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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4/02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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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물을 마시면, 굳세어지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지혜가 너희를 영원히 들어 높이리라. 알렐루야.

하느님,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저희를 치유해 주셨으니 천상 선물도 풍성히 내리시어 지금 세상에서 맛보는 기쁨과 자유를 하늘에서 온전히 누리게 하소서.

2024년 4월 2일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4월 2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4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2,36-41)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 오늘 복음
    (요한 20,11-18)
    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오늘 말씀 카드
    (요한 20,18)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요한 20,18)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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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요한 20,11-18
오늘 복음

 

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4월 2일
신현범 베드로 신부

 

✚ 교황님 4월 기도지향 00:23

✚ 미사시작 00:38

✚ 강론시작 09:30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에는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복음은 ‘울다’(‘클라이오’)라는 동사를 네 번이나 쓰는데, 좌절하고 분노하였지만 끝내 항의조차 하지 못하여 상처 입은 감정을 묘사합니다. 

한편 독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로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는 유다인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가책을 느끼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는데 그 답은 복음의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울고 있던 마리아는 무덤에서 “뒤로 돌아서”고 “마리아야!”라는 부르심에 또 “돌아섭니다.”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무덤에서 돌아서고 부르시는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스 말 동사 ‘스트레포’는 몸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동작을 의미하지만, 심경과 인식의 ‘변화’를 뜻하기도 합니다. ‘돌아서다’라는 행위로서 그는 ‘모름’(“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에서 ‘앎’(“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으로 건너갑니다. 진정한 파스카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시신이 없어졌다.’고만 생각한 탓이었을까요?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깨닫자, 본능적으로 그분을 붙잡습니다. 더 이상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즉각적이고 단순한 반응이었을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하여야 할 일은 당신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이 과정에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은, 이 이야기 바로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썼던 그리스 말 동사 ‘호라오’(부재를 통하여 현존을 믿게 되는 의미의 ‘보다’)를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도 적용합니다. 

이제 그가 주님의 부활을 보고 믿게 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담담한 어조로 말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야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그리고 우리는? 

제 생각에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은 이런 질문을 전혀 하지 않고 사는 사람보다 고민은 많이 하겠지만 삶을 잘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하지 않던가요? 세속적으로도 아무 생각이나 고민 없이 장사하는 사람보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사람이 더 장사를 잘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오늘 사람들은 그들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베드로의 답에 따라 인생이 완전히 뒤바뀔 수도 있는 질문입니다. 회개로 치면 큰 회개의 순간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당신들이 주님을 죽였다고 직공을 합니다. 여기서 직공이란 제가 만들어 낸 말로 에두르지 않고 직접 공격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아프게 할까 봐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공을 하니 사람들은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합니다. 

그리고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데 이렇게 꿰찔리듯 마음 아픈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을 수 있어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요즘 심기 경호란 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도록 참모들이 알아서 마음 불편할 말들은 차단하는 것인데 이것은 대통령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아주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곧 조금만 직언과 직공을 해도 마음의 상처를 받으니 그 다치기 쉬운 마음과 허약한 심기를 잘 살펴 조심조심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런 심약(心弱)함으로는 ‘네가 죽였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과 같은 직공을 받아들일 수 없고, 그런 충고를 받아들여 큰 회개를 할 수도 없습니다. 

전 존재적인 큰 회개(悔改)는 회심(回心)에서부터 시작되는데 회심은 심통 곧 마음이 꿰찔리듯 아픈 것에서부터 시작되지요. 그러니 우리는 우선 이것을 알아야겠고 심통을 두려워하지도 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다는 우리도 지금 하느님을 죽이는 삶을, 이웃도 죽이고 자신도 죽이는 삶을 살고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자유주의적인 정신과 문화에 지배당해 한편으로는 물신주의로 신을 죽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주의로 신을 죽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요즘 하느님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스마트 폰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에서 헤어나지 못해 하느님 말씀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유튜브 방송 없이는 심심해서 한시도 살 수 없는 사람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경쟁과 스트레스를 피해 하느님께로 가지 않고 자연을 찾아드는 사람도 많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자녀다’가 아니라 ‘나는 자연인이다’ 하며 삽니다. 

제 생각에 이런 것들에서 돌아서는 것, 이것이 오늘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회개와 세례이고,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회개요 받아야 할 세례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부활 체험에도 단계가 있다: 우선 내가 왜 우는지 알아야!

1년에 100억 이상을 버는 인기 강사 이지영 선생도 중3 때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집이 워낙 가난했고 부모님은 동시에 암에 걸리셨고 심지어 지하에 사는데 홍수 물까지 들이닥쳐 옷가지는 물론 그동안 필기한 모든 것을 버려야 했습니다. 선배가 버리고 간 교복을 입고 남들이 빌려준 연필과 노트로 공부하고 있는 그 비참함은 누가 봐도 살 의욕을 잃게 만듭니다. 

지영 학생은 국어 수업 중에 벌떡 일어나 나갔습니다. 선생님이 어디 가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죽으러 간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잡아주려니 생각했겠지만, 선생님은 화장실 빨리 다녀오라고만 해 주었습니다. 학교에서 가까운 건물 맨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무서워서 못 뛰어내리겠더랍니다. 그때 느낀 것은 삶은 죽음보다 소중하다는 사실입니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살아보자고 결심하고 악착같이 공부해서 서울대에 들어갑니다. 

인생 두 번째 전환점은 법을 공부할 때였습니다. 대법원 판례를 배우며 한 대법원장에게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묻지마 살인사건 용의자에 대한 재판이었는데, 본인도 자살 시도하며 죽여달라고 하고 검사나 모든 여론이 사형을 구형하라고 압박을 가해왔지만, 대법원 판사는 무기징역을 구형하였습니다. 

그는 죽으려고 했던 것에 착안하여 재판 때 피고인에게 “자살. 자살. 자살….”이라는 단어를 열 번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살이 “살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눈물을 쏟았고 대법원장은 자신도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자신도 죽고 싶었던 이지영 선생은 아이들에게 자기 경험을 나누며 힘을 주고 싶었습니다. 내가 힘들어서 우는 이유는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 이유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천사를 먼저 만납니다. 천사는 “여인아, 왜 우느냐?”라고 묻습니다. 왜 울고 있었을까요? 그녀에겐 스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다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돌려달라고 청합니다. 아직 자신이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동산지기는 마리아의 이름을 부릅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없는 존재임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드디어 만났습니다. 

“나의 선생님”(라뿌니!)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나를 우울하게 하는 게 나를 이끌어줄, 나의 이름을 불러줄 참 스승을 만나지 못했음을 알지 못하면 나의 모든 에너지는 돈을 버는 곳에, 애인에게, 혹은 세속적 성공을 위해 다 써버릴 것입니다. ‘예수는 역사다’라는 영화에서 보듯 알려고만 하면 믿게 됩니다. 그러나 알고 싶은 욕구가 헛된 곳에 소진되게 됩니다. 

김양회 요한 보스코 신부님은 남아프리카 여행 중에 요하네스버그 국제공항에서 앙골라 가는 비행기를 놓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면세점에서 아프리카 토속품들을 보다가 정신이 팔려 미처 시간을 확인하지 못한 것입니다. 영어 실력도 좋지 못해서 출입국 직원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을 만나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어를 모르는 것은 괜찮았지만 자신이 신부라는 것은 밝히기가 너무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사제가 영어도 못하고 비행기도 놓치고 한다는 것은 그 상황에서도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 직업에 대해 질문을 했고 신부님은 결국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사실대로 고백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람도 성심성의껏 도와주어 다른 항공사의 비행기를 작은 수수료만 내고 타고 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참조: 김양회 신부, 부르면 희망이 되는 이름, 바보 같은 신부]

맨날 똑같은 내용일지 모르지만, 저도 알지 못했습니다. 삶이 우울한 이유는 돈이 없어서, 미래가 불안해서, 연애가 안 돼서 등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사.시.를 발견하고는 ‘스승’이 없어서였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자주 말씀드렸지만, 나의 스승이 되어주었던 이 책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신학교에서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우는지 살펴봅시다. 그런데 사실 그런 것들은 나를 울게 만들 수 없는 것들입니다. 진짜 내가 울어야 하는 이유는 나를 잡아줄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적어도 예수님을 알 수 있는 책이라도 읽어봅시다. 반드시 나의 이름을 부르며 오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023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특이한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것도 조그만 이벤트성 행사라 할 수 있는 지역 대회가 아닌 국제 대회가 열린 것입니다. 그 대회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쓰레기 줍기 세계 대회” 
 
정해진 시간 내에 쓰레기를 가장 많이 줍는 팀이 우승하는 경기입니다. 자그마치 21개국에서 참가했고, 이 참가자들은 인근에서 90분간 550kg의 쓰레기를 수거했습니다. 한 참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기든 지든, 모두가 기분 좋은 스포츠였습니다.” 
 
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어떤 훈련을 했을까요? 90분 동안 계속해서 쓰레기를 주울 수 있는 체력을 키웠을 수도 있습니다. 또 쓰레기인 것과 쓰레기 아닌 것을 구별하는 훈련을 했을 수도 있겠네요. 무엇보다도 도시를 깨끗하게 만들겠다는 마음이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쓰레기 줍는 것도 하나의 의미 있는 대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 실천하기 세계 대회’를 한 번 개최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더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채점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특히 자기들의 우승을 사랑의 마음으로 양보할 것이기에 우승자를 가리기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장 행복한 대회가 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만을 보시고 우리에게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는 데 주저할 때가 많습니다. 받는 사랑, 조건적인 사랑, 그래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 대한 사랑을 보여 주는 한 여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그녀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습니다. 왜 울고 있을까요? 누가 때려서 우는 것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 우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님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 주님의 죽음을 슬퍼하는 눈물이었습니다. 그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주님께서 직접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었음에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자기 이름을 부르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사랑의 마음이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했습니다. 이는 우리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또 사랑을 실천하는 데 주저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을 알아볼 수도 그래서 주님과 함께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만이 주님을 알아보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오늘의 명언

가장 현명한 사람은 자신만의 방향을 따른다.

- 에우리피데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산수유, 생강나무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이 저마다의 이름으로 피어납니다.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예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부르며 누구를 찾고 있는지요. 주님을 찾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주님을 찾으면서 알게 되는 사랑의 기쁨입니다. 주님을 믿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가 뵈올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사라지지 않을 이름을 부릅니다. 메아리가 아니라 뜨겁게 만나는 사랑의 인격입니다. 사랑으로 되돌아오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죽은 자의 이름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이름입니다. 미처 몰랐던 또 다른 부활의 모습을 기쁘게 만납니다. 우리는 어떠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지요. 당신의 이름으로 행복하고 가슴 떨리고 마냥 기뻤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거리만큼 서로의 이름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름을 먼저 따뜻하게 불러주십니다. 보살펴 주셨던 함께 하셨던 시간이 되살아납니다. 사랑 안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나면 부활은 현실이 됩니다. 살아야 할 시간까지 가슴 설레는 부활이 됩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부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현실을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렇게 나눕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아름다운 사랑은 서로를 다정하게 불러주는 거기에서 다시 깊어지고 다시 높아집니다. "마리아야!"하고 부르시는 부활의 오늘이며 가슴 벅찬 부활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어느 누구의 이름을 불러주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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