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신들 가운데 당신 같은 이 없나이다. 당신은 위대하시며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당신 홀로 하느님이시옵니다.
주님, 주님의 은총을 저희에게 인자로이 내려 주시어 언제나 저희가 지나친 욕망을 끊고 주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2025년 3월 28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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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호세 14,2-10)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 오늘 복음
(마르 12,28ㄱㄷ-34)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 오늘 말씀 카드
(호세 14,9)
너희는 나에게서 열매를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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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14,2-10
오늘 제1독서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3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4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5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6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7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8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
9
내가 응답해 주고 돌보아 주는데 에프라임이 우상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싱싱한 방백나무 같으니 너희는 나에게서 열매를 얻으리라.
10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주님이 말씀하신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르 12,28ㄱㄷ-34
오늘 복음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28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3월 28일
홍용택 테오필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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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 학자에게, 그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이르십니다. 엄청난 칭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마르 12,38-40 참조). 이 율법 학자에게는 다른 율법 학자들과 구분되는 점이 분명히 있어 보입니다.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슬기로운 율법 학자의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12,30-31 참조) 대답하십니다.
율법 학자는 그에 더하여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고, 다른 이가 없으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12,32-33 참조) 대답합니다. 이웃 사랑을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여기는 것은 유다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유다인들은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을 이웃 사랑을 뛰어넘어 하느님에 대한 최상의 경배와 예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슬기로운 율법 학자가 율법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까닭을 생각해 봅니다. 제1독서는 우리가 죄악에 비틀거릴지라도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 주시는 하느님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 율법 학자는 이러한 하느님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음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를 결코 포기하시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성숙시켜 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가, 율법 학자 가운데서 주님께 칭찬받은 유일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선 같은 내용의 다른 두 복음을 보면 율법 학자가 주님께 질문하는 이유는 다른 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님을 시험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는 시험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사두가이의 교묘한 질문에 현명하게 답하는 것을 보고 율법의 가장 중요한 계명에 대해서도 질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주님의 답에 그도 동감을 표하면서 율법의 핵심을 잘 알고 있음을 드러내고, 주님께서도 그런 그에 대해 칭찬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이 아리송하기도 하고 저로 하여금 더 생각게 합니다.
왜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다고 하지 않으시고 멀리 있지 않다는 식으로 주님께서 답을 하실까? 이왕 칭찬하시는 것 화끈하게 넌 하느님 나라에 아주 가까이 와있다고 하면 더 좋지 않을까요?
혹시 이 사람이 저와 같아서 그러신 것일까요? 제 생각에 저는 하느님 나라에 멀리 있지 않지만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것입니다.
저도 오늘 율법 학자처럼 주님 말씀에 맞장구는 칩니다. 하느님께든 이웃에게든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는 주님 말씀에 저도 맞다고 생각하기에 즉시 동감을 표할 것입니다. 사실 이것을 아는 것만도 대단하고 하느님 나라에 멀리 있지 않고 상당히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제일 처음 말씀하신 것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씀이셨는데 주님께서 이렇게 가까이 오셔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어도 그것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를 보면 곧 저의 실천을 보면 아주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이 먹어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점점 다가오니 사랑할 날도 많지 않은데 왜 미워하는 데 시간을 허비할까 하는 생각에 미움보다 사랑이 더 많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하느님 나라의 사랑에 가까이 있지 못하고 그렇다고 아주 멀리 있는 것은 아닌 그런 상태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겠지요? 하느님 나라에 멀리 있지도, 그렇다고 아주 가깝지도 않은 우리 사랑이지요? 실망할 것은 없고 분발할 필요가 있는 우리 사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신앙의 원천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오늘 <입당송>에서도, <제1독서>와 <화답송>에서도, <복음>에서도, 같은 내용의 말로 반복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호세 14,10)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화답송>에서는 “내가 주님, 너희 하느님이다. 너를 이집트 땅에서 끌어올렸다.”(시 81,11)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마르 12,28)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먼저 ‘존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행동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곧 그분이 주 하느님이심을 먼저 밝히십니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마르 12,29)
이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이시라는 그분의 존재차원을 밝히고 있는 동시에, 우리의 존재의 차원도 밝혀주십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분의 소유요라는 존재를 밝혀줍니다. 그것은 곧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그렇게 내 이웃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소유가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계명으로 주어집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고,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어쩌면 율법학자에게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그가 인간의 행동규범으로서의 계명을 깨닫고 있을 뿐, 그 계명의 이유인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곧 먼저 사랑 받은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곧 그는 ‘자신의 사랑’을 사랑의 시금석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15,12)는 ‘하느님의 사랑’을 사랑의 시금석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 환호송>에서 말하는 회개는 한 마디로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호세 14,2) 입니다(회개를 나타내는 ‘metanoia’의 구약성경의 단어인 ‘tesubah’의 원래 뜻).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본질적으로 단지 윤리적 행동의 뉘우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돌아옴 곧 존재에로의 전환을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사랑이신 우리 주님, 하느님께로 돌아와 찬양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12,31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몸인 이웃을
내 몸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면 무엇이 좋은가?
오늘 복음은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잘 알지만, 잘 하지 않는 계명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나의 무엇을 바치고 있으며,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나의 무엇을 희생하고 있나요? 이 계명에 목숨을 걸지 못하는 이유는 그래봐야 무슨 이득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 『그랜 토리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하고 주연한 작품입니다. 주인공 월트 코왈스키는 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에서 수십 년간 일한 후 은퇴한 참전 용사로, 보수적이고 고집이 세며, 인종차별적 성향을 지닌 노인입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경험으로 인해 그는 전쟁 중 저지른 과거의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며, 특히 한국전쟁에서 자신이 저지른 살상과 폭력에 대해 깊은 죄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영화 초반부에 그의 아내가 사망하고, 월트는 더욱 폐쇄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는 성당에 다니기는 하지만, 고해성사를 피하거나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에게 성당의 젊은 사제인 야노비치 신부는 죽은 아내의 유언이라면 끊임없이 진정한 고해성사를 권하지만, 월트는 이를 냉소적으로 무시하며 마음속 깊은 죄책감과 분노를 억누르며 살아갑니다.
어느 날, 월트의 옆집에 몽족 이민자 가족이 이사를 오면서 그의 삶에 변화가 찾아옵니다. 월트는 처음에는 이웃이 동양계라는 이유만으로 극도의 불편함과 혐오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옆집의 십 대 소년 타오가 동네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우연히 타오와 그의 누나 수를 구해주는 사건을 계기로 이들과 서서히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특히 타오가 갱단의 위협 속에서 범죄에 휘말릴 위험에 처하자, 월트는 타오에게 자신의 소중한 자동차인 포드 그랜 토리노를 관리하게 하고 집안일을 돕게 하며 타오를 보호하려 애쓰고, 점점 깊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웃을 돕고 보호하는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갖고 있던 인종적 편견과 증오를 반성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특히 그는 타오와 함께 몽족 가족의 식사에 초대받아 어색하지만 따뜻한 시간을 보내면서,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가족적인 사랑과 환대를 경험하게 됩니다. 월트는 자신이 평생 느끼지 못했던 사랑과 존중을 받으면서, 마음속에 품고 있던 차가운 증오와 편견에서 점차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타오의 가족이 계속해서 갱단으로부터 폭력적인 위협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월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는 진정한 자기 희생과 이웃 사랑을 통해 자신의 죄를 씻고자 합니다. 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는 야노비치 신부를 찾아가 생애 처음으로 진정한 고해성사를 봅니다. 이번 고해성사에서 그는 형식적인 죄가 아닌, 전쟁 중 저지른 진정한 죄악과 평생 품고 살아온 증오에 대해 깊이 후회하고 회개하며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그의 영혼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만들고,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화해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월트는 갱단 앞에 서서 총을 들지 않은 채 일부러 그들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의 죽음은 이웃을 위한 궁극의 희생이며, 그로 인해 갱단은 체포되고 이웃들은 안전을 되찾게 됩니다. 영화는 주변의 이웃들이 많이 참석한 가운데 월트의 장례식 장면으로 마무리되며, 그의 유언에 따라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 소년 타오에게 자신의 소중한 자동차 ‘그랜 토리노’를 유산으로 남깁니다. ‘워런 버핏’은 인생에서 성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많은 재산이 성공이 아닙니다. 돈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줄 때 그게 성공입니다. 사랑받는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25세 전까지는 결혼해서 아내와 자녀들에게 사랑받는 가장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를 들어보니 남편을 존중하는 아내들은 좀처럼 만나볼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사랑받는 게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가족이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먼저 고해성사를 해야 가족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가족에게 인정받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사랑은 나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시고 이웃이 나를 사랑해줍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공입니다.
여러분들은 높이 오른 정치인들을 좋아합니까? 여러분들은 부자를 좋아합니까? 여러분들에게 자신을 희생한 옆에 있는 사람을 더 좋아하고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대전의 ‘성심당’은 이런 마인드로 성공한 대표적인 가톨릭 신자들의 모범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성심당의 창업자인 임길순과 한덕수 부부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무료로 빵을 제공하며 시작했습니다. 창업 초기, 성심당은 주변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며 상업적 이익보다 이웃 돕기를 우선시했습니다. 또한, 지역 농민들과 협력하여 질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한 기부와 봉사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성심당은 장애인 시설, 독거노인, 저소득층을 위한 후원 활동도 적극적으로 전개하며 지역 사회에 이바지했습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지금의 증거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매일 신경 쓰고 살아야 할 전부라는 것을 인정할 때 참 행복의 문 앞에 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어떤 분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에, ‘부탁드려요.’와 ‘고마워요’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아요.”
‘정말 그런가?’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어른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기에 아이들도 따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항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기가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서 감사의 말을 잘 못하는 모습을 어른들이 먼저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자기의 기도를 살펴보면 간단합니다. 평소에 겸손된 마음으로 청원의 기도를 바치고, 또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좋은 것들은 모두 자기 노력으로 얻은 것으로 당연하고, 나쁜 것들은 모두 주님께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배운 아이들 역시 당연히 그런 모습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보면 상대에 대해 감사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사함이 줄어드는 순간 사랑도 식어가지요. 결국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상관없이 사랑하면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 대한 사랑을 키워야 합니다. 사랑이 커질수록 감사함도 커질 것입니다. 좋은 것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나쁜 상황에서도 함께해 주심에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감사의 마음이 자기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듭니다. 그래서 감사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게 하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율법 학자들은 모세 법에서 수를 세어, 248개의 명령과 365개의 금지를 정해놓았습니다. 바로 이 613개의 계명 중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를 인용하시어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시고, 이웃을 사랑하는 둘째 계명을 덧붙이십니다.
그 세부 조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계명의 핵심이 중요했습니다. 그 핵심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고, 그 감사의 마음이 지금을 더욱 기쁘게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보다 다른 것에 더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 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을까요?
오늘의 명언
아침에 마지못해 일어난다면 이 점을 명심하라. 나는 인간으로서 할 일을 하기 위해 일어난다
- 아우렐리우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첫째는 이것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한 저의 사랑을 진심으로 회개합니다. 사랑이란 하느님을 사랑해야 알게 되는 첫째가는 사랑의 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름 아닌 사랑하는 우리 마음 안으로 오십니다.
우리 존재에 대한 참모습을 깨닫게 하는 사랑입니다.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끝없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는 결코 간과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개인과 공동체의 여정입니다. 사랑의 마음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가장 기본이 되고 가장 중심이 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최선의 지혜이며 모든 관계의 바탕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더 나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게 될 때 만나게 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계명의 첫째도 둘째도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해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계명은 삶을 가리키고 우리의 삶은 사랑을 향합니다. 사랑을 행(行)하는 사랑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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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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