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저를 꿰뚫어 보시고 제가 걸어온 길 살펴보소서. 저의 길 굽었는지 보시고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
하느님,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니 저희 마음에 성령의 불을 놓으시어 굳은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2025년 3월 20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3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예레 17,5-10)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오늘 복음
(루카 16,19-31)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오늘 말씀 카드
(예레 17,7)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예레 17,5-10
오늘 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6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7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8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9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10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루카 16,19-31
오늘 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3월 20일
이영준 모이세 신부
✚ 미사시작 00:38
✚ 강론시작 06:50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생중계 성당
- 가회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가회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가회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06: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생중계 없음 - 남양성모성지 온라인 매일미사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남양성모성지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생중계 없음 / 화 11:00 / 수 11:00 / 목 11:00 / 금 11:00 / 토 11:00 - 원당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원당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원당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10: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10:00 - 초당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초당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초당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0:30 / 월 06:30 / 화 19:30 / 수 10:00 / 목 19:30 / 금 10:00 / 토 10:00 - 팔로티회 온라인 매일미사
팔로티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분당 팔로티회 : 성시간(15:00) 후 미사(16:00)
주일 16:00 / 월 16:00 / 화 16:00 / 수 16:00 / 목 16:00 / 금 16:00 / 토 16:00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말씀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저승에 간 부자의 이야기
오늘 복음은 저승에 간 부자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생각 거리를 전합니다. 저승에서 고통을 받던 부자는 처음에는 자기 처지에만 집중하고, 자신의 고통을 해결해 달라며 소리 지릅니다.
그러나 자신이 고초를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는 자기 형제들이 자신과 같은 상황에 놓이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관심의 대상이 자신에서 형제들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는 형제들에게 죽은 사람이 살아서 가지 않으면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습니다.
부자는 저승에서 고초를 겪으면서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게 됩니다. 부자가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동안, 그의 대문 앞에 가난한 라자로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심지어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바랐습니다.
만일 부자가 가난하고 병든 라자로에게 마음을 썼더라면,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라자로가 자기 주위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한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이미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6,24 참조). 부자는 자신의 재물로 위로를 받는 데 만족하였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것으로 위로받고, 더는 주위를 둘러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자가 저승에서 겪는 고초는 하느님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는 뉘우침의 다른 표현입니다. 살아 있는 형제들이 늦기 전에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기를 바라는 부자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전해져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의지하는 이와 신뢰하는 이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그 잎이 푸르고 줄곧 열매를 맺는다.”
오늘 예레미야서는 저주받는 자와 복 받는 자를 대비합니다. 저주를 받는 자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이고, 복을 받는 자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자입니다. 이 말에서 의지와 신뢰라는 단어가 대비되며 의지-저주, 신뢰-복의 대비도 이루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어법과 어감에서 신뢰 관계는 좋지만, 의지 관계는 탁 들어도 좋지 않은 어감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의지한다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스스로 서지 못하고 그에게 의지해야만 서 있을 수 있고, 그가 없거나 몸을 빼면 그대로 무너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의지해도 이렇게 좋지 않은데 오늘 복음의 부자처럼 돈에 의지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돈에 자기의 행복을 의지하는 것이고, 그의 행불행이 돈에 좌우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이건 돈이건 의지하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은 스스로 서지 못하고 그것에 좌우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행복과 구원을 사람이나 돈에 두고, 하느님께 두지 않기 때문인데 그것은 마치 나무가 물가에 있지 않고 광야와 소금땅에 심긴 것과 같다고 오늘 예레미야서는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부자가 천국에 가지 못한 것은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행복을 돈에 의지하기에 하느님께 자기 구원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부자는 구원받으려고 하지 않고 행복하려고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도 하느님께 복을 받아 행복하려고 하지 않고 부자 청년처럼 가족이 있고 돈만 많이 있으면 영원히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도 단절하고 이웃과도 단절하고 살았을 겁니다.
주님께서 그의 집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았을 것이고, 나자로처럼 귀찮은 존재들은 봐도 못 본 체하고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한 부자 청년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영원한 생명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당신을 따라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범이 아니라 아예 주님을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주님의 모범을 따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고, 주님을 따라 하느님께서 계신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과 오늘 복음의 부자는 두 가지 다 실패한 것이고, 그래서 천국에 가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의 단절이 저승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 영원한 단절의 지옥에 간 것입니다.
행복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겁니다. 구원은 하느님만이 주시는 겁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극단적인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불신과 재물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에로 초대합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부자는 가련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자신과 라자로 사이에 골짜기를 파놓고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승에서 파놓고 건너가지 않은 그 분리의 골짜기는 저승에서도 그가 건너갈 수 없는 분리의 골짜기가 되고 맙니다.
사실, 이 부자는 특별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고, 타인에게는 무관심하고 인색했습니다. 곧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대문 앞에 누워있는 가난한 라자로를 무시하고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니라, 선행과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곧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야고 4,17)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임을 말해줍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비를 입어 부자가 되었으니,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에게 한 말, 곧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라는 간청은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 라는 간청으로 바뀌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부자가 대문 앞에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로 누워있어도 못 본 것은 자신의 호사스러움과 즐거움, 탐욕과 인색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형제들 사이에, 또 가난한 이들과의 사이에, 냉대와 무시와 무관심의 골짜기를 파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저승에서의 골짜기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라자로’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라자로가 구원을 입은 것이 그의 가난하고 고통 받은 삶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과 자비를 입은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호의와 사랑을 입고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그렇습니다. 라자로가 은총을 입은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승에서 처지가 뒤바뀐 부자는 자기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부자는 이승에 살고 있는 자신의 형제들의 회개를 위해서 라자로를 보내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브라함은 이승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이 있으니,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덧붙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사실, 우리가 당신을 믿지 못함은 기적을 보지 못했거나 듣지 못했거나 체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고 보고 체험하고도 받아들이지를 않는 완고함 때문일 것입니다. 곧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되다.”(루카 11,28).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6,31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주님!
당신을 믿지 못함은
보지 못해서 아니라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받아들이지를 않은 까닭입니다.
기적을 보고도 보지 못하고
신비를 체험하고도
체험하지 못함은
마음이 완고한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완고함과
제 자신을 내려놓게 하소서.
자애심을 내려놓고
당신이 주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두 삶의 방식과 두 상반된 결과 : 십자가와 부활, 부활과 십자가
오늘 복음은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입니다. 부자는 지옥가고, 거지는 천국에 간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속이 시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해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다음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의 줄거리입니다.
미국 미주리주 미시시피 강가에 위치한 작은 마을 세인트피터즈버그에 톰 소여라는 개구쟁이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톰은 일찍 부모를 잃고 고모인 폴리 아줌마 밑에서 자랐는데, 공부는 싫어하고 장난과 모험을 좋아해 언제나 골칫덩어리였습니다. 그는 학교 수업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온갖 말썽을 부리며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토요일, 폴리 아줌마는 말썽을 피운 톰에게 벌을 주기 위해 마당 울타리를 페인트칠하라고 시켰습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칠하던 톰이었지만, 곧 묘안을 떠올려 친구들에게 울타리 칠하는 것이 아주 재미있는 일이라고 속여 오히려 친구들로부터 사과, 구슬 등의 물건까지 받으며 일을 시키고 자기는 편히 쉬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톰은 자신의 재치와 영리함에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삶을 가볍게 여기고 책임감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톰에게 변화의 시작이 되는 중대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어느 날 밤, 톰은 마을에서 방랑아 취급받던 친구 허클베리 핀과 함께 공동묘지로 가게 됩니다. 허클베리 핀은 늘 자유롭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살아 톰이 매우 부러워하던 친구였습니다. 두 소년은 공동묘지에서 죽은 고양이로 사마귀를 치료하려는 미신적인 의식을 하려고 갔다가 우연히 끔찍한 살인 사건을 목격하게 됩니다.
마을의 의사 로빈슨이 인디언 조라는 악명 높은 사람과 머프 포터와 다투는 모습을 숨죽이며 보던 톰과 허클베리는, 인디언 조가 의사 로빈슨을 칼로 찔러 죽이고, 그 죄를 머프 포터에게 뒤집어씌우는 장면까지 전부 보게 되었습니다. 두 소년은 살인을 목격한 충격에 사로잡혀 비밀을 지키기로 맹세하지만, 톰은 이후 계속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톰은 그 죄책감을 잊으려 다시 모험과 놀이에 몰두합니다. 친구 조 하퍼와 허클베리 핀과 함께 해적으로 가장하여 섬으로 도망쳐 며칠을 보내며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을 죽었다고 생각하고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을 지켜보며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폴리 아줌마와 마을 사람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며 톰은 자신이 무책임하게 행동한 것을 깨닫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 사람들 앞에 나타납니다. 톰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머프 포터가 재판을 받게 됩니다. 톰은 자신이 진실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으면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처형당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결국, 톰은 내면의 두려움을 이기고 법정에서 증인으로 나서, 인디언 조가 진짜 살인자라는 것을 밝히게 됩니다. 법정에서 용기 있게 진실을 밝힌 톰은 마을 사람들에게 영웅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인디언 조의 복수를 두려워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얼마 후 톰과 허클베리는 보물을 찾는 또 다른 모험을 계획하게 됩니다. 그들은 마을 근처의 낡은 폐가를 탐험하다가 우연히 인디언 조와 그의 공범이 숨겨둔 보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톰은 허클베리와 함께 이 보물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오히려 인디언 조가 자신들을 발견하고 위험에 처할 뻔합니다. 이 과정에서 톰은 점점 자신의 용기와 책임감을 의식하게 됩니다. 이제 톰에게 있어 모험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고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야 하는 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 아이들과 함께 동굴로 소풍을 떠난 톰은, 자신이 좋아하는 소녀 베키와 동굴 안 깊숙이 들어갔다가 길을 잃게 됩니다. 어둠과 공포 속에서 톰은 베키를 위로하고 책임지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길을 찾아 나섭니다. 그 과정에서 톰은 우연히 인디언 조가 동굴 속에 숨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톰은 가까스로 동굴에서 탈출한 후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인디언 조는 동굴 속에 갇혀 굶어 죽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톰과 허클베리는 동굴에서 인디언 조가 숨긴 보물을 찾아내어 큰돈을 얻게 됩니다. 뜻밖의 부자가 된 톰과 허클베리는 이 보물을 나누어 갖기로 합니다. 하지만 톰은 돈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부유함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반면, 허클베리는 갑자기 얻게 된 부와 규칙적인 삶이 부담스러워 다시 방랑의 삶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톰은 그런 허클베리를 이해하며, 함께 자유롭게 살기를 제안합니다.
톰 소여의 진짜 모험은 재미를 찾는 데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한 모험으로 바뀝니다. 위 이야기에서 톰 소여는 마냥 놀기 좋아하는 무책임한 소년에서 벗어나 점점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즐거움만 추구하던 부자 같은 모습에서, 양심의 가책과 어려움 속에서 고통받는 라자로의 모습을 거쳐, 결국 진정한 의미의 삶의 가치를 깨닫고 천국 같은 내면의 평화를 얻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부자와 라자로를 연결하기 위해 오늘 복음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좀 단어의 뜻을 살펴보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부자는 좋은 것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을 받았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에 매우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ἀναπαύεται”(anapaúetai)입니다. 뜻은 “쉬다, 위로를 받다”란 뜻입니다. 라자로가 죽음 뒤에 받는 것이고, 부자는 이것을 받지 못합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샤밧’, 곧 ‘안식’, ‘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신 날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나에게 와서 안식을 얻으라.”(마태 11,28)고 하신 말씀에서 이 단어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안식은 십자가에서 오고, 안식을 찾는 이들에겐 십자가를 준다는 시스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부활의 쉼과 안식을 찾았고, 라자로는 십자가의 길을 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안식을 찾은 부자는 영원한 십자가가 준비되고,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산 라자로에게는 영원한 쉼과 안식이 마련된다는 뜻입니다.
어린 왕자는 장미꽃을 버리고 안식을 누리려다 결국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안식은 십자가 뒤에 옵니다. 그러나 사막 여유와의 관계를 통해 안식을 포기하는 법을 배웁니다. 관계를 위해 십자가 지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부자에서 라자로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참사랑을 알게 된 그는 장미꽃에게로 돌아갑니다. 비록 그것이 죽음을 의미하더라도. 그런 죽음은 부활이 예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휴식을 취하고 안식을 누리며 위로를 받으려 하면 타인을 착취하게 되고 게으르게 되어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이 세상에서 안식을 포기하면 다른 이를 편안하게 하고 위로를 주고 휴식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안식을 누리는 삶을 배우는 사람입니까, 십자가를 지는 삶을 배우는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서 숫자 40이 상징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 것인지, 벌써 위로와 안식을 살아서 십자가만 남게 할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부자와 라자로
2019년 통계청의 생활시간조사(5년마다 발표되기에 올해 2024년 생활시간조사가 발표될 것입니다)를 보면 수면과 노동시간을 제외하고 1인 가구 청년(19~34세)의 경우 하루에 3.9시간을 혼자 있지만, 노년(65세 이상)이 되면 7.6시간을 혼자 보낸다고 되어 있습니다. 중장년을 거쳐 노년으로 갈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의 경제적 빈곤 못지 않게 관계 빈곤이 이 사회에서 큰 문제가 된다고 말합니다.
혼자 있는 것이 더 편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관계의 부재로 외톨이가 되는 것은 커다란 위기감을 느끼게 합니다. 실제로 우울증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혼자 지내는 것이 편할 수도 있지만, 길게 바라보면 관계를 맺으며 사는 삶이 잘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작가의 이 말이 와닿습니다.
“나는 이 세계에 소속되어 있어요. 필요한 만큼, 그리고 분리돼 있어요.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김희경, ‘에이징솔로’ 중에서)
‘홀로’와 ‘함께’. 모두 각자에게 중요한 가치가 됩니다. 홀로 하느님과의 만남도 중요하고, 또 함께 하느님과의 만남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상처받았다고, 바쁘다고 ‘홀로’ 그 자체에 머물면서 스스로 힘든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 보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함께’만을 추구하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듣습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고, 라자로는 너무나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는 인생 역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곁으로 가고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받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유심히 볼 필요가 있는 것은 부자의 모습입니다.
부자가 악인 같습니까? 죄와 엄청나게 친한 사람이었고, 착한 마음은 전혀 없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생전에 잔치를 많이 벌인 것을 보면,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입니다. 또 거지인 라자로를 냄새나고 더럽다고 쫓아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승에 가서도 자기 형제들을 걱정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악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저승에서 고통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외되는 ‘함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친한 사람,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과의 ‘함께’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소외되는 ‘라자로’를 개들이 종기를 핥고 있을 정도로 무시하는 데도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함께’를 다시 재조정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함께’가 될 수 있도록 더 신경 써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위한 ‘홀로’는 절대 안 됩니다. 모두와 사랑을 나누는 ‘함께’를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
- 호프 자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없어질 것입니다. 천년만년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변화가 있기에 우리가 가야할 길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죽음은 그 누구의 것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라자로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픔을 위로하는 우리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명을 다시금 묵상하게 되는 사순시기입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이어지는 삶도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삶이 있음을 가르쳐주십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죽음이며 사랑의 삶을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죽음입니다. 삶과 죽음은 서로를 향해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만이 우리의 삶과 죽음을 안아주십니다. 십자가가 지나가는 시간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우리 삶을 어루만져주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라자로의 고통을 라자로의 슬픔을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이름 없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다시 돌아갈 곳이 하느님뿐임을 알고 우리의 삶이 바뀌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느님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구원하시는 위로하시는 하느님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을 함께 봉헌하는 십자가의 여정입니다. 서로의 노고와 고초를 위로하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03/21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21 |
---|---|
25/03/19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19 |
25/03/18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18 |
25/03/17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17 |
25/03/16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16 |
25/03/15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1) | 2025.03.15 |
25/03/14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3.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