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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12/04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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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지체하지 않고 오시어, 어둠 속에 숨은 것을 밝히시고, 모든 민족들 앞에 당신을 드러내시리라.

주 하느님, 주님의 권능으로 저희가 마음을 가다듬어 성자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자격을 갖추고 성자께서 베푸시는 천상 잔치에 들게 하소서.

2024년 12월 4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2월 4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2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25,6-10ㄱ)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잔치를 베푸시고 그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신다.

  • 오늘 복음
    (마태 15,29-37)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 오늘 말씀 카드
    (마태 15,3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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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25,6-10ㄱ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잔치를 베푸시고 그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신다.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보라, 당신 백성 구원하러 주님이 오시리니 주님을 맞이하러 달려가는 이는 복되어라.

 

 

마태 15,29-37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그때에 

29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30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31 
그리하여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3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33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4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36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3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2월 4일
김현균 야고보 신부

 

✚ 교황님 12월 기도지향 00:23

✚ 미사시작 00:41

✚ 강론시작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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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우리도 ‘군중’이 되어 보면 어떨까요?

“저 군중이 가엾구나”(마태 15,32).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으로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15,30)을 고쳐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굶주림까지도 해결해 주시고자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을 향한 사랑과 애정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에서 일으키신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이는 바로 ‘군중’이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15,30).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이 가장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갈 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넘치는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그 사랑을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한 이들에게만이 아니라 그들을 데려간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빵의 기적’은 치유 기적을 체험한 이들만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모든 사람, 바로 ‘군중’을 위하여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산으로 오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어 주실 은총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이사 25,8). 그리고 이 말씀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셨습니다.

대림 시기 동안 우리도 ‘군중’이 되어 보면 어떨까요? 하느님의 은총이 가장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갈 때,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은 은총이 필요한 그들과, 우리 모두에게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며 죽음을 없애 주신 구원’을 체험시켜 줄 것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산을 오르는 이유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오늘도 어제 그제와 마찬가지 구조입니다. 독서 이사야서의 예언이 복음의 예수님에 의해 실현되는 구조입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산 위에서 잔치를 베푸실 거라는 이사야 예언대로 복음의 주님께서 산 위에서 사천 명을 위한 잔치를 베푸십니다.

그런데 눈치채셨겠지만 이 잔치는 등산객들의 술판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거한 파티를 즐기는 이들의 잔치도 아닙니다.

이사야서도 그렇고 복음도 그런데 이 산 위에 오를 이들은 모두 다리 절고 눈멀고 말 못하는 불구자들이며 그래서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과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사실 건강하고 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이 굳이 산에 오르진 않을 것입니다. 불구자들과 불구로 인해 수치와 설움을 당하는 이들이나 산 위에서 치유와 위로와 구원을 받기 위해 오를 것입니다.

“이 산 위에서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주시리라.”

이제 이해가 됩니다. 왜 주님께서 다리 저는 이들을 산에 오르게 하시는지. 평지도 걷기 힘든데 다리 저는 이들이 왜 산을 오르는지. 왜 앞을 못 보는 이들을 주님께서 산에 오르게 하시는지. 도우미 없으면 오를 수 없는 산을 왜 맹인들이 오르는지.

이 산을 오르게 하는 것은 성한 다리가 아닙니다. 이 산을 오르게 하는 것은 올라야만 할 필요이고, 오르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다리가 성해 이 세상 여기저기 신나게 구경 다니고 싸돌아다니느라 산에 가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우리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

“대림시기”는 자신의 ‘간절한 갈망’과 마주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프고 어두웠던 암흑의 군사독재 시절에 ‘김지하’ 시인은 그 간절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메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금관의 예수)


오늘 <복음>에는 ‘간절한 갈망’으로 목마른 이들, 곧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 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산 위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마태 15,30 참조). 

이들은 자신의 갈망을 품고, 더러는 스스로 올라오지도 못해 이끌려와 예수님의 다가왔지만,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불어 넣으십니다. 

그들의 질병을 치료하시고,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고쳐주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못 다한 말도 다 들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이르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군중은 치유는 받았지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치유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마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맞은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줄 뿐만 아니라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루카 10,35)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깊고 깊은 ‘사랑의 신비’를 깊이 새겨야 할 일입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먹이시고, 미처 바라지도 못했는데도 이미 용서하시고, 뒷날까지도 가엷게 여기시는 그 저린 마음의 사랑을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오히려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을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걱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그러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마태 15,34-35)

그렇습니다. “빵”은 ‘이미’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사실’, 곧 우리 가운데 빵이 있다는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일깨워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빵 “일곱 개”는 완전함의 숫자요, 거기에 더하여 ‘물고기’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도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찰”(마태 15,37) 정도였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가진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알고’있지만,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의 가치를 ‘찾는 사람’, 곧 “참된 빵”이신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진정한 순례자요 대림의 길을 걷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광야”에 있지만, 방황하는 이가 아니라 ‘이미 찾은’, ‘이미 와 있는’ 빛을 따라 길을 걷는 순례자로서,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5,32
저 군중이 가엽구나.

 

주님!
당신은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말마저도 다 들으시니,

제 안에 당신이 새겨준
가엾이 보는 마음을 드러내시어, 
제 마음이 당신 마음 되게 하소서. 

그 마음으로 약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가 당신 마음에 들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선악과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에 사용된다.

오늘 봉헌에서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에서 당신을 따르던 이들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배고프게 돌려보내서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그들을 먹이려고 하십니다. 이를 위해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의 빵이 없었으면 기적을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그분은 마치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처럼 그럴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도 무언가 요구하시는 이유를 알아야만 합니다. 

중국 소설 『나는 남편을 파산시키려고 매일 열심히 일한다』는 자기 삶이 미리 정해졌다고 믿는 여성 린멍(Lin Meng)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부유하고 헌신적인 남자인 그녀의 남편은 더 큰 성공을 거둔 후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게 될 운명입니다. 린멍이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린멍은 그래서 남편의 사업을 망하게 하려고 결심합니다. 

그녀는 남편의 돈으로 실패한 엔터테인먼트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값비싼 직원을 고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남편의 자원을 고갈시킬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녀의 행동에 저항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그녀의 새로운 노력과 꿈을 지원합니다. 남편을 파산시키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는 동안 예상치 못한 성공이 뒤따릅니다. 그녀가 자금을 조달한 영화는 실패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대 히트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쇼를 위해 고용한 값비싼 유명인은 기록적인 시청률을 기록합니다. 그녀의 가장 무모한 사업 결정조차도 예상치 못한 이익을 가져옵니다. 그녀의 노력은 파멸을 초래하기는커녕 자신만의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운명의 희생자가 아니라 남편의 그늘을 넘어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남편도 아내인 린멍을 더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더욱 신뢰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를 단순히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라 엄청난 힘과 비전을 지닌 파트너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왜 요구하셨을까요? 단순히 당신에게 받은 것에 감사하기만을 위하셨을까요? 아닙니다. 본래 그들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어야 했습니다. 그 일에 그들이 봉헌한 것이 쓰여 자신들도 하느님의 일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하느님도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도 신학생 때 유학을 다녀오고는 공부가 쉽지 않음을 알고 신부가 되었을 때 다시 유학 가라고 하셨을 때는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느낍니다. 주교님이 저에게 있는 무언가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상호 존중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내가 그분을 위해 아무것도 봉헌하지 않는다면 본당에 나가 본당신부를 하였어도 크게 고마워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물론 저 자신도 그분께 합당한 사제가 아니라고 여겨 적당히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인간의 죄를 위해 모든 보속을 해야 더 완전하겠지만 예수님은 당신 혼자 모든 것을 이루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명확하게 예수님의 보속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 수난의 부족한 부분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골로 1,24)

저는 신자들에게 봉헌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그 봉헌된 것으로 신자들에게 다시 돌려줘 그것으로 선교할 자금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소공동체에 돌려줘 가정방문 할 때 선물을 사라고 하고 가두 선교할 때도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봉사하는 그분들이 낸 교무금과 헌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신자들을 존경하게 되고 신자들도 본당 신부에 합당한 신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1849년 세관의 검사관으로 일하던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해고당했습니다. 아내는 오히려 기뻐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당신이 좋아하는 문학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네요. 아마 이 해고가 당신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그리고 아내는 현금 뭉치가 든 작은 가방을 가져와 꺼내 놓으며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혹시나 해서 당신 봉급에서 지금까지 따로 마련해 놓았어요. 당신이 글을 쓸 동안 우리는 이 돈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 남편의 이름은 너새니얼 호손이고 그가 그렇게 해서 쓴 소설이 유명한 ‘주홍글씨’입니다. ‘주홍글씨’나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위대한 소설을 집필하게 된 것에 어떤 누구도 호손이 자기 능력만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영광은 아내와 함께 받아야 정당할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무엇을 이루어냈을 때 그것이 누구의 공로인지 정확히 나눌 수 없습니다. 다만 두 사람이 함께 같은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부부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몇 년 전, 우연히 길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습니다. 친구가 “와~ 정말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라고 묻습니다. 이 말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럼 잘 지내지. 너는 어때?”라고 말했습니다. 그 친구도 “나도 좋지. 너 좋아 보인다.”라고 인정해 주었고, 다음에 만나서 못 나눈 이야기를 나누자고 약속하면서 헤어졌습니다. 이 친구와의 만남 뒤에 그 짧은 대화가 계속 기억났습니다. ‘정말로 잘 지내고 있는가?’라는 물음 때문입니다. 
 
사실 당시에 그렇게 잘 지내지 못할 때였습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또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심적으로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잘 지낸다”라고 말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싶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약한 모습이 아닌 강한 모습만 보여주려는 마음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냥 습관적으로 나온 말일까요? 
 
우리는 자기를 숨기려는 마음이 일차적인 것 같습니다. 특히 자기의 약하고 부족한 모습은 절대로 보여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허세로 가득 차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를 숨길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나약한 ‘나’ 자신이었습니다. 
 
사람에게 보여주기 싫은 모습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계심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나’를 고백하면서 그분께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받아주시는 주님께 솔직하게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자리를 잡자 많은 군중이 몰려듭니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 불구자들, 말 못 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당시에는 상선벌악과 인과관계의 원칙을 내세워서 병을 죄의 결과로 보는 모습이 가득했습니다. 따라서 병이 있어도 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집 안에만 갇혀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 앞으로 다가옵니다. 주님께 굳은 믿음을 가지고 솔직하게 자기를 내려놓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말 못 하는 이들이 말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께 굳은 마음으로 솔직하게 자기를 내려놓는 사람이 커다란 은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그냥 되돌아가게 하지 않으십니다. 빵의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배고파서 되돌아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를 것을 걱정하시면서 말이지요. 
 
병의 치유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그 이상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솔직하게 주님 앞에 자기를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친해졌고 가까워졌고, 익숙해졌다. 그리고, 딱 그만큼 미안함은 사소해졌고 고마움은 흐릿해졌다.

-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하늘 아래 있어서는 안될 일이 우리에게 다시 일어났습니다. 간밤에 우리는 모두 간절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시대정신에 한참 뒤떨어진 진풍경을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단 한 번도 빵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어리석게도 자기 스스로를 몰락으로 몰고 갑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권력에도 끌려다니지 않으십니다. 목숨을 내놓지는 못할지언정 목숨을 위협하는 뻔뻔한 작태를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됩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끝나는 어리석은 거짓의 삶입니다. 행복과 평화를 만드는 빵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 가르쳐 주십니다.

가치와 양심으로 돌아가야 할 생명의 대림시기입니다.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썩어 있는 빵은 결코 모두를 배불리 먹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새롭게 하는 생명의 빵은 오늘도 자신의 목숨을 우리에게 내놓습니다. 우리에게는 다시 뜨겁게 살아야 할 생명의 빵이 있습니다.

생명의 빵에서 출발하는 희망의 새날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생명의 빵은 평화를 망가뜨리지 않습니다. 평화를 되살려 우리에게 주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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