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은 성난 민족들에게서 저를 구하시고, 제게 맞서 일어선 자들에게서 들어 높이셨으며, 포악한 자들에게서 구출하셨나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참회의 생활로 거룩해진 자녀들의 마음을 비추시고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섬기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4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4월 9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다니 3,14-20.91-92.95)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 오늘 복음
(요한 8,31-42)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다니 3,14-20.91-92.95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그 무렵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14
물었다.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 너희가 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또 내가 세운 금 상에 절하지도 않는다니, 그것이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비파,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이 일을 두고 저희는 임금님께 응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17
임금님,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내실 수 있다면,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18
임금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 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19
그러자 네부카드네자르는 노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보며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가마를 여느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
20
또 군사들 가운데에서 힘센 장정 몇 사람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묶어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지라고 분부하였다.
91
그때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서서 자문관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세 명이 아니더냐?” 그들이 “그렇습니다, 임금님.” 하고 대답하자,
92
임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95
네부카드네자르가 말하였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요한 8,31-42
오늘 복음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4월 9일
고병관 요셉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9:10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방법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요한 8,31).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아직은 그 믿음이 일시적이고 불완전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처럼 생명의 말씀이 듣는 이의 삶에서 충만하게 드러날 때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깨달음이나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신앙 안에서의 만남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에 대한 순종이고 그 순종을 삶으로 드러낸 아브라함처럼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고 그분 말씀 안에 머물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의 자녀로서 이미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데,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할 뿐 죄에서 구하지는 못합니다(로마 3,20 참조).
율법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보여 주고 그 안에서 완성되는 진리의 조각이기에,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을 통해서만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강제하지도 속박하지도 않는 온유한 말씀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를 하느님의 자유로운 자녀가 되게 합니다.
‘내 것, 내 생각, 내 사람’이라는 닫힌 관계에 얽매여 있으면 하느님께 온전하게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에 열린 마음을 지닐 때 예수님을 진리로 마주할 수 있고 그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에게서 멀어져 버린 유다인이 아닌,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는 자유로운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진리 안에서의 자유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 말씀 안에 머무르면 주님의 제자가 되고, 그러면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 말씀 안에 머문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주님 말씀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그 말씀대로 실천한다는 뜻일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 말씀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이 그의 마음에 머물지 않고,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주님 말씀만이 진리이고 다른 말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이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주님 말씀을 믿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가 내 말만 진리라고 하는 것과 다릅니다.
당신만 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누구와 비교하여 당신의 말씀만 진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비교 불가입니다. 누구와 비교를 거부합니다.
예를 들어 석가의 말과 비교하여 주님 말씀이 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진리가 그분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누구의 말과 비교하여 당신 말씀이 진리라거나 더 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의 원천이고 기준이시기에 당신 말씀을 따르면 진리에 부합하고 그렇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진리의 말씀인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 우리가 진정 자유롭다는 것과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자유가 무엇인가? 다시 질문합니다. 국어사전을 참고하여 보통 얘기하는 자유의 뜻을 보면 자기 아닌 다른 누구나 무엇에 의해 존재나 행위가 속박받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것이고 자기 마음 또는 뜻대로 존재하고 행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의에 반드시 제기되는 문제가 나의 자유가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자유롭게 발을 뻗었는데 남을 불편하게 하거나 더워서 버스 창문을 열었는데 다른 사람은 싫어하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개인의 자유는 서로 충돌하고 그래서 공공의 질서와 규범 안에서 자유로운 자유를 자유라고 흔히 말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도 진리 안에서 자유입니다.
진리(眞理)란 이치(理致)로 환원해서 이해해도 좋을 겁니다.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말아야지 거스르면 그것은 재앙이요 죽음입니다. 또 도리(道理)로 환원해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도리를 따라서 곧 가야 할 길을 따라서 가야지 도리를 벗어나고 가야 할 길을 벗어나면 안 되고 심지어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무엇이 진리냐 또는 참 진리냐인데 우리는 주님께서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길이 아닌 길로 가는 것도 자유이고, 반대 길로 가는 것 곧 역주행하는 것도 자유이지만 그것은 참자유가 아닙니다. 참자유는 진리 안에서의 자유요,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의 자유요, 사랑하고 사랑케 하는 자유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우리 안에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하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이는 이미 믿는 이들에게,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알려주시며, 당신의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깨달을 것이고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을 넘어서, 그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에로의 초대요, 동시에 진리와 자유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지탄하여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요한 8,37)
그렇습니다. ‘내 마음 자리에는 누가 차지하고 있는가?’ ‘누구의 말이 차지하고 있는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내 자신과 내 말인가? 혹 다른 이들이나 다른 이들의 말인가?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하고, ‘우리의 삶 안에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머무른다.’는 것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말한 대로,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듯이 말씀이신 그분께 ‘붙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그분 영의 수액을 받아먹듯이 그분의 생명이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단지 상대 안에 머무르는 단순한 머무름이 아니라 ‘역동적인 상호교환’, 곧 서로에게 건너가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extasis와 kenosis)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이는 본질적으로 서로 향하여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향하여 있으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머무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머무르는 자리요, 궁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당신의 참된 제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같은 복음서 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요한 16,13)
그렇습니다. 말씀과 우리가 이렇게 상호내주하면 진리를 깨달을 것입니다. 진리이신 말씀이 우리의 삶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곧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말씀이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고”(요한 8,34), 진리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진리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저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6).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8,36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주님!
제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가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제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되게 하소서.
당신은 진리이오니,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진리가 무엇인지 몰라서 힘든 거다!
영화 『레터스 투 갓』는 소아암에 걸린 소년 타일러와, 우울증에 빠져 ‘자신은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기던 우체부 브래디의 만남을 통해 “나는 누군가의 기도에 응답할 수 있는 존재”라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타일러는 매일같이 “하느님,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오늘은 제 친구 샘의 고민을 해결해주시고, 우리 엄마가 힘낼 수 있도록 친구를 보내주세요.”라는 식의 편지를 씁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우체부 브래디. 처음 이 편지를 발견한 브래디는 ‘이게 대체 뭔가?’ 하는 의아함에 열어보지만, 점차 편지의 진정성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에 이끌립니다.
브래디는 이혼하여 아들도 볼 수 없는 상태여서 “난 아무것도 해낼 수 없어. 내 인생은 엉망이야.”라고 자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타일러의 편지에는 언제나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어요. 저도 언젠간 낫게 해주실 거라고 믿어요.”라는 희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편지를 접한 브래디는 ‘혹시 내가 이 아이의 기도에 작게나마 응답할 수 있는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타일러의 병세는 조금씩 악화하여 가지만, 그는 여전히 웃으며 “브래디 아저씨,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신대요. 아저씨도 들을 수 있지 않으세요?”라고 말합니다. 처음엔 이 말이 부담스럽기만 하던 브래디는, 어느 순간 “이렇게 작고 힘없는 소년조차도 누군가에게 희망을 전하고 있잖아. 나 또한 누군가의 기도를 들어줄 수 있다면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대신 전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타일러의 어머니 매디는 남편을 잃고, 아들 병원비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며 외롭고 슬퍼하던 터라 브래디의 작은 도움과 격려가 큰 위안이 됩니다. 브래디는 자신이 이 가족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자각하면서, “내가 너희들에게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꼭 돕고 싶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브래디는 더 이상 술과 자책에 의존하지 않고, 타일러 엄마의 든든한 친구이자 타일러의 ‘아버지 같은’ 조력자로서 성실히 우편물을 배달하고, 가족의 곁을 지킵니다.
결국 타일러는 세상을 떠나지만, 그가 쓴 편지들은 브래디와 마을 사람들에게 ‘누군가의 기도에 응답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커다란 깨달음과 희망을 남깁니다. 브래디는 “타일러를 통해 난 진리를 알았어. 나는 누군가가 바라는 것을 들어줄 수 있는 존재야. 그걸 믿었을 때, 나는 죄와 절망에서 벗어났어.”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새로운 정체성은 곧 ‘나 또한 작은 하느님처럼, 누군가의 기도와 필요에 응답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고, 이 믿음이 브래디를 완전히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전해 주고 싶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주시는 은총이 진리를 통한 자유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얽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렇다면 진리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더는 죄를 짓지 않고 모든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유다인들도 자신들이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그러나 이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자녀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무엇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6,53)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가 갖게 되는 진리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분과 ‘대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아버지와 대등하게 하신다고 박해받으십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10,33)
예수님께서는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10,34-36)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이 진리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된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참으로 죄에서 벗어나집니다. 이것을 믿으려면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의 핵심입니다.
요한은 성체성사를 세우시는 것 대신 발을 씻어주시는 행동을 하십니다. 당신이 제자들보다 낮아지는 모습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까지 들어 높이시는 것이 성체성사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3-15)
뮤지컬 ‘'라만차의 기사’에서 알돈자는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어머니는 몸을 파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어떻게 숙녀처럼 살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알돈자는 돈키호테의 영향으로 그녀가 자신을 죄를 지은 창녀로 여겼던 것에서 벗어나, 결국 자신이 공주 알돈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죄에서 벗어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대로 됩니다. 우리 가치는 마치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그릇들과 같습니다. 그것들이 개밥그릇으로 쓰였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하나에 수억 원 짜리 보물이었습니다. 이것을 알았을 때는 더는 개밥을 담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있는 그대로 박물관에 전시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값을 쳐 주러 오신 분이 반드시 계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된다면 마치 사이비처럼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 때문에 그렇게 된다면 우리 공로가 아니라 오로지 그분의 공로로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신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믿으면 죄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결국 하느님에 의해 주어지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과감하게 알려고 하라.”
위대한 철학가 임마누엘 칸트가 ‘계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했던 대답입니다. 사실 우리는 소극적인 앎만을 추구합니다. 즉, 쉽고 편한 앎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진정한 앎도, 또 계몽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학창 시절에 시험 볼 때를 생각해 보세요. ‘아는 문제만 나왔으면 좋겠다.’, ‘내가 찍으면 모두 맞았으면 좋겠다.’ 등의 생각을 해 본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더 열심히 공부하는 것인데도, 쉽고 편한 방법만을 생각했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성인 되어서는 없어졌을까요? 아닙니다. 어렵고 힘든 문제가 앞에 놓이면 저절로 가장 좋은 결과 얻기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무엇이 자기에게 필요한지도 모르면서, 그냥 알아서 제일 좋은 길로 이끌어 달라고 청하는 우리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우리를 제일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문제는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또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하기에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신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감사의 기도를 바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여러분의 앎은 어떤 것 같습니까? 과감하게 알려고 하십니까? 혹시 알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주님에 대해 도저히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신학교에 들어가 철학, 신학, 성서학 등을 배우면서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신학교 졸업했으니 이제 하느님에 대해 알 필요가 없을까요? 계속해서 하느님의 새로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책을 읽으면서 또 강의를 들으면서 계속 알려고 노력합니다. 그만큼 하느님을 알게 되면서 그 안에서 기쁨을 얻게 됩니다. 또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감사의 기도를 바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과감하게 알려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특히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를 알게 됩니다. 나의 모든 것을 봉헌할 수 있는 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유다인들을 꾸짖으십니다. 유다인들은 이 꾸짖음을 받아들이고 변하기 위한 노력보다 계속해서 예수님 말씀을 반대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요한 8,41)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지만, 알려고 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그냥 입으로만 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요한 8,42)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앎을 다시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제대로 알아야 주님을 믿고, 그 믿음 안에서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무엇을 정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우리 안의 작은 목소리를 믿어야 합니다
- 잉그리드 버그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면 우리는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진리와 더불어 살아가고 구원의 자유와 함께 생활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자유보다 더 크고 위대한 가치는 없습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자유를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감내하십니다. 사람을 더 사람이게 하는 진정한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자유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자유이며 진리를 빼앗기지 않는 자유입니다. 우리 모두를 아름답게 하는 자유입니다. 미움에서 우리를 풀어주는 사랑의 자유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유입니다. 자유는 진리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자유의 기초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길을 찾는 내려놓음의 대자유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자유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진리와 자유는 둘이 아닙니다. 진리 안에서 만나고 누리는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생명의 자유이며 사랑의 자유입니다.
요한복음 8장 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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