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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3/24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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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뜨락을 그리워하며 이 영혼 여위어 가나이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이 몸과 이 마음 환성을 올리나이다.

주님, 주님 없이는 교회가 온전히 서 있을 수 없사오니 언제나 주님의 은총으로 교회를 이끄시고 무한하신 자비로 깨끗하게 하시어 저희를 보호하소서.

2025년 3월 24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3월 24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3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2열왕 5,1-15ㄷ)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 오늘 복음
    (루카 4,24ㄴ-30)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 오늘 말씀 카드
    (시편 130,5)
    나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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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2열왕 5,1-15ㄷ
오늘 제1독서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그 무렵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은 그의 주군이 아끼는 큰 인물이었다. 주님께서 나아만을 시켜 아람에 승리를 주셨던 것이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 환자였다. 


한번은 아람군이 약탈하러 나갔다가,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아 왔는데, 그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 곁에 있게 되었다. 


소녀가 자기 여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르신께서 사마리아에 계시는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주인님의 나병을 고쳐 주실 텐데요.” 


그래서 나아만은 자기 주군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가 이러이러한 말을 하였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아람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써 보낼 터이니, 가 보시오.” 이리하여 나아만은 은 열 탈렌트와 금 육천 세켈과 예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전하였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편지가 임금님에게 닿는 대로, 내가 나의 신하 나아만을 임금님에게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나병을 고쳐 주십시오.” 


이스라엘 임금은 이 편지를 읽고 옷을 찢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느님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다니! 나와 싸울 기회를 그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이스라엘 임금이 옷을 찢었다는 소리를 듣고, 임금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을 전하였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 대문 앞에 와서 멈추었다. 

10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시켜 말을 전하였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11 
나아만은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며 말하였다.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 

12 
다마스쿠스의 강 아바나와 파르파르는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더 좋지 않으냐? 그렇다면 거기에서 씻어도 깨끗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 나아만은 성을 내며 발길을 옮겼다. 

13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14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15 
나아만은 수행원을 모두 거느리고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그 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나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루카 4,24ㄴ-30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3월 24일
기민영 미카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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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인 나자렛의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당신께서 카파르나움에서 하셨던 일을 고향에서도 해 보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예언자 시대의 일을 이야기하시는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화가 잔뜩 나서 당장 그분을 고을 밖 벼랑으로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무엇이 그토록 그들을 분노하게 하였을까요?

제1독서에서 나아만은 요르단강에서 몸을 씻으면 나병이 나을 것이라는 엘리사 예언자의 말대로 하여 병이 나았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예수님을 믿고 카파르나움으로 찾아갔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병이 나았습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도 이 엄청난 소식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자신들의 눈앞에서 표징을 보여 줄 것을 기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 시대의 일을 본보기로 말씀하셨는데,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믿음이 이방인들보다도 못하다는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매우 분노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아만과 비교하신 것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가혹하고 냉정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아파서 피하고 싶은 이야기겠지만, 그 안에는 그들의 회개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여정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밀어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정말 힘들겠지만, 예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믿음의 착각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오늘 사순 3주 월요일은 주인공이 나아만과 하느님 둘입니다. 곧 치유 받는 나아만과 치유해주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엘리사 예언자가 있습니다. 먼저 나아만을 주인공으로 오늘 우리 신앙을 반성하면 좋을 것입니다.

나아만은 우리와 비슷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다 차츰 진정한 신앙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하느님께서 자기를 치유해주시는 거라는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설사 하느님이 치유해주시는 거라고 믿을지라도 인간 정성이 지극해야지만 치유해주신다고 믿습니다. 곧 나아만 자기의 정성과 엘리사의 정성 말입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치유 받으려고 엘리사에게 올 때 뇌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고 군사들도 많이 대동하고 왔습니다. 하찮은 사람은 무시하더라도 자기처럼 대단한 사람은 치유해주고, 자기처럼 지극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꼭 치유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러는 만큼 엘리사도 지극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런 나아만에게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고 가라며 시큰둥한 모습만 보입니다. 자기가 치유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치유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엘시사가 나와 직접 치유해주지 않으면서 요르단강물에 치유 받으라는 줄 또 착각하고 자기네 강물이 더 좋다고 말합니다. 이에 나아만의 부하들이 한번 믿어보라고 설득하여 씻었더니 병이 낫고, 그때 그는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라고 말하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지난주 수녀원 연피정 중에 한 수녀님이 당신의 주치의는 하느님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당신 주치의가 있지만 하느님이 주치의시라는 믿음을 고백한 것인데 우리도 병원과 의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 고쳐 주시는 거라고 믿어야겠지요.

다음은 복음의 주님을 주인공으로 보겠습니다. 주님은 하느님께서 유대인이 아니라 나아만만 고쳐 주셨음을 얘기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착각하지 말라고,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하느님 자녀라고 착각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독점하려는 잘못을 자주 범합니다. 물론 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기 정체성을 모르는 것이 문제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처럼 자기만 하느님 자녀이고 하느님이 나만 사랑하신다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착각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고 가르치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똑같이 고쳐 주신다고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이 비위 상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비위 상하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의 착각을 바로잡아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르게 하라는 말처럼 주님께서 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음의 착각과 사랑 독점 욕심 때문에 비위 상한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도 나아만이나 유대인들처럼 믿음의 착각이 있음을 알고, 교정도 받고 성장도 하라는 도전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시면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루카 4,29)

이는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으실 배척을 예고해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문 밖으로 내몰리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밖, 이방인지역들에게로 당신 구원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예시해줍니다. 곧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이게 될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미리 가리켜줍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한가운데”라는 부사는 우리를 ‘하느님의 현존’에로 데려다 줍니다.

“너희 한가운데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는 위대하시다.”(이사 22,6)

“정녕 이제 내가 가서, 너 한가운데 머무르리라.”(즈카 2,14))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실로 당신은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4,30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주님!
원하시어 붙잡히시고 
원하시어 빠져나가신 당신께서는 
원하시어 고난을 받으시고 
원하시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벼랑에 내몰려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셔야 할 길을 
유유히 가시는 당신을 따라 
유유히 걷게 하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저도 원하게 하시고
당신이 원하시면 
저도 유유히 걷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화가 날 때는 언제나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이다.

사람이 진실 앞에서 보이는 가장 솔직한 반응은 ‘분노’일지도 모릅니다. 진실은 칼날처럼 예리해서,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 감춰진 상처나 수치를 찌릅니다. 루카 복음 4장 24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들의 종교심과 신앙 안에 감춰진 교만을 정확히 찔러낸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큰 죄가 되었길래, 사람들은 예수님을 끌어내어 벼랑으로 밀쳐 죽이려 하였을까요?

예수님은 단지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의 과부가 아닌, 사렙타에 있는 이방 여인에게 기적이 일어났고, 엘리사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나병환자가 아닌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치유받았다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그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신앙적 특권의식을 건드렸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왜 나는 그 말에 화가 났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안의 죄를 드러내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구약의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한 것뿐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개인적 모욕처럼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죄와 직결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런 속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 곧,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낀 사람이 오히려 더 격하게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잘못이 드러날 것 같을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화를 내고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허물을 가리려 합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주인공 신애의 깊은 상실과 용서, 그리고 분노의 여정을 그립니다. 아들이 유괴되어 사망한 깊은 슬픔 속에서 신애는 지역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며, 신앙을 통해 위로를 찾으려 합니다. 그녀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교도소로 그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범인은 이미 하느님께 용서받았다고 말하며 평온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저는 이미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신애는 큰 충격을 받고, 분노와 혼란에 휩싸입니다. 자신이 용서하려 했던 사람이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에,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던 분노와 상처가 드러납니다. 이는 그녀가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했음을, 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하느님과 세상에 자기 분노의 탓을 돌리며 화를 내고 죄를 이어갑니다.

아담과 하와, 카인과 아벨부터 분노는 자기 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다른 일을 하시지 않고 그저 진리를 말씀하시며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하십니다. 비난받는 표적이 되면서 사람들이 자기 죄를 볼 기회를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그 죄를 보고 자기를 고칠 것인지, 그냥 화만 낼 것인지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만 죄에서 돌아설 사람들은 분노가 날 때 자기 죄를 보는 이들입니다.

정확한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인터넷에 나온 엔도 슈사쿠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그는 192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신앙을 접했지만, 일본에서의 기독교는 소수 종교였기에 종종 내적인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의 삶과 기독교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며 자랐습니다. 일본은 그에게 매우 세속적이고 불교와 신도 중심의 문화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엔도는 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게 되며, 그곳에서 신앙에 대한 회의와 무신론적인 사상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무신론적인 사상을 깊이 탐구하며, 기독교와 신의 존재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신의 침묵이 고통을 부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왜 신은 인간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고통스러운 답을 찾지 못하고, 결국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대 중반, 엔도 슈사쿠는 일본에서 심각한 폐결핵에 걸리게 되어, 일본 도쿄의 와세다 대학 병원(Waseda University Hospital)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폐결핵은 당시에도 치명적인 질병으로, 입원한 시기인 1956년부터 약 1년간 그는 병상에서 고통을 겪으며 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 병원에서의 시간이 엔도에게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입원 후, 엔도는 신에 대한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자신의 고통을 느끼며, "왜 신은 내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도 침묵하시는가?"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 속에서 그는 신의 침묵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과 죄를 직시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고통 속에서 점차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그 고통 속에서 점차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신은 나와 함께 고통받고 계셨다”라는 깨달음은 그에게 깊은 영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분노와 상처가 사실 신을 떠나기 위한 방어기제였음을 깨닫고, 그분의 침묵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죄를 드러내기 위한 신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엔도는 회심 후, 자신의 작품인 『침묵(Silence)』에서 그가 겪은 내적 갈등과 신앙의 회복을 풀어냅니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려 했던 선교사들의 고난을 다룬 작품으로, "침묵"이라는 주제 속에 신의 고통과 인간의 고통이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탐구합니다. 그는 회심 후, "내가 신을 믿지 않으려 할 때, 그 신을 향한 분노가 더 크게 느껴졌고, 그 분노가 결국 내 죄를 드러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회심은 신을 거부하려 했던 자신을, 오히려 신의 뜻을 찾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분노와 고통을 통해 자신을 직시하고 회개할 수 있었음을 깨닫게 했습니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신앙에 대한 깊은 성찰을 주었고, 엔도는 그 이후로도 그의 작품을 통해 신앙의 의미를 탐구하며,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처음엔 분노가 일었지만, 그 말이 나를 위한 진리였음을 깨달았을 때, 삶은 변한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그러하십니다.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을 하십니다. 그 말이 불편하더라도, 분노를 넘어 성찰로 나아갈 때, 우리는 구원의 길에 서게 됩니다.

“그분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 4,12)

그 칼날은 우리를 베기 위한 것이 아니라, 썩은 것을 도려내어 새 생명을 위한 수술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매년 2~3차례 이상의 피정을 신학생 때부터 했으니, 이제까지 참 많은 피정에 참여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피정이 이를테면 고상한 피정이었습니다. 신학생 대상의 피정, 신부 대상의 피정은 수준이 높았습니다. 피정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이름이 나 있는 분들이었고, 그 내용도 어른에게 알맞은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부끄럽게도 이 피정 지도자들의 강의에 크게 와닿은 적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에 많이 고민했습니다. ‘나의 수준이 너무 낮은 것이 아닐까? 하느님을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닐까?’ 등등…. 피정 갈 때마다 늘 이런 고민이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커다란 울림을 얻었던 피정도 많았습니다.

가장 큰 도움이 된 피정은 한 달 동안 이루어진 이냐시오 영신수련이었고, 도 다른 피정은 찬양 속에서 이루어진 특히 자기 체험 안에서 주님을 느끼게 해주는 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피정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의 위신, 자존심, 체면, 권위, 품위 따위를 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때 피정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피정 지도자가 온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낮추지 않으면 피정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 주님께서 강조하신 겸손 속에서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십니다. 그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셨지만, 사람들은 이 말씀에 화가 잔뜩 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을 통해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예수님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주님의 말씀을 듣기가 거북하고 불쾌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합니다.

이에 예수님의 반응이 인상적입니다. 보통 누군가가 화를 내면, 그 화를 삭이기 위해 그 사람 편에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 자기를 낮추지 않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만과 이기심이 가득하다면 과연 주님께서 함께하실까요? 그냥 우리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실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 가득한 사람만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주님과 함께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라. 그러나 아무것도 소유하려 하지 마라.

- 장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언제나 하느님께서는 옳으셨습니다. 최선을 다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받아들여야 할 하느님의 뜻입니다.

깨지지 않는 우리의 뜻을 깨끗이 씻겨주시는 분 또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고집을 비워야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모르기에 우리는 더욱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세운 믿음과 하느님께서 세우신 믿음은 다릅니다. 기대감은 믿음이 아닙니다. 기대감으로 기진맥진해지는 우리의 부실한 내면입니다. 욕심 하나하나에 갇혀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우리의 욕심만 앞설 뿐입니다. 사랑이 치유이고 사랑이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이 너무 많아 헤아릴 수 없기에 무릎을 꿇습니다.

믿음과 치유 사이에서 제자리걸음만 하는 우리들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구원과 치유의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음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역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었고 아직도 깨닫지 못한 은총과 치유가 있었습니다. 욕심을 비워내야 가득해지고 깨끗하여지는 구원입니다.

구원을 가로막는 선입견과 편견의 가장 아픈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사순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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