는 최고의 봄입니다. 사람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 빛을 얻는 생명의 참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이 되시어 세상을 밝히십니다.
세상을 밝히는 것은 오히려 낮아지고 작아지시는 예수님의 삶입니다. 세상의 빛은 자신의 삶으로 참된 삶의 의미를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의 길을 밝히고 아픔 속에 있는 이들의 아픔을 따뜻이 감싸주는 사랑입니다.
세상의 빛은 이와 같이 마음을 나누고 정신을 나누는 나눔의 빛입니다. 빛은 어디에 있어도 빛으로 존재합니다. 모든 가치는 지식에 있지 않고 우리의 실천에 있습니다.
빛의 실천이 진정한 나눔이며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이 되시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들을 비추십니다. 더더욱 진실한 작은 마음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작은 돌멩이가 모여 돌탑을 이루고 작은 들꽃들이 모여 천상의 화단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실천으로 생명의 빛을 시작하십니다. 시작이 빛이라면 마침도 완성도 빛입니다.
빛의 날이 밝았습니다. 빛을 통하여 빛과 함께 빛 안에서 빛을 즐기는 기쁜 날 되십시오. 세상의 빛은 세상 속에서 이루는 올바른 실천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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