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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12/05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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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은 가까이 계시나이다. 당신 계명은 모두 진리이옵니다. 당신이 영원하시기에, 일찍이 저는 당신의 가르침을 깨달았나이다.

주님, 주님의 권능을 떨치시고 그 크신 힘으로 저희를 도우시어 자비로운 은총으로 저희 죄를 없애시고 어서 저희를 구원해 주소서.

2024년 12월 5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2월 5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2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26,1-6)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간다.

  • 오늘 복음
    (마태 7,21.24-27)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 오늘 말씀 카드
    (이사 26,4)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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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26,1-6
오늘 제1독서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간다.


그날 유다 땅에서는 이러한 노래가 불리리라.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마태 7,21.24-27
오늘 복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2월 5일
채수민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 교황님 12월 기도지향 00:24

✚ 미사시작 00:41

✚ 강론시작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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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기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기준은 명확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예수님 말씀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믿음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줍니다.

그렇다면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7,22-23). 

이 말씀을 살펴보면, 하느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과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가 사라진 봉사,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였지만 정작 함께하는 사람들과 이루는 친목만이 전부인 모임들, 자기 뜻을 이루고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만족을 채우려는 많은 활동,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을 잃어버린 아주 분주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먼저 기도하십시오. 성체 앞에 머물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마련하십시오. 기도와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알려 주는 힘을 반드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봉사와 활동을 하십시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7,24)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활동과 봉사가 여러분을 하느님 나라로 이끄는 힘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먼저 행복하고 같이 행복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시는 주님 말씀은 내 말을 안 들으면 쥐뿔도 없고 잘 들어야 떡 한 조각이라도 주겠다는 우리 인간적인 처사와 같은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내 맘에 들고 안 들고’가 하늘나라 입국의 기준인가 그 말입니다. 그럴 분이 아니고 그러니 그럴 리 없지요.

주님께서는 당신 좋도록 아버지 말씀 들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선 당신 말 들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당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오심과 함께 아버지의 나라 곧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공생활 제1성으로 말씀하셨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까?

사실 하느님의 나라 곧 아버지의 나라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만 들어갈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은 너무도 당연하고 그러니 누가 하느님 나라 백성이라면 아버지 뜻의 완수가 그의 목표요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너무도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관건은 무엇이 아버지 뜻인가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우리가 모두 행복해지는 것이고,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의지)은 호의(好意)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는 아무런 악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 악의가 있다는 것은 모순이지요. 사랑이신 하느님의 호의에 따라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서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아버지의 좋으신 뜻이고 이런 사람에게 성문이 열리고, 이렇게 성문을 열고 들어갈 때 다른 사람도 그리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같이 들어가게 하는 겁니다. 자기만 들어가고 성문을 닫아버리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모두 이래야 하지만 수도자는 그중에서도 더더욱 이래야 합니다. 수도자란 보물이 묻힌 밭을 먼저 발견하고 사는 상인처럼 행복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를 다른 사람보다 먼저 발견하고 소유한 사람(선취자)입니다.

그리고 자기만 오르고 사다리를 걷어차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기만 소유하지 않고 공동으로 소유하기 위해 하느님 나라를 다른 사람에게도 가능한 많이 전하는 사람(증거자)입니다.

여기서 자문합니다.

말로만 ‘주님, 주님!’ 하지 않고 실제로 주님 말씀 실천합니까?

그래서 사랑합니까?

그래서 행복합니까?

그리고 증거합니까?

먼저 행복하고 같이 행복한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다스려지는 나라

우리는 외형의 집인 가정 혹은 수도원을 ‘육신이 거처하는 집’으로, 그리고 하느님을 ‘마음이 거처하는 집’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의 육신이 거주하는 “성읍”에 대한 이야기이고, <복음>은 마음의 “집”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과 ‘집’이 세워진 기초, 곧 “반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 26,1-4)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고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1)

<독서>에서는 “하느님이 영원한 반석”이라 하고, <복음>에서는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위에 집을 지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이란 영원한 반석’ 위에 집을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실행’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버지의 뜻”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분을 직접 보고 들은 분, ‘그분의 뜻’을 받들어 그분으로부터 오신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배우고 그 실행방법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시고,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8) 라고 말씀시고, 온몸을 바쳐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놓음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혹 어떤 것이 ‘아버지의 뜻’인지 잘 모를 때는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자신을 내어놓는 쪽, 곧 자신이 손해 보는 쪽을 택하면 될 일입니다. 곧 “십자가”가 있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어리석음과 무력함을 택하는 일, 곧 이해되지 않아도 먼저 용서하고, 오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고, 부당함을 당하고도 그를 감싸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하루 제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양식으로 삼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게 하소서!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7,21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

 

주님!
오늘 하루 ‘아버지의 뜻’이 
저희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않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이해되지 않아도 감싸 안고, 
곡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알고
오로지 ‘당신 뜻’의 실행을 
양식으로 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믿음만으로?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실천하지 않으면 믿음도 무너진다.

어제 꿈을 꾸었습니다. 축구선수 메시와 함께 산속 어딘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즐거운 상태였습니다. 깊은 계곡물을 발견했고 각자 수영을 즐겼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들어갈 수 없는 깊은 물이었습니다. 두려움 없이 반대쪽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는 방향 쪽에서 뱀이 둬 마리가 헤엄쳐서 오고 있었습니다. 

피할 수는 없는 상황이고 해서 ‘그냥 지나쳐 가줘라!’하는 마음으로 그 옆으로 비켜섰습니다. 그러나 그 뱀들은 여지없이 저를 공격했습니다. 팔로 막아 팔을 두 군데 물렸습니다. ‘빨리 독을 빼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잠에서 깼습니다. 

사제가 그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꿈을 꾸면 꿈 해석을 찾아봅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어서, 꿈은 나의 무의식의 표현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뱀에 손을 물리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고 무언가를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새해 첫날에는 저희가 주교좌 성당이라 주교님들과 교구청, 대리구청에 근무하는 사제들이 다 오니까 좀 부담되는 날이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긴장되거나 하지는 않는데 ‘그것 때문인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하다 보니 깊은 계곡물도, 지나가는 뱀에 물리는 것도 예전보다는 덜 무서워하고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뱀에 물렸을 때는 두렵기도 하였지만, 심한 두려움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아직 믿음이 많지 않고, 앞으로는 뱀에 물려도 죽지 않는 존재라는 믿음,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함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어떻게 키워갈까요? 성경 읽고 성체 영하면 믿음이 증가할까요?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그 믿음으로 살아내면서 그 믿음이 확고해지고 증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에도 계속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라는 말을 속으로 되뇝니다. 예수님의 따듯한 심장을 갖는 게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성체를 영해서 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었다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실천에서 이 믿음이 증거되지 않으면 내가 완전히 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계속 실천으로 믿음을 확고하게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신교에서 주장하듯 믿음만으로 구원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이 “주님, 주님!”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신앙입니다. 믿음과 실천은 손수레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하나가 없으면 바퀴 빠진 손수레처럼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의 사울 왕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지만, 그의 불순종은 그의 기초가 취약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의 위기감이 치솟자 자신이 제사를 지냈습니다. 주님을 부르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는 ‘불순종의 행위’였습니다. 믿음은 있었으니 실천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왕직을 박탈당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위험이 닥치면 무너집니다. 믿음만을 강조하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에 다른 성당의 어떤 신자분이 오셔서 상담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모르는 분이라 없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교구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그렇게 유명할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분은 미사 때 맨 앞에 앉고 기도도 오래 합니다. 그러나 행동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 성당에서는 어떤 봉사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내가 그분에게 아무 할 말도 없다는 것을 거짓말로 여기고는 그럼 자신도 할 얘기가 없다며 나가버리셨습니다. 본인이 먼저 면담하자고 해놓고. 그분은 적어도 아주 조금은 자신이 유명한 인물이라는 믿음이 저를 통해 줄어들게 되었을 것입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그렇게 조금씩 허물어져 갑니다. 

반면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나 코리텐 붐 여사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은 죽기 싫어하는 사람을 대신하여 자신이 죽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보통 인간은 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그 행위를 통해 콜베 신부님은 당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용서하기 싫은 원수를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용서할 때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확고해집니다. 

행동이 예수님처럼 되지 않으면 베드로는 결코 예수님처럼 완전하게 물 위를 걷지 못할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겠어!’라고 의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며 당신처럼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청할 수 있었을까요? 행동이 그리스도를 닮아있다고 스스로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청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도 죽게 됩니다. 

믿음은 집과 같습니다. 행동은 집의 기초입니다. 행동이 없으면 믿음의 집은 모래 위에 지은 것처럼 고난이 닥쳐오면 허물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뜻에 대한 실천 의지가 확고하면 비로소 허물어지지 않는 믿음의 집이 지어질 수 있습니다. 비록 믿음이 작아도 성장시키고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행동이 기초고 믿음이 집임을 잊지 맙시다. 하느님은 믿음 안에 사시지만, 행동에 기반을 두지 않은 믿음의 집에는, 그 집이 얼마나 화려하건 간에 머무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실 때 몸은 믿음의 집이고 물은 그에 따른 행위입니다. 행위가 없는 자의 믿음은 결국 익사로 끝나고 맙니다. 이 말씀을 명심합시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가장 중요한 하나만 기억하면 어떤 자리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

어렸을 때 갖게 된 사제 성소는 본당에 계신 신부님을 보면서 생겼습니다. 본당 신자들과 함께하며 아이들과도 즐겁게 놀아주는 신부님을 보면서 저의 꿈은 ‘신부님’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저에게도 ‘신부’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제 생활을 25년 넘게 했지만, 저의 꿈을 키우게 했던 본당신부로는 겨우 만 5년을 넘겼을 뿐입니다. 특수사목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사제의 꿈을 키웠던 어렸을 때 보았던 본당신부가 그리웠습니다. 본당신부가 되어야 진정한 꿈을 이루고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책임과 의무가 가득한 특수사목의 삶보다는 신자들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본당신부가 되고 싶었습니다. 
 
지금 오랜만에 본당신부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문득 과연 특수사목을 하고 있을 때보다 더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답은 ‘아니오’였습니다. 신자들과 함께하는 삶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쉽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지만, 오해와 반대를 받으면서 힘이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느 신부가 했던 말이 정답이 아닐까도 생각됩니다. 
 
“본당신부는 그냥 미사만 충실하면 돼.” 
 
묵상 중에 큰 착각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사제는 기능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자리에 머물러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행복한 자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즉,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예수님 닮은 사제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하나만 기억하면 어떤 자리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잊어 버리고 대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기 자리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하십니다. 어렵고 힘들 때만 ‘주님, 주님!’하고 눈물 흘리며 외치는 모습으로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주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 자체에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리든 상관없습니다. 딱 한 가지, 주님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주님 닮은 삶을 살아갈 때, 하늘 나라는 멀리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군자는 홀로 있을 때 가장 신중하고 조심한다.

- 신독(愼獨)(‘대학’, ‘중용’)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첫 걸음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 존재의 참모습을 만나는 성찰의 시간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실행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올바른 실행은 언제나 반성과 새로움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좋은 실행으로 드러납니다. 말씀과 함께 호흡하는 실행입니다. 실행의 방향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어리석음의 껍질을 벗어버릴 때 생명의 참모습은 확연히 드러납니다.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의 행위는 생명의 발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실행의 문(門)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슬기로움은 말씀을 듣고 우리가 실행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실행과 함께 주어집니다. 실행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참모습을 만나는 실행의 삶이 대림의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실행의 삶입니다. 믿는 것을 실행하는 생명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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