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4/04/11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4. 11.
반응형

 

 

주님, 당신의 성인들에게 영원한 빛을 비추소서.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알렐루야.

하느님, 복된 스타니슬라오 주교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박해자의 칼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저희도 죽기까지 믿음에 충실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2024년 4월 11일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4월 11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4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9)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3,31-36
오늘 복음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31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32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3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35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36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4월 11일
황중호 베드로 신부

 

✚ 성 스타니슬라오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9

✚ 강론시작 07:26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한다.

니코데모와의 대화는 오늘 복음으로 마무리됩니다. 예수님께서 과연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신지를 궁금해하던 그에게 최종적 답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시는 분”이시고 “하늘에서 오시는 분”이시며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초월적 신원을 가지고 계시기에 “모든 것 위에 계신다.”라고 선언됩니다. 

이 우위성은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권력과 힘을 가지셨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느님과 친밀하고 각별한 관계를 가지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그 뒤의 내용들이 예수님과 아버지의 친밀함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시고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심으로써 온전한 일체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니코데모가 확인하고 싶었던 예수님의 신원인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복음의 마지막에,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가 사실은 인간을 위한 것이었음이 선포된다는 점입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 이 관계의 목적으로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길게 이어졌던 니코데모와의 대화의 결론입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한다.”

모든 기교와 술수, 불안과 과장을 그만두게 하는 것은 참된 사랑과 그에 대한 확신입니다. 사랑이 참됨을 확인할 때 우리는 모든 의심과 불안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서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초월싸움

오늘 베드로 사도는 자기들이 명령한 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시도자들에게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을 묵상하면서 저는 이렇게도 묵상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에게 순종치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이 말은 베드로 사도가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 교만한 사람이 아니고 사람에게도 순종하는 겸손한 사람인데 다만 하느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사람에게 불순종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대통령이 옛날에 자기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얘기했습니다. 그 말이 멋있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아마 대통령이 된 것도 이것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고 난 뒤의 그를 보면 아무에게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고, 모두가 자기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정 훌륭한 사람은 순종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진정 훌륭한 사람은 가장 낮은 사람에게도 순종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순종에 관해 얘기하면 자기는 갓 들어온 수련자에게도 순종할 채비가 되어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사람에게 불순종할 경우는 딱 한 가지 경우입니다. 하느님 뜻과 다를 경우입니다. 우리가 받들어야 할 분은 가장 높으신 분, 하늘에서 오시고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우리 신앙인이란 이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도 이 세상에 섬기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땅에서 난 사람들과 달리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이 세상을 초월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나 정치 무관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나 정치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함입니다. 

일찍 자는 저는 어제 개표 결과를 보지 않고 잤고, 지금 저는 선거 결과가 어떨지 궁금하지만 확인치 않고 있습니다. 이 세상 문제에 너무 매몰되지 않으려고 일종의 초월 싸움을 하는 겁니다. 

세상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그러니까 세속화되지 않으면서 복음화하기 위해서만 세상에 내려가기 위함입니다. 

세상에 관한 관심과 무관심 가운데서 초월 싸움을 하면서, 주님과 사도들처럼 그리고 프란치스코와 성인들처럼 진정 복음을 들고 세상 가운데로 들어가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선과 악의 싸움에 중립은 없다.

스케일이 어마어마한 책 ‘삼체’(Three-Body)의 앞부분 줄거리입니다. 이야기는 심각한 사회적, 정치적 격변기였던 중국의 ‘문화대혁명’(1966~1976) 중에 시작됩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이 자본주의적 잔존 세력을 숙청하여 중국 공산주의를 수호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사회 정치적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수백만 명의 박해, 중국 교육 시스템의 혼란, 심각한 경제적, 문화적 피해를 포함하여 광범위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격변을 가져왔습니다.

이때 예 원지에(Ye Wenjie)는 천재 물리학 교수인 아버지가 반동분자로 처형되는 것을 봅니다. 미국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가르쳤다는 이유입니다. 아버지를 신고한 것은 어머니였습니다. 반동분자의 딸로서 수용소에서 지내던 그녀는 또한 마음을 주던 유일한 남자 과학자에게까지 배신당합니다. 

최고의 과학자로서 우주에 신호를 보내는 일을 담당하게 된 원지에는 자신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발전한 문명을 지닌 평화주의자 외계인으로부터 이상한 메시지를 수신하게 됩니다. 신호를 보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치가 발각되고 자신들의 문명이 그들을 파괴하러 갈 것인데, 자신들이 도착하면 문명의 차원이 다른 자신들의 종족이 지구를 식민지로 만들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세상에 환멸은 느끼던 예 원지예는 잘됐다 싶어 그들에게 메시지를 계속 보내고 태양이 세 개인 행성에 사는 그들이 메시지를 보게 됩니다. 그들은 세 태양이 합쳐질 때 문명이 파괴되고 마는데 태양이 하나뿐인 지구는 그들이 원하는 가장 완전한 행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구까지 오는 데는 400년이 걸립니다. 그동안 지구가 문명을 발전시키지 못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 원지에와 그녀를 추종하는 세력을 규합하여 지구의 문명이 더는 발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작전을 수행합니다. 지구는 그들의 작전에 말려들어 과학 혼돈의 늪에 빠지게 되고 매우 발전이 매우 느려지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외계인들이 도착하게 될 무렵 그들을 무력화시킬 인물이 나타납니다. 바로 평화를 위해 지구인들이 냉동인간으로 그때 깨어나게 만든 루오 지(Luo Ji)입니다. 루오 지는 트리솔라리안들이 자기들을 공격하면 그들의 좌표를 온 우주에 다시 날려 보낼 것이고 그러면 그들보다 더 높은 차원의 존재들이 와서 또 그들을 몰살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으로 트리솔라리안들과 거래하고 그들을 물러나게 합니다. 

‘삼체’는 SF 소설이지만, 사실 우리 삶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누군가를 위해 일합니다. 원지에는 자신도 지구인이지만, 지구인들에 대한 환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를 파괴해 줄 대상을 찾고 그들의 뜻에 순종하여 그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지구인들이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을 지연시킵니다. 

반면 루오 지는 지구인들 편에 서서 어떻게 하면 그들을 저지시킬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기술로는 도저히 되지 않기에 깨달음을 통해 이 일을 이뤄냅니다. 정글 숲속에 병아리 한 마리가 있지만,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누군가 자기를 잡아먹게 되면 다른 누군가가 또 그놈을 잡아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깨닫게 만들면 된다는 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구원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치 원지에와 같은 일당인데,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면 안 되게 하는 세력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뜻을 들어주는 이들의 뜻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누구든 자기들이 은혜를 받는 이들에게 순종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분에게 한량없는 은혜인 성령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적들은 또한 악의 세력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그들을 고마워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들의 말을 하고 그들의 뜻을 따라줍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에게 은혜를 받고 있고 은총과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그 은혜를 주는 이의 말을 하고 뜻을 따라줍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빛과 어둠, 두 곳에서 옵니다. 지구를 침공하러 오는 이들이 하는 일에도 관심이 없고, 또 지구를 지키려는 이들에게도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은 중립일까요? 그 사람은 지구 파멸의 문제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외계인과 그 일당의 편입니다. 

어머니를 거부하면 중립일까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어머니를 거부하면 그냥 악에 머물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은총을 원하느냐에 따라 내가 따라주는 뜻이 결정됩니다. 은총과 뜻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맞은 기억이 없소.

지혜로운 현자가 길을 걷다가 누군가와 부딪혔습니다. 부딪힌 그 사람은 불같이 화를 내며 현자의 뺨을 가차 없이 때렸습니다. 그리고 큰 싸움을 벌일 험악한 기세를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현자는 실랑이가 벌어지자 곧바로 마음을 가라앉혀 싸움을 피했습니다. 때린 사람도 자신이 너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현자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현자는 사과를 받아들였을까요? 저는 사과를 받아들였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과 달리 현자는 사과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맞은 기억이 없소.” 
 
현자는 맞은 기억이 없기에 사과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고, 이로써 나쁜 기분을 안고 가는 것도 거부한 것입니다. 
 
상대의 말과 행동에 상처받은 일이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공격에 일일이 대응하는 데 드는 힘이 얼마나 많이 듭니까? 오히려 당장 패배를 인정하는 편이 훨씬 더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대응하는 것이 정당해 보이지만, 대응한다고 해서 상대가 항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은 절대 손해 보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손해를 줄여주고 함께 사는 힘을 마련해 줍니다. 큰 이득을 얻을 때가 더 많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패배인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죽음이 있었기에 부활이 가능했고,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사랑에 집중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은 이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절대’라는 말에 걸려 넘어져서 커다란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 위에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 모든 권한 주셨지요.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유익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집중하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시선을 외면하고 대신 주님께 집중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 모욕당하고, 세상 안에서 단죄받는다고 해도 억울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들고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청렴은 백성을 이끄는 자의 본질적 임무요, 모든 선행의 원천이요, 모든 덕행의 근본이다.

- 다산 정약용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생명이 있어 아름답고 믿음이 있어 순명합니다.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믿음이 마음을 움직이고 생명을 움직입니다. 예수님께서 가고자 하시는 길은 믿음의 길이며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의 진리는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해줍니다. 

예수님의 인격으로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십니다. 믿음도 인격이며 영원한 생명도 실천하는 인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심어린 마음으로 세상을 이끄시고 진실하신 사랑으로 십자가의 수난을 이겨내십니다. 마음을 일으켜서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체험하게 합니다. 

믿음은 변화이며 시련을 이겨내는 힘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느님의 힘을 믿는 힘이며 하느님께 순명하는 참된 삶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참된 삶입니다. 참된 삶은 영원한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께 순명합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영원한 생명을 드러냅니다. 

생명을 살리시는 하느님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살과 피가 되시는 믿음의 주님께서는 이미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이 되셨습니다. 열려있는 삶 열려있는 믿음입니다. 우리또한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믿음이길 기도드립니다. 

살아가는 믿음이 영원한 생명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으로 온전히 이루어내신 영원한 생명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 우리의 인격이며 분리될 수 없는 인격과 생명입니다. 하느님께 순명하는 생명의 날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