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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4/06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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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당신 백성을 기쁨 속에, 뽑힌 이들을 환호 속에 이끌어 내셨네. 알렐루야.

하느님, 풍성한 은총을 베푸시어 믿는 이들이 불어나게 하시니 하느님께서 뽑으신 이 백성을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세례성사로 새로 난 저희가 불사불멸의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2024년 4월 6일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4월 6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4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4,13-21)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오늘 복음
    (마르 16,9-15)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오늘 말씀 카드
    (마르 16,11)
    그러나 그들은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마르 16,11)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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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마르 16,9-15
오늘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10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11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12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14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5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4월 6일
이정우 도미니코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10:08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사랑을 확인하였을 때 비로소 우리는 완고한 마음에서 풀려날 수 있다.

부활 팔일 축제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토요일 복음은 지금까지 봉독된 내용, 곧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나타나셨는지를 묘사한 내용을 종합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내용이 소개되는데, 모두 ‘나타나다–믿지 않다’라는 동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지만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습니다. 그 뒤 시골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지만 다른 제자들은 믿지 않습니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 몸소 나타나시어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마지막 과제를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 제자들의 불신을 넘어서는 예수님의 신뢰가 강조되어 있는 것이고 그분의 이러한 신뢰는 제자들을 담대하게 만들어 이 과제를 수행하게 합니다. 

독서는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 놀라워하였다.”라고 증언합니다. 자신들을 믿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그들은 놀라운 담대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믿어 주심을 알게 되었을 때 나오는 두려움 없는 당당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날마다 미사를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신자인 우리가 과연 불신과 완고함에서 온전히 자유로운지 질문하여 봅니다. 부활은 구원이고, 그 구원은 그분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감사에서 시작합니다. 

사랑을 확인하였을 때 비로소 우리는 완고한 마음에서 풀려날 수 있고, 그 믿음은 우리를 ‘파레시아’(담대함)로 인도합니다.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되지 않는 견고하고 담대한 자유로 우리를 이끄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큰 믿음은 큰 사랑과 같다.

오늘 복음을 보면, 당신을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어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실까?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주님을 믿지 않던 제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열렬한 복음 선포자 되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을 믿지 않은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님께서 맡기신 것은 제자들이 복음 선포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저 주님의 희망 사항이었을 뿐일까요? 

제 생각에 제자들은 주님을 믿지 못해도 주님은 제자들을 믿으셨고, 그래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셨을 겁니다. 

제 생각에 큰 믿음은 작은 믿음을 키웁니다. 다시 말해서 큰 믿음은 작은 믿음을 자라게 합니다. 그래야 큰 믿음이라고 할 수 있고, 자라게 하지 못하는 믿음은 큰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 번 배신으로 믿음이 끝나는 믿음은 가장 작은 믿음입니다. 열 번 배신했는데도 여전히 믿는다면 그만큼 큰 믿음입니다. 아무튼 큰 믿음이란 자기 믿음을 배신해도 믿는 믿음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큰 믿음은 자기 믿음을 배신해도 그로 인해 상처 입거나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큰 믿음은 배신할 것을 알고도 믿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어줌으로써 그의 믿음을 자라게 하려고 속아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신당해도 상처 입거나 불행해지지 않으며 그저 큰 믿음이란 이런 거라는 것을 배우게 합니다. 그래서 큰 믿음은 큰 사랑과 같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런 상황에도 안 믿으면 그냥 악하여서

세상에는 우리를 속이려는 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도 여러 번 속은 적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속이려고 하는 것을 알아서 주의하는데도 속습니다. 저희를 속이려 하는 이들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강한 이들입니다. 그 속임수가 들통나더라도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 갈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놓고 속입니다. 한 번에 목숨을 거는 사기꾼은 없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권력이 있고 돈이 많은 이들이 사람을 잘 속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빵 하나 훔쳐도 큰 벌을 받지만, 힘 있는 이들은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쉽게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세속적 이익을 노리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은 돈과 권력을 노리고 속입니다. 혹은 결혼하기 위해서도 속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익이 없이 속이는 예는 없습니다. 수산나를 죽이려던 두 노인은 자기들의 분노를 풀기 위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했습니다. 

세 번째는 설득력 있는 말로 속입니다. 설득력은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이해할 수 있는 논리를 쓴다는 것입니다. 보이스 피싱과 같은 경우는 좀 황당하기는 합니다. 그래도 설득력이 없지는 않습니다. 자녀가 갑자기 사고가 날 수도 있고 부모님이 갑자기 돈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긴 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세 번째와 비슷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누가 들어도 타당한 말로 사기칩니다. 만약 보이스 피싱을 하는데, 자녀가 지금 달나라에 가서 오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황당한 주장으로 속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활 증인들의 말을 믿지 않은 것 자체가 악한 마음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가 죽어서 “당신이 나타나지 않아서 안 믿었어요!”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활에 대한 증언은 절대 누군가를 속일 수 있는 것과는 반대되는 내용들입니다. 

첫 번째 이 주장을 한 이들은 법망을 피해 갈 수 있는 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당시 숫자에도 들지 않는 여인들이었고 지방으로 내려가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사도단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잘못 주장했다가는 언제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뒷일도 보지 않고 자기주장에 목숨을 거는 이들은 사기꾼일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부활의 증인들이 그 주장을 해서 세상에서 얻는 이익이 있을까요? 사도들도 안 믿는데 무슨 이익을 볼까요? 이미 세상은 권력자들에 의해 부활에 대한 말을 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약한 이들이 그런 주장을 한다면 그건 속임수일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이들의 주장은 일관성도 없고 설득력도 없습니다. 그냥 보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에게 예수님이나 천사가 나타났는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냥 주장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그 주장을 이해시키기 위해 이성적 조작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가 가장 중요한데,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세상 창조 이래 가장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부처까지도 죽음에 대해 모른다고 하고 죽었는데,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여기저기서 나타난다는 말은 우리 자녀가 달나라 가 있다고 하는 말보다 당시에는 더 황당한 주장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이 황당한 주장을 하는 것은 그냥 죽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절대 부활에 대해 증언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건 속임수일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그래도 안 믿는 것은 믿기 싫다고 보아야 합니다. 신이 인간이 될 수 없고 또 인간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는 내 생각이 틀리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무언가의 확신을 얻으려고 할 때, “네가 하는 말에 네 목숨을 걸 수 있어?”라고 묻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약자들이 세상 이익과 상관없이 비이성적인 가장 황당한 주장을 지속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진실일 확률이 그 무엇보다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황당한 주장으로 이미 자기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으면, 그건 그냥 믿기 싫은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이 있습니다. 바로 프랭클린 루스벨트입니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한 사람이 루스벨트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이류의 지능과 일류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다.” 
 
뛰어난 지능이 네 번이나 대통령을 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그의 ‘기질’이라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정신이었습니다. 뛰어난 운동 능력으로 훌륭한 성적을 냈지만 자기 통제를 통해 타락의 길로 떨어지는 운동선수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됩니다. 재능이 뛰어나도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는 기질로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훌륭한 재능이 없음을 인정합니다. 문제는 저 자신을 통제하는 기질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기질의 변화를 조금씩 가져올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유혹이나 충동 그리고 본능에 탐닉하는 순간에 주님을 떠올리며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리가 가장 행복한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돈과 명예를 얻어야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사실 돈과 명예에 목적을 두면 채우면 채울수록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 집중하게 되면, 돈과 명예에 목적을 두기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통해 자기 기질의 향상을 가져오고, 기질의 변화를 통해 세상 것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의 능력은 어떻습니까? 성격이나 환경은 또 어떻습니까? 앞서 이야기했던 기질도 형편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으면, 예수님과 함께했을 때 들었던 수난과 죽음 예고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도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부족함이 많은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포기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을 포기하기보다는, 그들에게도 나타나셔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족한 제자이지만, 그들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부족하지만 주님과 함께했을 때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너무나 부족하고 나약합니다. 스스로 이를 인정한다면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길을 끊임없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 부족한 제자들이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성공적으로 거둔 것처럼, 우리 역시 부족함 안에서 하느님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자.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표현하려고 하지 마라.

- 닐스 보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가장 큰 아름다움은 마음에 있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우리들 마음을 예수님께서 꾸짖으십니다. 뭘 보는지도 모르는 어중간한 부활이 아닙니다. 어느 것도 믿지 않는 요지부동한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무엇을 의심하는지 모르면서 우리는 의심합니다. 어쩔 수 없는 우리 믿음의 허기와 불신의 냉소를 우리 삶에서 만납니다. 일어난 사실조차 우리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자신이 부활의 삶을 모른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되는 고유한 신비입니다. 마음이 있어도 마음을 옮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완고한 마음으로 우리를 위한 부활이 하느님만을 위한 부활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자연스레 겸손도 깊어집니다. 

부활을 얻은 기쁨이 복음의 가장 좋은 기쁨입니다. 그 기쁜소식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하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을 꾸짖는 더 큰 마음을 만나는 마음의 기쁜 부활입니다. 

마음에서 벗어나니 마음이 향해야 할 부활의 방향을 만납니다. 우리의 삶에서 부활을 선포해야 할 우리들 마음입니다. 마음을 되살리는 부활의 기쁜 복음입니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유일한 부활의 따뜻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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