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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3/11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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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로지 주님만 믿나이다. 가련한 저를 굽어보시니, 당신 자애로 저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하느님, 거룩한 성사로 세상을 새롭게 하시니 현세의 교회를 도우시어 영원한 나라로 이끌어 주소서.

2024년 3월 11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3월 11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3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요한복음 4장 50절)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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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주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요한복음 4,43-54
오늘 복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43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다. 

44 
예수님께서는 친히,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증언하신 적이 있다. 

45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가시자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분을 맞아들였다. 그들도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축제 때에 그곳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46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47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 

48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49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51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52 
그래서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53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5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어 두 번째 표징을 일으키셨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3월 11일 05:00
윤홍민 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7:05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부활에 이르는 길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극심한 슬픔 가운데 하나는 자녀의 죽음입니다. 그러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누군가 말하여 준다면 이보다 ‘기쁜 소식’이 있을까요? 오늘 복음과 독서는 죽음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구원을 선포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새로운 생명의 창조가 약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하여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중병에 걸린 아들 때문에 상심한 어느 왕실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아들을 고쳐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믿음’을 강조하고자,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표징과 기적’을 믿는 우리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결국 관리는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납니다. 

아들을 고쳐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나는 모습은 참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이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결과로 받아들이겠다는 절대적 순명의 자세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역경의 순간을 건너게 하는 것은 ‘말씀’과 그에 대한 ‘믿음’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말씀이 살아 있고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실재’임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곧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말씀’임을 믿는 것, 그것이 부활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를 모범적으로 보여 준 왕실 관리는 구원을 체험하였고 “그와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 존엄한 믿음이 존엄한 구원을 가져온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믿기로 한 믿음과 믿게된 믿음

오늘 복음을 보면 즉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죽어가는 자기 아들에게 주님께서 직접 가달라고 왕실 관리가 조르지만 주님께서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로 거절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라고 복음은 기술합니다. 그래서 집에 갔더니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시간에 자기 아들의 병이 나은 것을 확인케 되고,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라고 합니다. 

주님 말씀을 믿고 떠났다고 하였는데 나중에 기적을 확인하고 믿게 되었다는 말을 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믿은 것’과 ‘두 번째 믿게 된 것’ 사이에 뭔가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많이 생각지 않아도 첫 번째 믿음은 일단 믿기로 한 것이고 두 번째 믿음은 그 믿음이 완성되고 완전해진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기로 하는 믿음, 이 믿음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도박으로 치면 믿는 쪽으로 패를 건 겁니다. 그냥 가라는 주님 말씀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앞에 두고 믿는 쪽으로 의지적인 선택을 한 것인데 그 결과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믿지 않는 쪽으로 선택한다면 그것은 그 믿음을 싹부터 잘라버리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토록 믿기로 하는 것에서 시작되는데 그 믿음은 아직 불완전하고 믿음의 싹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이 믿음의 싹이 중요하고, 이 믿음의 싹은 자기 믿음이 완전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는 것으로 완전해지고 더 확장됩니다. 나무로 치면 믿음의 작은 싹이 나무로 자라고, 한 나무로 그치지 않고 군락을 이루게 된 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오늘 이 이야기에서 의지적 믿음과 체험적 믿음의 관계를 볼 수 있고, 의지적 믿음의 그 작은 싹이 이후 체험들을 통해 나무로 성장하고 완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겨자씨 같은 믿음이 큰 나무로 자란다는 말씀이 이 말씀이 아닐까 묵상하게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적과 표징의 차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께서 모세가 장대에 구리뱀을 달아 올린 것처럼 당신도 십자가의 죽임을 당해야만 함을 설명하십니다. 구리뱀이 없었다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죽어야만 했습니다. 다만 뱀에 물렸더라도 구리뱀을 바라본 이들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냥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7년 10월 13일, 포르투갈의 파티마 근처 코바 다 이리아 들판에서 일어난 태양의 기적은 가톨릭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에도 대서특필 될 정도로 수천 명의 사람이 목격한 기적이었고 성모 마리아를 여섯 번 보았다고 주장한 세 목동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날 비가 오고 있었는데, 구름 중간이 뚫리며 그 밖으로 태양이 성체 모양으로 땅에 떨어지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다시 올라갔습니다. 당시 모였던 사람들은 종말이 온 줄 알았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자 땅은 말라버렸고 옷도 말라 있었고 병이 들었던 사람들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실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하는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기적을 보았던 사람이 모두 구원받았을까요? 여전히 기적에 반대하던 이들은 그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고 그 기적을 보고 믿었던 사람들도 분명히 많은 수가 다시 냉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지만, 표징은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한 복음에서 기적이나 이적, 그리고 표징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갈릴래아 지방 사람들은 처음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 예루살렘에 다녀오고 나서는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일으킨 많은 기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표징은 오늘 카나의 혼인 잔치에 이어 두 번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분명 기적과 이적, 그리고 표징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기적과 이적은 어느 정도 믿음은 줄 수 있지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주지 못합니다. 반면 표징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줍니다. 무엇이 다른지 알아야 합니다. 

요한 복음에서 기적은 누군가가 하느님의 사람임을 알려주는 표징이고 이적은 나도 그 누군가가 될 수 있음을 믿게 하는 표징입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표징인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의 믿음이 아니었으면 그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치 않는 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일꾼들이 정결례 항아리에 물을 붓는 믿음도 요구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기적이 인간의 믿음의 순종이 개입하였기에 나도 그렇게 순종하면 나를 통해서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음을 믿게 합니다. 이것이 표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왕궁 관리는 믿고 떠나야 하는 시험을 받습니다. 하루가 지났을 때 집에서 오는 사람들을 만나 그 기적이 일어난 시간이 예수님께서 종의 병이 나을 것이란 시간과 일치함을 알고 온 가족이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왕궁 관리는 자신의 믿음으로도 표징이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반면 기적은 어떤 누군가가 “나는 하느님이 보낸 사람이니까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고 너희는 못 하니까 나에게 순종해야 해!”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이단과 사이비에서 이런 일들을 하며 사람을 모읍니다. 그러나 참 믿음으로 성정하지는 못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또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도 표징이라 말합니다. 여기서는 제자들이 빵을 나누어주는 믿음의 행위가 요구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기적에 당신 제자들을 참여시킴으로써 누구나 그 기적을 이루는 주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태생 소경을 고치는 장면에서도 소경이 믿음으로 흙을 실로암에서 씻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표징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라도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표징의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레지오 단원이 함께한 묵주기도로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마귀가 쫓겨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표징입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표징이 누군가에게 믿음을 줍니다. 기적은 ‘그분이니까 할 수 있고 나는 안 돼!’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면, 표징은 ‘저들도 할 수 있으니 나도 할 수 있겠네!’라는 믿음을 주어 본성이 상승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1913년 엘리너 H.포터가 집필한 고전 소설 ‘폴리아나’(Pollyanna)를 기억하시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초등학생을 위한 세계 명작으로 꼭 등장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만화 영화로도 나왔었다고 하더군요. 이 책의 주인공은 이모 집에 얹혀삽니다. 그러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자기 사는 곳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꿔 나간다는 아주 훈훈한 내용입니다. 
 
주인공 폴리아나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불행한 삶 속에서도 매 순간 ‘다행한 일 찾기’ 때문입니다. 저택 같은 집에서 아주 좁고 퀴퀴한 다락방에 살게 되었지만, 전망이 좋아서 그림 같은 경치만 봐도 정신 수양이 되어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또 방에 거울이 없지만, 주근깨 난 얼굴을 안 보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다행한 일 찾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신부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모임에서 한 신부가 방귀를 시원하게 뀌었습니다. 모두가 그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말이지요. 그러자 한 신부가 “야~ 그러다 똥 싸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그 당사자 신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똥 싸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마음에서 행복이 가까워짐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폴리아나처럼 ‘다행한 일 찾기’ 놀이를 해 보면 어떨까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주님을 체험하는 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매 순간 느끼는 방법이 있으니 참 다행이 아닙니까? 
 
왕실 관리의 아들이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이 왕실 관리는 예수님을 찾아와 고쳐 주십사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거절의 뜻을 비치지만, 왕실 관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부탁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 
 
왕실 관리이니 재산이 많이 있고 또 권력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가지고 아들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만을 전해주십니다. 만약 재산과 권력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에 화를 냈을 것입니다. 자기 권력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끌고 갈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고 떠나갑니다. 믿음만으로 충분한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재산과 권력에만 매여있었다면, 그는 다행한 일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너머에 있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다행한 일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매여있는 것이 혹시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우리 편이라 정말로 다행이지 않습니까?

 

오늘의 명언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 위해 그토록 긴 시간이 필요했다.

- 앙리 마티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물이 얼었다 풀리듯이 봄은 믿음처럼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빼앗길 수 없는 믿음의 몫입니다. 표징과 이적에만 집착하고 의존하는 믿음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실은 보이지 않는 은총이 믿음의 감사입니다. 

믿음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반성합니다. 믿음의 삶은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삶입니다. 멈출 수 없는 믿음의 여정이며 믿음의 생활입니다. 믿음의 하느님께서 하시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다면 하느님을 향한 간절함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쓰러진 믿음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단순한 도피처가 아니라 치열한 우리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치유이며 화해이며 회복입니다. 

십자가와 사람이 한 몸이듯이 가장 소중한 믿음과 사람 또한 한 몸입니다. 마음이 무너지고 억장이 무너진 자리에서 믿음의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일뿐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고 믿음으로 다시 일어섭니다. 소중한 모든 관계가 믿음으로 다시 만나는 은총과 생명의 만남이길 기도드립니다. 믿음을 따라 번지는 은총과 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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