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주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2024년 11월 23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1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묵시 11,4-12)
그 두 예언자는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20,27-40)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오늘 말씀 카드
(루카 20,37)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묵시 11,4-12
오늘 제1독서
그 두 예언자는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습니다.
나 요한에게 이런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여기 나의 두 증인이 있다.”
4
그들은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등잔대입니다.
5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는 반드시 이렇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6
그들은 자기들이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7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 지하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서는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8
그들의 주검은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내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영적으로 소돔이라고도 하고 이집트라고도 하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주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9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무덤에 묻히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10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와 그들에게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들을 쳐다본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12
그 두 예언자는 하늘에서부터, “이리 올라오너라.” 하고 외치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루카 20,27-40
오늘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1월 23일
김영인 요한사도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8:03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생중계 성당
- 가회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가회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가회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06: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생중계 없음 - 남양성모성지 온라인 매일미사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남양성모성지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생중계 없음 / 화 11:00 / 수 11:00 / 목 11:00 / 금 11:00 / 토 11:00 - 원당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원당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원당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10: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10:00 - 초당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초당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초당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0:30 / 월 06:30 / 화 19:30 / 수 10:00 / 목 19:30 / 금 10:00 / 토 10:00 - 팔로티회 온라인 매일미사
팔로티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분당 팔로티회 : 성시간(15:00) 후 미사(16:00)
주일 16:00 / 월 16:00 / 화 16:00 / 수 16:00 / 목 16:00 / 금 16:00 / 토 16:00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부활은 희망이다.
제1독서에서는 두 증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 두 증인은 바로 모세와 엘리야를 가리킵니다.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는 권한”(묵시 11,6)은 아합 임금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삼 년 동안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게 한 엘리야를 떠올리게 하고(1열왕 17,1 참조),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묵시 11,6)을 가진 예언자는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킨 모세를 떠올리게 합니다(탈출 7,14-12,13 참조).
이 두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며 자신의 사명을 다하였지만, 사명을 마친 뒤 지하의 짐승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도성 한길 가에 내버려집니다. 사흘 반 동안 무덤에 묻히지도 못합니다.
마치 악이 승리한 듯 보이고, 이 예언자들은 조롱거리가 됩니다. 불의한 자들은 예언자들의 죽음에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들을 일으키시고 하늘로 불러올리시어, 그들의 승리를 선언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실 하느님에 대한 희망입니다. 부활은 우리 삶의 마지막에 결국 선이 승리하고 악이 심판받으며 모든 것이 질서 잡힐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의인이 고통받고 악인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해결하실 분은 하느님뿐이십니다. 부활이 없다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은 아무 쓸모가 없을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계심과 그분께서 이루실 하느님 나라는 지금의 우리의 노력을 의미 있게 합니다. 부활에 대한 전망은 이 세상에서 정의를 위한 작은 노력이, 비록 큰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도, 완성으로 나아가는 밑거름이라는 것을 보증해 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을 믿기에 부활을 믿는 우리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다.”
사두가이들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글을 읽으면서 그들은 왜 굳이 주장까지 할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의 저는 제가 주장하는 것도 싫어졌지만 남이 주장하는 것은 당연히 더 싫어졌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옛날에는 저도 주장을 많이 했다는 얘기이고, 요즘 그것이 싫어진 것이 나이 먹어 철이 든 때문인 것 같아서 이 점에 대해서는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저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주장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내용의 주장일지라도 좋지 않다고 저는 생각하고, 주장해서는 얻는 것도 별로 없다고 또는 역효과라고 생각합니다.
주장(主張)이란 내가 주장(主將)이 돼서 주장하는 것이고, 그러니 다른 사람들을 객으로 만드는 것이며,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주장이 되어 주장해대면 좋아할 사람 어디 있고 누가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리고 주장은 이런 것이기도 합니다. 곧 주장하지 않아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주장하지 않습니다. 주장해야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착각하는 미성숙한 사람이 주장합니다.
설득력이 있는 사람은 설득하지 주장하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설득하는 사람은 더욱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는 사람은 더더욱 주장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 못 되고, 교만하거나 공동체의 일치와 성장을 저해하는 분열주의자일 가능성이 큰데 그런데 이들은 왜 굳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해야만 할까요? 이왕이면 부활이 있다고 믿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부활을 믿고 싶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거나 부활이 없다는 믿음이 진리에 기반한 것이기에 그러는 걸까요? 저라고 부활이 있는지 어떻게 알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지 않았으니 본 사람처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봤기에 믿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본 사람은 믿을 필요가 없지요. 봤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기에 부활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신 분이시며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이시니 하느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고, 죽었어도 죽은 것이 아닐 것이며 그러니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부활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는 하느님께서 저를 이 세상에서만 살다 죽으라고 창조하지는 않으셨다고 믿기로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부활신앙
오늘 우리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 우리의 부활신앙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무지와 예수님의 신적지혜가 대조를 이룹니다. 곧 영적무지로 인한 속박을, 신적지혜로 인한 자유와 해방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속박과 자유가 ‘믿음’에 달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병행구절인 <마태오복음>에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두가이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 22,39-40)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 무지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면서 물질만을 유일한 실체로 여긴 까닭에, 내세나 부활과 영적존재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위와 능력을 제한했습니다. 곧 부활케 하시는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을 예로 들면서,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을 마치 죽은 사람을 원래대로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의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육체를 지닌 존재로 보고서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영적존재는 “마치 천사와 같아 시집가는 일도 장가가는 일도 없고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고 하시면서,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의 <탈출기>(3,6)를 인용하여 그들의 영적무지를 깨우치십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주었다.”(루카 20,37)
이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비록 죽어 과거의 인물이 되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 있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으로서, 인간을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이러한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1-52)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는 이들입니다. 진정 믿으면, 신적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와 해방이 올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지만,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곧 믿음이 해방을 가져올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20,38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주님!
저희를 깨우쳐주소서.
죽음이 단절과 파괴가 아니라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임을!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탄생임을!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게 함을!
단지 되살아 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됨을!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수로 19(월)부터 23(토)까지 복음 묵상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AI를 인간의 새로운 지배자라고도 부릅니다. 어디에 살든 불가해한 알고리즘으로 짜인 거미줄 속에 갇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알고리즘들이 우리의 삶을 관리하고, 우리의 정치와 문화를 재편하며, 심지어 우리의 몸과 마음까지 재설계하면서 힘을 잃게 만듭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힘들다면, 유튜브를 생각하면 됩니다. 만약 스포츠 관련 영상을 찾다 보면 계속 첫 화면에 스포츠 영상만 나옵니다. ‘보수’ 정치 관련 영상만을 찾으면, ‘진보’ 정치 관련 영상은 전혀 볼 수 없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스포츠만 좋아하고, 보수 정치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이 과정 안에서 스포츠 싫어하는 사람과 충돌을 일으키고, 진보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다투게 됩니다.
이렇게 AI가 우리의 생각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본 것이 진실이라 생각하지만, 현실을 온전히 담아낸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AI에 의지해서 사는 삶이 아닌 진실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AI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보고 들은 것만이 진실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족한 자기의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다양한 방법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또 하느님과 함께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질문은 이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면, 짝을 만나 혼인을 하는데, 이 복잡한 인연의 고리가 저세상에서 어떻게 정리될 수 있는지를 예수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잡한 인연의 고리는 정리될 수 없기에, 예수님이나 바리사이들이 말하는 부활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으로 하느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고 하시지요.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십니다. 결국 그 나라는 온전한 기쁨만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단순히 이 세상의 연장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하느님을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따르다 보면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하느님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인 사랑에 중심을 맞췄을 때,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은 없습니다.
- 마스다 미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이가이들의 교리에 갇혀있지 않으십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는 살아있는 생명의 소리를 듣습니다. 생명의 소리는 생명의 기쁜 소식으로 이어집니다.
생명의 숨결에서 생명이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생명 존중은 바로 생명 중심을 일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가치를 십자가로 보여주십니다. 생명을 바친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부활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생명을 매순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생명을 길러 내시고 생명을 끝까지 돌보시는 삶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동등하고 평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생명과 진리의 길이 사랑의 부활입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가장 복된 순간입니다.
가장 올바른 삶의 방식은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에 감사드리는 생명의 오늘 되십시오. 참된 사랑으로 생명이신 하느님을 드러내는 사랑의 날입니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4/11/22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11.22 |
---|---|
24/11/21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11.21 |
24/11/20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11.20 |
24/11/19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11.19 |
24/11/18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11.18 |
24/11/17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1) | 2024.11.17 |
24/11/16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11.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