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발을 그물에서 빼내 주시리니, 제 눈은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나이다. 저를 돌아보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외롭고 가련한 몸이옵니다.
하느님, 온갖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단식과 기도와 자선으로 죄를 씻게 하셨으니 진심으로 뉘우치는 저희를 굽어보시고 죄에 짓눌려 있는 저희를 언제나 자비로이 일으켜 주소서.
2025년 3월 23일 사순 제3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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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3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탈출 3,1-8ㄱㄷ.13-15)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 제 2독서
(1코린 10,1-6.10-12)
모세와 함께한 백성의 광야 생활은 우리에게 경고가 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3,1-9)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 오늘 말씀 카드
(루카 13,9)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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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3,1-8ㄱㄷ.13-15
오늘 제1독서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그 무렵
1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
2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3
모세는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저 떨기가 왜 타 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4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5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6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7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8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13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14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15
하느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
1코린 10,1-6.10-12
오늘 제2독서
모세와 함께한 백성의 광야 생활은 우리에게 경고가 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 아래 있었으며 모두 바다를 건넜습니다.
2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3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고,
4
모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5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 대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 널브러졌습니다.
6
이 일들은 우리를 위한 본보기로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악을 탐냈던 것처럼 우리는 악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10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투덜거린 것처럼 여러분은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그들은 파괴자의 손에 죽었습니다.
11
이 일들은 본보기로 그들에게 일어난 것인데, 세상 종말에 다다른 우리에게 경고가 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12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신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루카 13,1-9
오늘 복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1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5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6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3월 23일
이병철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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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갈릴래아 사람들의 죽음을 예수님께 알리면서, 자신들은 그런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자신이 벌을 받지 않으면 죄인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러한 논리로 자신들의 죄를 뉘우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보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루카 13,5 참조) 더욱 강하게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회개를 참회의 차원에서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때에만 회개할 필요를 느끼는 것입니다. 회개를 이렇게 생각한다면 당연히 분명한 죄를 지을 때까지 회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인과 회개가 무엇을 뜻하는지 따져 보아야 합니다. 죄인의 개념은 인간이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태어날 때부터 죄에 묶여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회개는 모든 인간이 당신과 친교를 맺도록 부르시는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악을 피하고 하느님을 향하여 자기 생활 전체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앞에서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5,32)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신들이 죄인임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과 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절박함을 봅니다. 자신이 거름을 줄 테니 한 해만 더 기다려 보자고 주인에게 부탁하는 포도 재배인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8,13)라고 고백하기를 기다리십니다.
.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육신은 무너져도 영적으로 하느님 앞에 서 있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이 말씀은 빌라도에게 살해당한 사람들과 실로암 탑이 무너져 죽은 사람들과 그 사건을 두고 하신 말씀인데 오늘 주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그처럼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모두.
이 말씀에 우리는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다 그처럼 멸망할 것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왜 다 죽지 않고 몇 명만 죽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실상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 죄인이고 다 죽어야 하고 그래서 다 회개해야 하는데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며 그가 진짜 죄인이고 더 죄인이지요.
사실 죄인이라고 그래서 자기는 회개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회개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회개로 상당히 가까이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까이 나아갔어도 자기는 아직 죄인이라고 할 터인데 성인들은 다 이렇고 사실 성인들에겐 회개하라는 촉구나 경고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려고 하지 않는 죄인들에게나 촉구와 경고가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모세와 주님을 보내셨다고 오늘 전례는 얘기합니다.
그런데 모세와 주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시어 말로써 회개를 촉구하고 경고하신 것은 사랑의 표시이니 문제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끔찍스럽게 생각하는 그 사건들도 하느님 경고라고 오늘 전례가 얘기하는 점입니다. 말로는 안 되니 끔찍한 일을 통해 하느님께서 경고하시는 거라고 얘기하잖습니까?
오늘 바오로 사도는 두 번째 독서에서 모세의 인도를 받아서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사람 중에 주님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들이 광야에서 살해되어 널브진 일들을 얘기하며 이렇게 그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일들은 본보기로 그들에게 일어난 것인데, 세상 종말에 다다른 우리에게 경고가 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어쨌거나 이런 경고를 받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살이나 타살 곧 인간에 의한 죽음이 아닌 한 그 죽음을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경고 곧 하느님의 경고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죽음을 하느님의 경고로 받아들이고 회개까지 하면 신앙인이고, 그것을 보고도 아무런 경고를 받지도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이 비신앙인이겠지요..
그리고 더 나아가 자비도 경고도 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일만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일도 하느님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그 어떤 것에서도 하느님의 표징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주님께서는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베어버리시려는 하느님께 열매를 맺도록 신이 노력할 테니 말미를 주십사고 청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회개의 열매를 맺도록 온 정성을 쏟으시는데 그러면 우리가 맺어야 할 회개의 열매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세상 종말에 다다른 사람으로서 하느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자기 죽음이 가까이 오는데도 하느님 앞에 서려고 하지 않고, 여전히 사람들 앞에 서 있거나 죽음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이제라도 하느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제가 나이를 먹으면서 새삼 마음에 와닿는 기도가 성모송이고, “천주의 성모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빌어주소서.” 부분입니다. 그리고 오늘 바오로 사도가 하신 말씀도 마음에 새깁니다.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목포 삼호성당 사순특강
오늘은 사순 제3주일입니다. 오늘 ‘사순 특강’은 다른 특별한 것을 보기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회개”의 뜻을 오늘 <말씀전례>를 통해 좀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여러 고을을 들러 가르치실 때의 있었던 일을 전해줍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4.)
여기서, “회개”가 강조됩니다. 사실, ‘회개’란 먼저 “죄”를 지었음을 알아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갈릴래야 사람들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고, 왜 그것을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대체 ‘회개’란 무엇을 말하며, ‘죄’란 무엇을 말할까요?
오늘 <제1독서>는 이를 밝혀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제1독서>의 맥락 안에서 ‘죄의 본질’과 ‘회개의 본질’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먼저, ‘죄’란 무엇을 말하는가? 대체무엇이 죄인가?
<성경>에서 ‘죄’는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지의 죄’이고 <또 하나>는 ‘망각의 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무지의 죄’를 깨우쳐줍니다. 곧 ‘하느님을 모르는 죄’입니다.
사실, <탈출기>에서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시기 전까지는 그들은 하느님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성조들과의 약속을 맺으신 하느님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아직 그 후손들과는 인격적인 만남이 없었고 그들은 하느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미디안으로 도피해서 양을 치고 있을 때, 호렙 산에서 나타나신 하느님께서는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한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탈출 3,4)
(얼마나 놀랬을까? 불안하고 두려운 살 떨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모세인 줄을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피하여 도망해 온 이곳에서, 일종의 수배자 신세인 자신을 아는 이가 있다니! 더구나,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5)니, 참으로 황당하고 기절초풍할 일이 아닌가? 이 귀양지가 무슨 거룩한 곳이라니, 말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6). 그러니 그분은 아직 성조들의 하느님이실 뿐, 그 후손들과는 직접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곧 그들은 아직 하느님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가려고 내려왔다.’(탈출 3,7-8)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탈출 3,15)
여기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우선 세 가지를 밝혀줍니다. <첫째>는 하느님은 없는 허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재 하신 분’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이방인들의 신처럼 이름의 한계 안에 갇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무한하신 분’이라는 것이요, <셋째>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하느님으로 ‘늘 계시는 분’임과 동시에 ‘장차 보게 될 분’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실재로 파라오에게 행한 열 재앙을 통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시고, 또한 홍해를 건네는 탈출을 통해 당신께서 구원자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시고 체험시켜주십니다. 나아가, 손을 잡아 붙들어 주시고 계약을 맺으시고 함께 동행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그들은 하느님을 알게 되고, ‘무지의 죄’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이미 체험하고 알게 된 그분을 끊임없이 망각하고 배신합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이들 중에서는 칼렙과 여호수아만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고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 역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졌으며, 마침내는 이방민족들처럼 왕을 세우고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떠나갔으며, ‘망각의 죄’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는 <제1독서>의 ‘하느님 이름의 계시’를 통해 알아들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대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 신비는 다름 아닌, ‘주 하느님께서 저희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저희와 함께 계시며, 저희에게 호의와 자비를 보이시며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치 하느님의 신비를 간직하게 된 모세가 더 이상 자기 스스로 행동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자신의 몸을 하느님께 맡겼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섬기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라는 바위에서 영적 양식과 음료를 마시고 그리스도인이 된 ‘코린토인들’에게. 조상들이 모세와 함께 바다를 건너는 세례를 입고 구원자이신 주 하느님을 알게 되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으나 또 다시 광야에서 하느님을 망각하고 죄를 지어 죽어 널브러졌던 사실을 본보기로 주었음을 환기시키며, 종말에 다다르기까지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4.)
이는 우리가 멸망하게 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죄가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곧 그것은 하느님께서 ‘구원자 주님’이심을 모르는 ‘무지의 죄’와 그것을 알고도 무시하고 배척했고 거부한 ‘망각한 죄’임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인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갈릴래아에서 맨 처음으로 ‘복음’을 선포하실 때 동시에,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회개란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회개’란 ‘믿는 일’입니다. 곧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는 일인가? 그것은 우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기쁜 소식)’은 무엇인가?
바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곧 ‘우리를 구원하신 주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왜, 이 선포가 ‘복음’(기쁜 소식)이 되는가?
그것은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이나 세상이 다스리는 나라, 곧 죄와 속박으로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에덴에서 벌어진 축복(원복)의 상태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세상의 죄와 압제로부터의 ‘해방의 기쁜 소식’임과 동시에 그 ‘축복의 기쁜 소식’입니다.
여기서, “가까이 왔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손아귀 안에 있다. 손에 들려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손에 들려 예수님과 함께 왔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었습니다. 혁명적인 전환을 촉구하는 선언이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메시아와 메시아가 가져올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고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메시아 대망사상’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제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당시의 선구자들은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그 ‘하느님 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선언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이 아니고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선언은 그 나라를 들고 온 예수님 당신 자신이 ‘메시아’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니 바로 당신을 구원자 메시아로 믿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이 ‘복음(기쁜 소식)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 곧 ‘예수님이 구원자 주 하느님이요, 동시에 당신 손에 들려 함께 가져온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기쁜 소식(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믿지 않았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은 윤리적인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믿지 않고,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거나 망각하게 되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 “복음”이 이루어졌음을 믿는 이들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도들의 복음’을 믿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결국, “회개”란 무지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옴을 말합니다. 그것은 ‘내면적, 정신적 뉘우침’과 ‘행위의 실천적 돌아옴’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단순한 죄의 인식이나 자기 성찰 혹은 자기반성, 또는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 상태’나 ‘죄의 진공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그 다스림으로 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6-8절)는 ‘시급히 회개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는 회개한 자에 합당한 행동과 생활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과수원 주인이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잘라내라고 하자, 과수원 재배인은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루카 13,8)
그렇습니다. 범한 죄로 본다면, 저희는 이미 뽑혀도 수백 번 뽑혀지고 말았을 ‘열매 맺지 않는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여기 ‘주님의 정원에 심겨져 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다는 표시요, 자비를 입고 있다는 표시요, 또한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희망하고 기다려주고 믿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우리 주님께서는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우리의 둘레를 파고 축복과 말씀의 거름을 주시며, 열매 맺도록 기다리고 돌보고 희망하시고 계십니다.
하오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님! 오늘 저희가 뉘우치고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당신의 그 크신 사랑을 망각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 사랑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그 사랑을 베풀며 증거 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3,8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당신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며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회개로 가지게 되는 열매: 사람들과 섞이는 게 힘들다면?
‘회개’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종종 단순하게 죄에서 돌아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회개는 단순히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세상과의 관계를 깊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회개에 대해 말씀하시며 포도밭에 심어진 무화과나무 한 그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한 그루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 열매가 있어야 다른 포도나무들과 섞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 ‘거름’을 한 해 더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거름으로 우리 안에 사람들과 섞이게 만드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체코 단편영화 ‘다리’(Most)의 줄거리입니다. 영화의 무대는 체코의 한적한 강가 주변입니다. 주인공인 아버지는 강 위로 지나는 기차가 안전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도록, 다리를 들어 올리고 내리는 일을 하는 교량 관리원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아내와 헤어져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고, 아들에 대한 사랑은 각별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기어 장치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언제 다리를 들어올려야 하고 언제 내려야 하는지를 상세히 알려줍니다. 둘은 함께 점심도 먹고, 때로는 관리실 밖으로 나가 강가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시각, 기차 안에는 여러 승객이 타고 있는데, 그중에는 마약에 중독된 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아직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지만, 삶에 지쳐 보이고 눈빛이 불안정합니다. 인생에 낙이 없는 듯, 우울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 주변 사람들과 대화도 없습니다. 그녀가 탄 기차는 빨간 불 신호를 무시하고 배가 통과하게 하려고 들어 올린 다리를 향해 돌진합니다. 이런 상태라면 기차에 탄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일을 보고 있고, 이에 아들은 수동으로 다리를 내리려 다리로 올라갑니다.
그 순간, 관리실 창밖을 내다보던 아버지는 아들이 다리 하부 기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더 큰 문제는 아들이 실수로 발을 헛디뎌 기어 장치 틈새에 끼인 듯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순식간에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만약 지금 레버를 내려 다리를 닫는다면 기차는 구출될 것이지만, 아들은 기어에 깔려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다리를 올린 채 둔다면, 기차는 강으로 추락해 승객 전원이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치열한 번뇌 속에서 아버지는 레버를 잡고 손을 떨며 주저합니다. 하지만 결국 수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레버를 힘껏 내리며, 다리를 닫습니다. 굉음과 함께 기어 장치가 돌아가며 다리가 내려오는 순간, 아들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창을 통해 아들이 끼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무너집니다.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떨구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의 희생 속에 다리가 정상적으로 내려지고, 기차는 안전하게 지나가 버립니다.
아버지는 관리실 창문을 붙잡고 창백한 얼굴로 기차가 지나가는 광경을 바라봅니다. 승객들은 자신들이 구조된 사실도, 열차가 위험했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웃고 떠들며 일상으로 향해 갑니다. 누군가는 신문을 보고 있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던 마약 중독 여성은 잠시 창밖을 보다가, 아버지와 눈이 마주칩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비통한 얼굴과 절규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 일어났다는 예감에, 그녀는 순간 두려움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기차는 이미 속도를 내어 곧 시야에서 사라지고, 아버지는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리며 쓰러집니다.
영화의 후반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의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화면에는 활기찬 도심의 거리나 기차역 풍경이 지나가고, 그동안 세월이 어느 정도 흘렀음을 암시합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큰 상실감에 잠겨 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려 애씁니다. 그는 아들을 잃은 죄책감과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타인을 살리기 위해 치른 희생이라는 사실이 그를 이끌어주기도 합니다.
한편, 어느 날 거리에서 한 젊은 여인이 아버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날 기차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마약 중독 여성이었습니다. 예전과 달리, 그녀는 말끔한 옷차림에 밝은 얼굴로 서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의 손에는 아기가 안겨 있습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 그녀를 유심히 바라봅니다. 그녀도 아버지를 발견하고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짓습니다. 그리고 이내 따뜻하고 감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미소를 보냅니다. 그녀가 더는 마약을 하지 않음을 암시하는 평온한 모습과 부모의 책임을 다하려는 듯한 태도가 아버지 눈에 들어옵니다. 화면 너머로 알게 되듯이, 이 여성은 그날 기차가 강 위를 지날 때, 누군가 자신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렀음을 어렴풋이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불만에 찬 자기 행동을 후회하고 그 누군가의 희생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비록 아들을 잃었으나, 그 희생으로 인해 어떤 이는 삶을 되찾고 관계의 확장으로 나아갔음을 직접 확인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긴 시간 그를 짓눌렀던 슬픔이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자신이 베푼 희생이 절대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사람과 섞이지 못하게 만드는 게 무엇일까요? 바로 ‘교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 교만은 무엇에 의해 사라집니까? 바로 실로암 탑이 무너지면서였습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란 뜻입니다. 탑은 교만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파견된 그리스도의 교만이 무너진 순종으로 우리 안의 교만이 죽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거름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죽음으로 거름을 주십니다. 그것으로 우리 교만이 죽습니다. 저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으로 교만이 죽어 눈물로 빠져나옴을 경험했습니다. 이때 세상에서 내가 가장 큰 죄인으로 느껴졌고 비로소 신학생들과 섞이기 시작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그럼 주님, 제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 드릴 수 있을까요?”라고 묻습니다. 저에게는 당신께 붙어있으라고만 하셨습니다. 위 이야기에서 마약을 하던 여자 청년은 자기가 하던 잘못에서 돌아섰습니다. 주님의 희생에 자기 피를 섞은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주님의 희생에 내 피를 섞을 수 있어야 합니다.
김희아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얼굴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모반이 지워지도록 손으로 문지르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더 슬프게 울고 계신 것을 봅니다. 그녀는 이렇게 결심을 말씀드립니다.
“제가 다시는 얼굴 때문에 하느님을 슬프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하느님께서 제 모습 때문에 기뻐서 눈물을 흘리게 해드리겠습니다. 하느님 죄송합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림, 곧 그분의 제물에 나의 피를 쏟아야 합니다. 이것이 십일조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에 대해 아브라함도 십일조를 내려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사제가 바치는 빵과 포도주에 우리 피가 섞여야 하는데 그것이 십일조입니다. 하느님께 먼저 내어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내어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이 무언가를 나에게 해 주어서가 아니라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 때문입니다. 이 겸손과 감사, 희생의 열매가 없다면 하느님 나라 포도밭에 머무는 사람들과 섞이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잘려져 불 속에 던져진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2023년 1월 16일 자로 발령받은 저는 갑곶성지를 떠나 지금의 성김대건성당으로 둥지를 틀게 되었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외출을 나갔다가 성당에 들어오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성당으로 들어오는 도로를 못 찾아서 헤맬 때가 많았고, 걸어서 물건을 사러 근처 가게에 갔다가 성당 방향이 아닌 정반대로 간 적도 있었습니다. 건물이나 길이 다 비슷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길눈이 어둡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길치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길을 잃어버리지도 않고, 길이 헷갈리지도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많이 다녔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현재 위치를 잘 몰라도 주위의 풍경, 개략적인 지형도를 알고 있기에 손쉽게 성당을 찾아가게 됩니다.
주님께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직 그 길이 낯설기 때문입니다. 길을 알기 위해서는 주변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주위를 보고 많이 알아가야 주님께 가는 길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와 묵상을 게을리하지 않고, 무엇보다 사랑하며 살아가야 주님께 가는 길을 훤하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알지 못한다고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요? 불평불만만을 반복하면서, 주님께 가는 길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 가는 길은 낯설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 그 길을 가려는 우리의 사랑 담긴 노력으로 훤하게 알 수 있게 되면서, 그 안에서 큰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사시던 시대에는 인간의 죽음을 삶의 결과로 보고 있었습니다(지금도 비슷합니다). 만약 불행하게 죽으면 그들이 지은 죄 때문이고, 편안하게 죽으면 선행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성전에서 학살 것을, 또 실로암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사람들을 죄의 결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죄의 결과로 죽은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하신 것입니다.
죽음의 원인과 책임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 지금 이 순간 회개가 필요함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죽음을 통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지금 회개하면서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그 길에 들어서게 되고 주님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기다림이 영원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맞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미뤄서는 안 되고, 지금 당장 들어서야 합니다.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회개해서 영원한 삶을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너희의 사상과 느낌 뒤에는 더욱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아’다.
- 프리드리히 니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포기할 수 없는 회개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오늘 이시간은 회개를 위한 실천의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교만입니다.
교만과 착각을 무너뜨리는 회개입니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회개입니다. 독단과 편견 아집에서 벗어나는 회개입니다. 회개가 깊어지면 사랑도 깊어집니다. 우리의 회개는 생활의 참모습으로 드러납니다.
회개로 이끄는 회개의 만남이 가장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새로운 삶의 변화는 회개로 시작됩니다. 실천의 열매가 참된 열매입니다.
이제 우리의 실천만이 남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회개로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회개는 실천이며 실천은 생활이며 생활은 신앙으로 아름답습니다.
회개의 열매는 생활의 변화 생활의 열매입니다. 이 사순시기가 서로를 살리는 참된 회개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회개는 올바른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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