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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11/25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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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 당신께 돌아오는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주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일깨우시어 저희가 거룩한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며 주님의 자비로 더욱 큰 은총을 받게 하소서.

2024년 11월 25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1월 25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1월 2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묵시 14,1-3.4ㄴ-5)
    그들의 이마에는 그리스도와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21,1-4)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 오늘 말씀 카드
    (시편 24,1)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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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 14,1-3.4ㄴ-5
오늘 제1독서

 

그들의 이마에는 그리스도와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 요한이 


보니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 물 소리 같기도 하고 요란한 천둥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들은 그 목소리는 또 수금을 타며 노래하는 이들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그들은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 명 말고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어린양을 위한 맏물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되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

 

 

루카 21,1-4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1월 25일
김시몬 시몬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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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최선을 다하는 신앙인

인간은 자신이 더 많은 정성을 들인 것일수록 더욱 큰 애정을 느낍니다. 어떠한 것이든 자신의 시간과 노력과 자원을 많이 들일수록 그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되며, 더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내 것을 더 많이 내놓았을 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부은 사람만이 그 결과에 만족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의 결과를 진심으로 칭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얼마간만 사용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노력을 과소평가하고, 다른 사람의 업적을 진심으로 칭찬할 줄 모릅니다. 

성실하게 노력한 사람만이 성실함과 노력의 진가를 알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 참으로 겸손할 수 있습니다. 적은 노력으로 좋은 성과를 내는 효율성을 자랑으로 여기고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노력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진정한 겸손을 알기 어렵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겼을 때, 많은 은총과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도와 봉사 등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 때, 더 많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최선을 다한 신앙인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존중하고 경탄할 줄 압니다. 내가 가진 일부를 봉헌하는 것과 삶 전체를 봉헌하는 것은 그 체험하는 바가 다릅니다.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 때에 남는 것 얼마를 주는 것보다,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떼어 나누어 줄 때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궁핍한 가운데 모든 것을 봉헌한 과부가,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예물을 바친 부자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듯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헌금이 아니라 봉헌, 얼마가 아니라 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얼마와 다. 얼마씩 넣는 자와 다 넣는 자. 오늘 주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이 부자의 봉헌보다 많다고 하십니다. 많은 것이, 많은 것이 아니고, 적은 것이, 적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니 많고 적음과 관련한 하느님의 기준이 우리와 다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100억 가진 사람에게 100만 원은 많은 것이 아니고 껌값이잖아요? 그러나 없는 사람, 예를 들어 1억밖에 없는 사람에게 100만 원은 많은 거지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며 경험하는 것은 부자가 더 쩨쩨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선 펑펑 쓰면서도 다른 사람에겐 조금 주는 것도 벌벌 떱니다. 돈은 많은데 사랑이 없기 때문인데 이런 면에서 부자가 더 불쌍하고 불행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더 불쌍하고 불행한 이유는 이런 자기가 불쌍하고 불행하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부가 주는 만족보다 사랑이 주는 만족이 더 큼을 모릅니다. 사랑이 주는 만족을 체험한 적 없고 모르니 참 불행합니다. 그리고 돈이 주는 만족은 뺏길 수 있습니다. 돈을 탐내는 사람이 많으니 뺏길 수 있지요. 그러나 사랑이 주는 만족은 뺏거나 뺏기지 않습니다. 사랑은 돈처럼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기에 뺏거나 뺏길 수 없습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의 과부는 헌금이 아니라 봉헌을 한 것이고, 어마어마한 헌금이 아니라 얼마 안 되지만 다 봉헌한 것이며, 의기양양한 헌금이 아니라 겸손한 봉헌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봉헌일 뿐 아니라 앞서 봤듯이 사랑의 봉헌입니다. 얼마 안 되기에 겸손하게 봉헌했지만 다 봉헌했기에 사랑의 봉헌입니다. 

그리고 그 봉헌은 하느님의 봉헌을 닮았습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먼저 당신 자신 전부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는데 걷어찬 부자와 달리 과부는 그 사랑을 고맙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며, 그래서 당신 자신 전부를 내어주신 그 사랑을 받아 되돌려 드린 것입니다. 

이런 상호 봉헌을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 두지 마십시오.” 

과부의 헌금에 대한 오늘 나눔을 요약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헌금이 아니라 봉헌이며, 얼마가 아니라 다이고, 겸손+사랑의 봉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바치는 믿음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신심 깊은 가난한 과부를 만납니다. 그는 비록 렙톤 두 닢을 예물로 바쳤지만, 그것은 자신이 가진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작정으로 마지막 빵을 만들면서도 엘리야에게 바쳤던 사렙다의 과부(1열왕 17,12)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이토록, 전부를 예물로 바침은 주님께 대한 전적인 내맡김이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바치는 표현이요,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우는 표시였습니다. 마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달라고 내놓은 그 값진 두 데나리온과 같을 것입니다(루카 10,35).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양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중히 여기고, 무엇을 앞세워야하는 지를 말해줍니다. 곧 봉헌은 자신의 계산에 따라 다 쓰고 남은 조각을 ‘나중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바치는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과부의 딱한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곧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맨 먼저’ 앞세워 바쳤던 것입니다.

대체 무엇이 이토록, 그녀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그것은 소중하고 귀한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주군이신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바로 그러한 분을 만나면, 자신의 전부를 바치지 않고는 못 배겨나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그 소중하고 귀한 분을 이미 만났습니다. 그러니 여기 이 자리에 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향한 사랑이 더 깊어 가는지, 혹은 퇴색되거나 변하지는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전부를 바쳐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가난하면서도 전 재산을 봉헌한 이 “과부”에 대해서, “교회를 나타내는 신비로운 표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산 제물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오늘, 저는 이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통하여, 나의 삶이 무엇을 우선하고 무엇을 앞세우는 삶인지를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진정, 무엇을 바치고 있는지, 혹은 전부를 바치고 있는지를 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봉헌할 수 있을까요? 대체 무엇을 봉헌해야 할까요?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21,4
궁핍한 가운데에서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
온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섬기지 않았고
온 시간과 열정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보다 제 자신을
앞세우며 살아왔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았고,
먼저 바치기보다 나중에 바쳤습니다. 

당신은 저의 전부이오니,
저의 전부를 바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봉헌은 고통스러워야 효과가 있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헌금입니다. 예수님은 액수로는 얼마 안 되지만, 전 재산을 바친 과부를 많은 재산 가운데 일부를 봉헌하는 부자들과 비교하십니다. 봉헌의 더 큰 효과를 누가 더 받을까요? 봉헌의 효과는 무엇일까요? 사랑을 실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심판의 기준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1976년은 중국 전체가 먹을 것이 없어서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중국 탕산시에는 인구 70만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지진이 일어나 23초 만에 24만2천 명이 죽었습니다. 가히 저주라 할 만한 대재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었던 일본대사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 참사 속에서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이 없었고 남을 해치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에 처한 이웃의 생명과 재물을 구하러 서로 불 속에 뛰어들었으며 자신이 먹기에도 부족한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더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강제된 행위가 아니라 자유의사에 의한 행위였다는 데서 외국인 목격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같은 해 세계 최고의 부를 자랑하는 미국 뉴욕시에서 1977년 12시간의 정전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신문, 방송에서는 그 상태를 ‘연옥’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전등이 꺼져서 자기 얼굴이 타인에 의해서 식별되지 않게 되었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들은 남의 재산을 파괴하고 약탈하고 방화하고 강간하고 서로 찌르고 죽였습니다. 불만 들어오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도시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입니다. 

봉헌은 나의 것 일부를 주님께 봉헌하며 나의 모든 것이 주님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왜 탕산시의 사람들은 이웃을 돌볼 줄 알았고 뉴욕 시민들은 남의 것을 약탈했을까요? 이는 봉헌이란 것이 자신의 마음을 먼저 아프게 만들지 못하면 이웃에게 시선을 돌릴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고대 일본의 전설 중 하나입니다. 이 전설은 산골 마을에 살던 한 여인이 두 아이가 있었는데, 한 명은 건강하고 잘생긴 아이였고, 다른 한 명은 장애가 있는 아이였습니다. 어느 날, 마을의 관습에 따라 강에 제물을 바치러 가야 했는데, 사람들은 여인이 장애가 있는 아이를 바칠 것으로 생각했지만, 강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건강하고 잘생긴 아이를 제물로 바치고, 장애가 있는 아이와 함께 돌아왔다는 내용입니다. 한 선교사가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종교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저희는 신에게 더 좋은 것을 바쳐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더 좋은 것을 바칠 때는 더 마음이 아픕니다. 더 마음이 아플수록 내가 가진 것의 가치에 대해 더 알게 되고 그러면 그것조차 가지지 못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 커집니다. 이것이 탕산시와 뉴욕의 차이를 만든 것입니다. 봉헌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못하면 그 봉헌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증가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나는 자연인이다’의 MC인 방송인 윤택은 개그맨을 하기 전에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가 망해서 30세가 넘어 8억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간신히 개그맨으로 데뷔하여 돈을 다 갚았지만, 다시 침체기에 들어섰습니다. 이때 맡게 된 ‘나는 자연인이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중의 가장 인상에 남는 분은 재개발로 300억의 돈을 벌었지만, 방탕과 사기로 모든 돈을 잃게 된 자연인이었습니다. 그가 밧줄을 사서 산에 올라 나무에 걸치고 목을 매었을 때 멀리서 석양이 지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 예뻐서 하루를 더 살아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 밧줄을 베고 자고 나서 아침에 뜨는 태양을 보고는 너무 감사해서 그 땅에서 눌러앉게 되었다는 사연입니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렇게 마음이 아플 때 비로소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가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형식적인 봉헌이라면 그 봉헌이 나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조금은 아프더라도 십일조를 봉헌하며 자아를 매번 밟아주고 이웃 사랑을 키워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어느 책에서 미국에 이민하여서 아이들을 잘 키우고, 30년간 부부싸움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노부부의 행복한 결혼 생활 비결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민 오면서 이 부부는 서로 약속했습니다. 남편은 화가 나고 섭섭한 마음이 들면 말없이 산책하러 나가고, 아내는 화가 나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앞치마를 거꾸로 걸쳐서 설거지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상대방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알아채기란 불가능합니다.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 척하면 알아야지.”라고 말하지만, 상대방은 또 이렇게 항변하지요. “말해야 알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더구나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다면 더 큰 믿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나약한 인간이기에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위 노부부의 노하우를 따르면 어떨까요? 
 
지혜의 삶을 사는 분을 많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그 지혜를 볼 수 있고, 그 지혜를 배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혜를 보려고 하지 않고, 또 보더라도 부러움만을 가지면서 ‘내 배우자는 왜 그럴까?’라며 원망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조금더 관심갖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또 쉽게 단죄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지혜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며 살라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적은 헌금을 한 이 과부를 우습게 봤을 것입니다. 이 헌금함은 공개되어 있는 곳으로, 주로 부자들만 헌금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의 정성 어린 마음만을 보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생활비 전체를 넣은 과부의 그날 저녁은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 하느님이 먼저였고, 그래서 가지고 있는 모두를 헌금함에 넣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 인정받습니다. 
 
우리도 이 지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삶이 아닌, 하느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여인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명언

포기하지 않는 것도 실력이다.

- 알렉스 퍼거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생활을 바꾸는 것이 올바른 회개입니다. 우리의 자리를 찾는 것이 생활속의 신앙입니다. 생활의 기쁨은 신앙의 기쁨이며 생활의 마음가짐은 곧 신앙의 마음가짐이 됩니다.

생활을 직시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매일 매일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로 하느님께 화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생활의 동반자가 되십니다.

생활의 몸으로 오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생활로 인격을 도야하고 생활로 신뢰를 회복합니다. 우리의 생활을 하느님 안에서 값어치 있게 만드는 것이 봉헌입니다.

봉헌은 생활에서 길을 발견하는 참된 지혜입니다. 생활의 봉헌을 놓치면 행복도 놓칩니다. 욕망을 정화하는 봉헌입니다. 그래서 생활의 결정체는 하느님과 나누는 생활의 봉헌입니다.

생활의 봉헌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봉헌의 날 되십시오. 복음의 생활화가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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