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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4/07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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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여라. 너희는 그 젖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으리라. 알렐루야.

영원히 자비로우신 하느님, 해마다 파스카 축제로 저희 믿음을 불타오르게 하시니 더욱 풍성한 은총을 베푸시어 물로 깨끗해지고 성령으로 새로 난 이들이 성자의 피로 얻은 구원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소서.

2024년 4월 7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4월 7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4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4,32-35)
    한마음 한뜻.

  • 제 2독서
    (1요한 5,1-6)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깁니다.

  • 오늘 복음
    (요한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 오늘 말씀 카드
    (1요한 5,3)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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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19-31
오늘 복음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4월 7일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팔로티회 소개 00:06

✚ 미사시작 01:27

✚ 강론시작 15:17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부활 제2주일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여드레 뒤에 일어난 일을 전함으로써 팔일 축제의 끝을 알립니다. 매우 중요한 신학적 내용들이 함축되어 있기에, 짧게 요약하여 보겠습니다.

첫째는, ‘평화’입니다.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십니다. ‘샬롬 알레이켐’은 유다인들의 일상적 인사이지만, 특별히 이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라는 표현과 함께 세 번(완전함을 상징) 되풀이됨으로써, 이 평화는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실 때에만 주어짐을 강조합니다.

둘째는, ‘새 창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숨을 불어넣으며 …… ‘성령을 받아라.’”라고 하십니다. 평화(‘샬롬’)는 세상의 창조 때, 죄로 손상되기 이전 완전하고 충만하였던 상태를 말하며, ‘숨을 불어넣으시는 행위’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를 ‘새로운 창조’로 이끈다는 것을 분명히 하여 줍니다.

셋째는, ‘상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것은 상처였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와 필수적으로 연결된 현실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토마스가 예수님의 상처를 확인하기를 요구합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 

그러한 토마스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시고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라고 하십니다.

넷째는, ‘1인칭적 고백’입니다. 예수님과 토마스의 대화에는 1인칭(나, 내)과 2인칭(너, 네) 대명사가 되풀이되는데, 부활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토마스처럼 1인칭적 체험으로 고백되는 사건임을 드러냅니다.

마지막으로, ‘자비’입니다. 1인칭적 고백은 주변에 ‘사랑’과 ‘자비’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나타나듯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모습을 통하여 증명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닫힘과 열림

오늘 부활 제2주일의 주제를 토마스 사도의 신앙고백으로 잡을 수도 있지만 올해 저는 <닫힘과 열림>으로 잡아봤습니다. 오늘 복음의 첫 문장은 제자들의 두려움과 문을 닫음에 대한 묘사입니다. 

“주간 첫날 저녁,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오늘 복음에서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닫아걸었다고 얘기하지만 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제자들이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보다 자기들의 힘이 없어서 그들을 두려워한 겁니다. 

예를 들어서 호랑이가 무서워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물리칠 힘이 있거나 총이 있으면 두렵지 않지요. 우리는 이렇게 두려움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아내야 물리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유다인들을 두려워한 것이 실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해석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두려워한 것이지만 이는 신앙이 빠진 인간적인 해석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이들이 유다인들을 두려워했겠습니까? 

어렸을 때의 우리는 밤이 무섭고 강도가 무서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아버지가 함께 있거나 강아지만 옆에 있어도 무섭지 않은 경험이 있잖아요? 

이는 우리가 어두운 것은 밤이 어둡고 세상이 어둡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빛이요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서 안 계시기 때문이라고 우리가 신앙적으로 이해함과 같은 논리입니다. 

우리에게 평화 없음도 같은 논리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겼기에 또는 싸움을 걸어오는 누가 있기에 평화가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주님의 평화가 없기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평화로우려면 오늘 제자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평화를 주실 때 그 평화를 받아 지니면 우리는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평화를 무고(無故)의 평화가 아니라 관계의 평화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그간 또는 밤새 별고(別故) 없으셨느냐고 인사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때의 별고란 특별히 안 좋은 일 곧 사고의 준말일 것입니다. 그러니 별고 없냐는 말은 특별히 안 좋은 일 사고 없었냐는 뜻입니다. 그런데 안 좋은 일이 있고 상황은 평화롭지 않아도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평화롭습니다. 

제자들이 호수를 건너는데 거센 풍랑이 일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배의 고물을 베고 주무십니다. 제자들은 난리법석인데 주님은 천하태평이십니다. 이렇게 평화의 주님께서 배에 함께 계시면 제자들은 평화롭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함께 계시어 두려움은 사라지고 평화롭게 되면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골방에 갇혀 있지 않고 닫힌 문을 활짝 열고 나가고 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하느님께서 주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내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리고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하시면서. 

그래서 제자들은 성령 충만하게 되고, 성령 충만함으로 사랑 충만하게 되고, 사랑 충만함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며, 오늘 사도행전의 초대 공동체에서 볼 수 있듯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는, 무소유와 공동소유의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문이 열린 것뿐 아니라 성령의 사랑으로 마음도 열리고 움켜쥐었던 손도 펴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어 나와 우리 공동체에도 이런 부활의 은총을 주시길 청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부활 체험이 없으면 용서의 능력도 없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용서의 능력’입니다. 용서는 내가 죽는 일입니다. 자발적으로 죽을 수 있는 경우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농부가 열매의 기쁨을 상상하지 않으며 농사의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을까요? 

마리아 고레띠 성녀는 자기를 무자비하게 찌른 사람에 대해 “저는 그 사람을 용서할 뿐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서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천국에 대한 희망 없이 나의 생명을 앗아가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녀의 어머니도 그 사람을 용서했는데 “내 딸이 용서했으니, 나도 자네를 용서하네.”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에게 딸은 천국에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고정원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일가족을 살해한 유영철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부활에 대한 희망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기 아내가 천국에 있는데 자신이 용서하지 못해 지옥 가면 아내를 영영 만나지 못할까 봐 용서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 때문에 용서가 가능한 것이지, 유영철이 사랑스러워서 용서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면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은 용서의 능력과 하나입니다. 

어떤 형이 나라에 큰 공을 세워서 임금으로부터 사면장을 들고 사형 선고를 받아 갇혀 있는 동생을 찾아왔습니다. 혹시 풀려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형의 말에 동생은 먼저 판사를 죽이고 그다음엔 자신을 신고한 이를 찾아가 죽일 것이라 말합니다. 형은 동생을 사면할 수 없어 나오면서 사면장을 찢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 결정적인 시기가 부활하신 당신을 만나고 믿게 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하는 권한이 인간에게 주어졌음을 보이시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중풍 병자를 치유하고 용서하실 때 사람들은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태 2,7)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실 수 없다고 믿고 개신교도 그래서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용서한다는 것은 나를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죽어야 마땅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요한 5,18 참조). 

용서를 위해 목숨을 걸려면 부활에 대한 확신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당신을 보여주시며 동시에,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성령의 힘을 주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고 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파견하실 때 당신이 보내셨다는 증거로 ‘지팡이’ 안에 힘을 넣어주셨던 것과 같습니다. 조선 시대 임금이 암행어사를 파견할 때 마패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때 빠진 사도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토마스’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도들에게는 성령과 함께 성령을 통한 죄를 용서할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때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않고 다른 제자들처럼 죄사함의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죄사함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도 이미 용서하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부활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토마스 사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 각자도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죄를 용서하는 예식을 통해 이 많은 사람이 오직 하느님에게만 있는 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보고 교회가 그리스도 부활의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보지 않고 믿는 법입니다. 

사제들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개혁 사명을 믿지 않자 성녀도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나는 이 은혜가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온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 25,19)라고 말합니다. 교회도 온 세상이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교회는 죄를 사해주는 권한에 조금도 물러섬이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지금도 바라보고 있는 가장 완전한 증거가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특히 믿음의 크기를 강조하지요. 그런데 ‘나’의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보다 ‘하느님’께서 나를 더 믿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늘 ‘사랑’으로 드러났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클까요? 아니면 자녀의 사랑이 더 클까요? 부모의 사랑이 훨씬 크다는 것을 자녀를 키워 본 부모들은 한결같이 말씀하십니다. 이 점을 기억한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랑을 계속 받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처녀가 아이를 갖게 된다는 사실에 의문만 있었지요. 자기의 머리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 “제가 남자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의문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믿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토마스 사도는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 말씀하셨기에 전혀 모르는 사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과 기적을 여러 차례 보았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의 신성을 의심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예수님의 신성을 믿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의심하지 않는 것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토마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선은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받는 아이는 많은 부분에서 다릅니다. 자신 있게 자기 삶을 살아가며, 어떤 고통과 시련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받음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사랑으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잘 성장하고 있으므로 가능합니다.

 

오늘의 명언

누구에게 다가가 봄이 되려면, 내가 먼저 봄이 되어야지.

- 이해인 수녀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느님의 자비는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상처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뜨겁게 만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창조되고 하느님의 자비로 우리는 구원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축복된 삶을 살길 바라시며 끝없는 자비를 우리들에게 베푸십니다. 

실천이 없는 자비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체온과 말씀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아픔이 하느님의 아픔이 됩니다. 병든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듯 우리에게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길 잃은 이들에게 길을 찾아 주시는 자비이며 굶주린 이들에게는 빵이 되시는 자비이며 강도를 만난 이에게는 내 몸같이 보살피고 섬기는 자비입니다. 이와 같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자비를 십자가의 죽음과 상처에서 다시 만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거창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따뜻한 미소이며 다정한 속삭임이며 쓰러진 형제를 일으켜 세우는 맑은 손길입니다. 하느님의 참모습을 십자가의 상처에서 다시 뵈옵는 은총의 자비 주일 되십시오. 

하느님의 자비로 돌아가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음으로 고백하며 십자가를 통해 참된 평화 참된 행복을 만납니다. 하님의 자비로 생명과 빛을 얻는 하느님의 맑은 자비 주일입니다. 우리는 자비를 베푸는 자비의 자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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