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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4/10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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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가 민족들 앞에서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오리다. 알렐루야.

주님, 성자의 부활로 인간의 존엄을 다시 찾아 주시고 저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으니 저희가 해마다 믿음으로 거행하는 신비를 사랑으로 깨닫고 실천하게 하소서.

2024년 4월 10일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4월 10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4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5,17-26)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 3,16-21)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오늘 말씀 카드
    (요한 3,21)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요한 3,21)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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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요한 3,16-21
오늘 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4월 10일
이준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7:20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빛으로 나아가는 삶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가 계속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이 집약되어 있는데, 

첫 번째로 강조된 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습니다. 

두 번째는 ‘구원’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빛’입니다. 그 구원은 빛이요 생명이신 분을 통하여 그 빛 안에서 걷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빛이신 분을 세상에 보내셨음이 명백해집니다. 

빛으로 나아가는 삶은 독서에 나오는 사도들의 일화로도 제시됩니다. ‘어두운 밤’에 ‘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들은 천사들의 인도로 어둠에서 나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서 다시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어두운 밤과 이른 아침, 감옥과 성전이 각기 대비되면서, 진리를 실천하는 이들은 극심한 어둠과 억압 속에서도 빛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알려 줍니다.

주변이 온통 어둠에 잠겨 있을 때 작은 빛이 그 공간에 들어오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그 빛을 향하고 빛 주변으로 모이게 됩니다. ‘빛’은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어둠 속에 있던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 체험이고 저마다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구현되는 개별적 현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눈 밖에 나지 않고 눈 앞에 있는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요즘 악은 작은 하느님 체험, 작은 기적을 가끔 체험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도 제가 체험하는 작은 하느님 체험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죄를 통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그런데 제가 죄를 진심 통회하고 회개해서 하는 하느님 체험이 아닙니다. 저의 요즘 문제는 통회를 잘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죄를 통해서 작은 하느님 체험을 하니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할지,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저의 하느님 체험은 뻔뻔함이기도 하고 영적 건강함이기도 합니다. 

전에는 죄를 짓고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을 피해 어둠 속으로 숨었는데 이젠 그러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죄를 지을수록 더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더 하느님 앞에 있어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비록 죄를 지었어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지 말아야겠다고 오기를 부리는 겁니다. 

저는 언제나 하느님의 눈앞에 있어야겠다는 마음이 갈수록 간절합니다. 저는 하느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습니다. 늘 하느님 눈앞에 있지 못하더라도 언제나 하느님 눈앞에 있고 싶습니다. 

‘늘’이 아니라 ‘언제나’? 

물론 늘 하느님 앞에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완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니 언제나 하느님 앞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성할 때나 병들 때나 언제나 죄를 지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언제나, 벌을 받을 때나 복을 때나 언제나 하느님 눈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려고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눈앞에 있으려고 하고, 죄지을 때 오히려 더 하느님 눈앞에 있으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합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죄가 많아진 곳에 은총도 풍성하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하고 이해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은총을 만나야 합니다. 

죄책감을 많이 느끼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은총을 많이 느끼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언제나 그러니까 죄를 지었어도 하느님 눈 밖에 나지 않고 하느님 눈앞에 있는 내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얼마 전, ‘인내’의 한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인내(忍耐), 우선 ‘인(忍)’은 참을 인을 씁니다. 칼 도(刀) 자에 점 하나가 붙어 있는 칼날 인(刃)이 심장을 뜻하는 심(心) 위에 붙어 있습니다. 심장을 칼로 도려낸다는 의미입니다. 즉, 심장을 찍히는 고통을 당하더라도 참아낸다는 말입니다. 
 
이제 인내(忍耐)의 ‘내(耐)’입니다. 이는 견딜 내(耐) 자로, 길게 늘어진 턱수염을 뜻하는 이(而)와 동작을 나타내는 촌(寸)이 합쳐진 글자로, 수염을 뜯기는 벌을 받더라도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언젠가 성당 꼬마 아이가 내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손을 댑니다. 그리고 한가락만 길게 나와 있는 턱수염 하나를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프던지 눈물이 다 났습니다. 수염이 뜯기는 고통이 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심장을 찍히는 고통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이를 견뎌 내는 것이 ‘인내’라고 말합니다. 인내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견디어 낸 만큼 달콤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장 루소의 말이 생각납니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은 분명히 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라는 열매는 매우 답니다. 그래서 거부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문제는 그 단 열매를 그냥 얻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쓴 십자가를 짊어져야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구원의 열쇠는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는 단 열매만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외면하고서는 절대로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너무 어렵다고 말씀하시는 분을 만납니다.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 활동하는 것도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하십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조금만 소홀하면 욕만 많이 먹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해 보십시오. 피땀을 흘리시며 또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의 십자가도 짊어지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아주 단 열매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색한 부자의 곳간처럼 내 안에 쌓여서 갇히는 사람들, 이 곶간의 자물쇠를 깨고 여는 일, 그곳에서부터 내 사랑은 시작된다.

- 김진영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같은 시간을 살아도 다르게 살 수 있는 구원의 삶이 있습니다. 삶 속에 구원이 있음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십니다. 구원의 길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구원을 생각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우리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에 하느님의 구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용서가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은 현상황에서의 안주와 좌절을 십자가로 뜨겁게 거부합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빛으로 나갑니다. 빛으로 나가야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을 구원하십니다. 다른 곳에서 구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이라는 엄청난 역사를 우리들 안에서 새롭게 쓰십니다. 소외되고 왜곡된 참사랑의 진리를 사랑의 실천으로 바로잡으시는 예수님의 구원을 믿습니다. 

진리의 자리가 구원의 자리이며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여기에서부터 다시 시작되는 뜨거운 구원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따르는 구원의 오늘입니다. 진리의 길은 구원의 길이며 믿음의 길이며 빛으로 나가는 영원한 빛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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