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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4/08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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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주님, 저희가 한결같이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하시며 이 시대에 주님을 섬기는 백성이 많아지고 그 믿음이 더욱 굳건해지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4월 8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살아있는 성경 말씀
온라인에서 함께해요!

2025년 4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5주간 화요일

 

 

 

디지털 공간을 밝히는 살아있는 말씀, 온라인 속에서 연결되는 믿음의 길로 초대해요!

2025년 4월 8일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민수 21,4-9)
    물린 자는 누구든지 구리 뱀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 오늘 복음
    (요한 8,21-30)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민수 21,4-9
오늘 제1독서

물린 자는 누구든지 구리 뱀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 무렵 이스라엘은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 산을 떠나 갈대 바다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

 

 

요한 8,21-30
오늘 복음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21 
이르셨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22 
그러자 유다인들이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니, 자살하겠다는 말인가?” 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24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25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26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27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28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29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4월 8일
김성 세례자 요한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7:5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마음 안에 가득한 세상 것에 관한 생각 비워 내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바리사이들은 “당신이 누구요?”(요한 8,25)라고 할 만큼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일, 그분 마음에 드는 일들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죄 속에 머무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으로 갈 수 없는 것은 죄의 사슬에 매여 있고,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루카 20,38)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위로부터 오신 예수님과 달리 아래의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12,34)라는 말씀처럼 땅에 보물을 모아 둔 바리사이들은, 마음속에 위를 향한 희망 대신 아래의 세상에 대한 세속적이고 육적인 욕망을 가득 채운 이들입니다.

“내가 나”(요한 8,24)인 예수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탈출 3,14)이신 아버지께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것처럼 죄와 죽음에서 온 인류를 해방시키실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들어 올린 뒤에야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하나이시며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깨닫는다고 하여도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죄의 길에서 벗어나는 해방은, 앎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님이심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 가득한 세상 것에 관한 생각을 비워 내고 하느님 나라를 담으려는 발걸음을 내디딜 때 우리는 신앙의 길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께서 가시는 곳으로 따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십자고상이 내게는 어떤 것?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잘 아시다시피 모세가 기둥 위에 매달아 놓고 쳐다보면 살게 될 것이라고 한 구리 뱀은 십자가 위에 달리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의 주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매달아 놓고 쳐다보았듯이 우리도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의 고상을 우러러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종교 가운데 이 십자고상(十字苦像)과 같은 상을 우러러보는 종교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불교만 봐도 부처님상은 십자고상처럼 처참하지 않고, 인자하고 관상적이고 평안하고 심지어 미소를 띠고 있어서 그것을 보는 사람을 평안하게 하고 자꾸만 보고 싶게 합니다.

그리고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개신교도 십자가만 달아놓지 우리 천주교처럼 십자고상을 달아놓지 않고 우러러보는 것은 더더욱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때 이 십자고상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왜?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보통 때는 십자고상은 보기만 해도 불편하고, 특히 희희낙락하고 싶을 때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때 보고 싶고 보게 됩니까? 어떤 때 십자고상을 우러러보게 됩니까? 내게 큰 고통이 있을 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내게 큰 고통이 있을 때 십자고상을 보노라면 우리와 같이 인간이 되시고 고통을 받으신 주님이 위로와 위안이 되고 더 나아가 구원이 됩니다.

사실 우리가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주님께서 희희낙락한 모습을 하고 있다면 아마 우리는 그런 주님을 보고 화가 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고상은 우리에게 평안이 아니라 위로와 위안이고, 위로와 위안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원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고상을 우러러보지 않을 것이고, 구원이 못 되면 위로와 위안이라도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우러러보기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러러보는 사람, 
쳐다보기라도 하는 사람,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 
이 중에 나는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당신이 누구요?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신원을 묻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받기 전에, 자신의 신원을 이미 밝히셨습니다.

“나는 위에서 왔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

그렇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길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곧 그가 누구에게서 왔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가 그의 신원을 알려줍니다.

나는 올리베따노 수도회에 속해 있으니, 분명 올리베따노회 수도승입니다. 또 하느님께로부터 뽑혀 왔으니, 분명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셨고 위에 계신 분께 속하시니, 분명 위에서 오신 하느님이시고, 위에 계신 분의 아들이신 성자이십니다.

그런데, 나는 위에 속해 있는가? 그래서 위를 바라보며, 위에 계신 분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 위에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속한 이입니다.

그런데 나는 진정, 그분께 속해 있는가?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소유로 살고 있는가? 그래서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진정 그분의 소유, 그분께 속하게 되면, 무슨 일이 발생하게 될까?

그렇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처럼 죽는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또는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는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교황 베네딕도 16세께서는 톨스토이가 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예를 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사나운 임금님이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사제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임금님에게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양치기가 그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는 먼저, 임금님은 눈이 좋지 않아서 하느님을 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하느님을 볼 수 없다면, 하느님이 무엇을 하는 지만이라도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양치기는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리가 서로 옷을 바꾸어 입어야만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임금님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양치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곧 하느님은 ‘거룩한 바꿈’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바꿈’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교부들은 이를 ‘거룩한 교환’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분께 속한다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바꿈’을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받아, 하느님과 같아지도록 우리의 것을 받으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옷을 입히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옷을 입히십니다. 곧 당신께서는 인간의 옷을 입으시고, 인간을 하느님의 옷으로 입히십니다. 당신께 속한 당신의 소유로 만드시고, 우리를 당신께서 오신 ‘위’로 데리고 가십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8,23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주님!
제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게 하소서.

제 머리 위에 
항상 당신을 모시고 
당신께 속하게 하소서.

당신 품이 
제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의 손길로 
저를 바꾸소서. 

당신 빛으로 
제 안에 새겨진 
당신 형상을 드러내소서.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전부이오니 
당신께만 속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가 인정받지 못함을 오히려 즐겨야 하는 이유

우리가 사는 공동체는 각자의 사랑의 수준이 있습니다. 만약 그 수준에 미달하거나 그 수준을 초과하면 추방당하거나 박해당합니다. 만약 가정에서 하느님과 같은 사랑을 실천해보십시오. 남편이 월급을 오다가 거지에게 다 주고 왔다면 가정생활이 유지될 수 있을까요? 혹은 자신은 벌지 않고 아이들을 앵벌이를 시킨다면 그런 가정을 가정이라 할 수 있을까요?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에서 가정처럼 요구하거나 내어준다면 회사에 맞지 않습니다. 가정에는 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주 40시간을 넘기면 안 됩니다. 가정이라 생각해서 사장이 돈도 안 주며 노동시간을 강요한다면 쫓겨나고 말 것입니다. 모기떼가 있는 곳에서 혼자 피를 내어주겠다고 하면 바로 피가 빨려 죽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막가파와 같은 곳에서 혼자 착한 척하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각 공동체가 그 안에 속하기 위한 사랑 수준의 범위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면 내가 박해당해도 괜찮고 오히려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는 방법이 박해당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동화에서 공주의 병을 고친 삼 형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의원도 고치지 못하는 병을 고칠 수 있는 자를 공주와 혼인하게 하겠다는 방이 붙었습니다. 세 형제는 아버지가 가보로 물려준 보물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무리 먼 곳도 볼 수 있는 망원경으로 그 방을 보았습니다. 둘째가 나는 양탄자로 형제들을 궁궐까지 오게 하였습니다. 막내는 어떤 병이든 고치는 명약인 사과를 공주에게 주었습니다.

누가 공주와 결혼하게 되었을까요? 각자가 공주와 결혼할 자격이 있다고 말했지만, 자기 것을 다 내어놓은 막내가 공주와 결혼하여 신분 상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여전히 자기 보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물이 없다면 형제간에서는 가보로 내려오는 보물을 없애버렸다고 막내가 욕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에 막내가 신분 상승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십자가를 이해해야 하고 이 세상에서 박해받을 때도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맞는 사랑의 수준이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들어 올려져야 하셨습니다. 그런데 들어 올린 이들이 그분을 들어 올린 후에야 알아볼 것이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막내는 가문의 뜻보다 더 높은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가문에서는 버려질 수 있어도 새로운 공동체에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높은 수준의 사랑을 따르는 이들은 ‘부활’이라는 보상받습니다.

회사에서 회식을 하도 자주 해서 집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이 걱정되어 박해받으면서도 빨리 들어가려 한다고 해 봅시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행복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아내와 아이들로부터 사랑받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 직원을 박해한 사람들은 가정이라는 세상에 속하는 게 더 행복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박해받고 인정받지 못한다고 분통을 터뜨리지 맙시다. 이 세상에서 인정받는다는 말은 천국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박해를 약속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박해받으면서도 벌써 부활을 보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비로소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같은 수준이 아님을. 회개하면 좋은 것이고 아니면 그만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정받으며 천국의 행복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더 큰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는 들어 올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들어 올려진 십자가의 모습이 그들에겐 또한 심판이 될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탁발 수도회를 세우겠다고 교황을 찾아왔을 때 교황은 그를 내쳤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수도자들을 보면 자신들에게 눈엣가시처럼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박해받는 가운데서도 행복했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고 주님은 교황의 꿈에 무너지는 교황이 머무는 성당을 어깨로 받치고 있는 거지를 보여주십니다.

교황은 그 거지 수도자들이 자신들의 수준이 아님을 알고는 수도회를 허락하고, 지금 어떤 수도회보다도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위해 교회에서까지 박해받는다면 기뻐해야 합니다. 교회를 쇄신할 인물로 선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슬픔과 기쁨, 나쁜 것과 좋은 것, 미움과 사랑, 불행과 행복. 이런 비교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아마 후자인 기쁨, 좋은 것, 사랑, 행복 등의 가치를 선택할 것입니다. 이것에 눈이 가고 몸이 따라갑니다. 이는 많은 이가 SNS에 빠지는 이유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SNS에는 슬픔, 나쁜 것, 미움, 불행 등의 가치를 찾기가 힘듭니다. 좋은 곳, 맛있는 음식, 멋진 것만이 담겨 있는 행복의 순간만이 공유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여기에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슬픔의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빠 보이는 삶, 피하고 싶은 삶도 분명 자기 삶입니다. 이를 직시하고 있는 사람만이 더 나은 삶을 위한 희망을 간직합니다. 그러나 이 삶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비교하고 좌절하며 결국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좋은 삶만 나의 삶이 아닙니다. 나쁜 삶일 때도 희망을 잃지 않고 힘차게 살아갈 때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희망이 있음을 발견하면서 커다란 기쁨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이르십니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8,21)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죽음을 나쁜 것으로 생각하고 피해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즉, 나쁜 삶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삶을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이 십자가가 우리 구원의 희망이며, 부활이라는 영광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한 간절함이 없는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며, 하느님의 관점이 아닌 세상의 관점으로만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스스로 하늘에서 오신 분이시라는 것을 드러내셨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당신이 누구요?”(요한 8,25)라고 물을 뿐이었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나 자신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가치를 거부하지 않고, 그 안에서 더 큰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멋진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미래를 여는 열쇠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찾아 널리 알리는 것이다

- 피트 시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삶의 전체가 되십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삶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랑 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혼자만의 힘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함께해 주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이렇듯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우리의 관계 속에서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폐쇄된 집단의식을 열린 지평의 공동체로 바꾸어 주십니다.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좋으신 하느님이 계십니다. 함께하는 관계가 가장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관계는 또한 마음이 통하는 관계입니다. 끊임없는 한마음의 교감과 전율이 있을 뿐입니다. 뜨겁게 살아있는 이 관계 속에서 오늘을 만납니다. 함께하시는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요한복음 12장 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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