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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3/12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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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기쁘게 마셔라.

주님, 이 참회와 기도의 때에 저희 마음을 바로잡아 주시어 파스카 신비를 올바로 깨닫고 열심히 살아 형제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하게 하소서.

 

2024년 3월 12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3월 12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3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에제키엘서 47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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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

 

 

요한복음
5장 1-16절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의 ‘양 문’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4)·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10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11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13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14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5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16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3월 12일 05:00
박우성 암브로시오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8:02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너도 낫기를 원하느냐?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생명의 물’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사막 지역인 이스라엘 풍토에서 예로부터 물은 중요한 생명의 원천이었습니다. 에제키엘서 본문은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로 주변 모든 것이 되살아남을 묘사합니다. 성전의 물이 “흘러들어 가면” 그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이 넘칩니다. 복음에서는 이 ‘생명의 물’이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선언합니다.

벳자타 못 근처에 서른여덟 해 동안 병들어 있던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 그에게 다가가십니다. 

생명의 물이신 분께서 그에게로 흘러들어 가시어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물으시는데 그는 대답 대신 원망 섞인 한탄을 늘어놓습니다. 물이 출렁거릴 때 아무도 자신을 데려가지 않아 이 지경으로 오래 있었다는 푸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불평을 타박하지 않으시고, 그가 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나을 수 있는 드넓은 전망을 제공하여 주십니다. ‘생명의 물’은 ‘벳자타의 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너도 낫기를 원하느냐?’ 

이 질문과 함께 생명의 물이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으로 흘러들어 오십니다. 의미 없는 신세 한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의 물이 내 안에 흘러들어 오도록, 지나가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고통을 상징하는 ‘들것’을 들고 걸어가는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 주변에서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성전다운 성전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돌아가신 백안젤로 수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람들이 사람, 사람 하는데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사람이지!’ 

이 말씀이 생각난 것은 ‘성전이면 다 성전인가, 성전이 성전다워야지 성전이지!’ 이런 말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은 ‘성전다운 성전’으로 잡아봤습니다. 

성전다운 성전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께서 그 안에 계신 성전이지요. 하느님께서 아니 계시면 아무리 아름답게 지어도 성전이 아니고, 신자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성전이 아니지요. 

그러나 오늘 독서와 복음에 비춰 볼 때 성전이란 생명의 물이 넘쳐흐르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또한 사랑이 넘쳐흐르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공동체는 생명의 물이 없고 그래서 죽어가는 공동체란 말입니다. 왜냐면 사랑이 없는 공동체는 아무런 관심이 서로 간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환자는 서른여덟 해나 앓았는데도 주님처럼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고 성전 물에 데려가 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병을 치유할 수 없었습니다. 

관심이 없는 곳, 이런 곳이 사랑이 없는 곳의 대표적인 곳입니다. 다음으로 사랑이 없는 곳이란 관심은 없고 욕심만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상대는 내 욕심의 대상일 뿐입니다. 

당연히 서로는 욕심의 희생자들이 될 것이고, 심지어 욕심 때문에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당연히 생명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설치겠지요? 

세 번째는 관심도 많고 욕심도 많은 곳입니다. 이런 곳에는 사랑도 있겠지만 사랑만큼 미움도 많을 것입니다. 

오늘은 너무 늦게까지 잠을 자 제목대로 강론을 완성하지 못하고 이대로 올려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 사랑을 거부하는 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열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연못에서 앉은뱅이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큰 사랑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그것보다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긴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왜 이리도 큰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할까요? 그것을 받아들일 그릇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가출하여 길을 헤매는 거지 아이를 집에 데려온 적이 있습니다. 씻겨주고 저희 옷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이는 당신과 같은 처지의 아이를 보고 동정심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거의 양자로 삼으려는 어머니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이 세상은 그렇게 따듯한 곳이 아닙니다. 자기 부모로부터도 분명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모도 사랑해주지 않는 자기를 생판 모르는 아주머니가 사랑해 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 아이는 우리가 학교 간 동안 돼지 저금통을 다 털어 도망을 갔습니다.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찾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아보지 못하면 자기 부모와 세상을 원망하기 위해 다른 사랑을 거부하게 됩니다. 원망하는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해주려는 사람도 거부하고 밀쳐냅니다. 그렇게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은 알아볼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람들이 하느님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사랑을 알아볼 수 있게 그 사랑으로 이뤄진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 공동체에서 하느님 사랑의 조각을 맛봐야 합니다. 만약 성당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세상의 공동체와 큰 차이가 없다면 미사에 나오는 것만으로 하느님 사랑을 절대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가 새끼 원숭이를 엄마 원숭이와 격리하여 실험하였습니다. 어미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원숭이는 자해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다른 원숭이들을 극도로 멀리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원자 원숭이를 넣어주기로 하였습니다. 

어미와 몇 달을 살며 세상이 온통 사랑으로 여겨지는 원숭이를 같은 우리에 넣었습니다. 처음에는 도망 다니다가 그 원숭이가 털을 골라주자 자신도 미안한지 치유자 원숭이의 털을 골라주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다른 원숭이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유를 먹고 밥을 먹고 떡을 먹고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점점 더 단단한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체해서 더 딱딱한 것들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됩니다. 유튜브에서 보니 성당 다니던 한 자매가 스토커에게 쫓겨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 자매에게 어떤 사람도 신경 써주지 않았습니다. 

그 자매는 세상에 대한 원망과 두려움으로 전기가 통하지 않는 이상한 옷을 만들어 입고 문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 남자가 자기를 전기로 죽이려고 한다는 피해망상증이 생긴 것입니다. 공동체로부터 하느님 사랑을 조금이라도 체험하지 못하면 성체 성혈은 너무 멉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을 보아도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립니다. 

성사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이들이 줄어드는 이유는 그 성사를 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사랑을 가진 공동체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장 발장도 주교의 사랑을 체험하고 나서야 다시 종교에 귀의할 수 있었습니다. 외적인 선교 이전에 사랑의 친교가 가득한 공동체를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들고 말합니다. 
 
“이 시간에는 여러분에게 만 원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만 원을 주도록 저를 설득해 보실 분이 있나요?” 
 
몇몇 지원자가 있었고, 그중에 한 명을 지목하니 왜 자신이 만 원을 가져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휴대전화 충전기가 필요하고, 유니세프에 기부할 예정이고, 내게 꽃을 사줄 생각이랍니다. 저는 “그러시리라 믿어요.”라고 말했지만, 만 원짜리 지폐를 주지 않고 손에 꼭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원자는 또 다른 말로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지 않습니다. 이제 다른 지원자가 저를 설득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지원자들이 제게 하지 않은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만 원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 원이 필요한 이유만을 이야기했을 뿐이지, “만 원을 제게 주세요.”라는 말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내용을 명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잘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알아서 해주기만을 바랄 뿐인지 이유만 늘어놓습니다. 단순히 부탁하면 되는데, 복잡하게 꼬아서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이런 모습이 바로 과거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켜야 하느님께서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당연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은 조금 달랐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율법은 사람을 구속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연못에서 병자를 일으키시어 자신의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문제는 이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율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유다인들은 그 기적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낸다고 여기기는커녕 예수님을 단죄하는 절대적 증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가장 중요한 말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저것을 따지면서 정작 주님께서 듣고 싶은 말을 피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기 생각을 앞세워서 다른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또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무는 것을 방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 모두를 위해 주님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어떤 대화도 없이 즉, 기도나 어떤 신앙생활도 하지 않았던 분이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러실 수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하기가 쉽던가요?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전혀 대화를 나눈 적 없는 사람은 부탁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부탁도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

- 니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건강한 삶으로 이끄시는 주님을 통해 배웁니다. 건강한 삶의 열망은 주님을 만나는 은총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오는 그 누구도 막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진심을 읽어주시며 건강한 삶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건강한 삶이란 주님과 우리 우리와 주님의 합창처럼 또는 십자가처럼 고통과 실패의 들것을 들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보는 것입니다. 건강한 삶 자체가 대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잔소리를 하지 않으십니다. 진정한 뜻이 서로 소통되길 바라십니다. 

참된 소통은 희망과 치유의 불씨를 서로 끄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번 쓰고 버려야하는 일회용 물건이 결코 아닙니다. 선악의 갈등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오히려 내면적인 체험입니다. 하느님 체험이 없는 곳에는 지켜야 할 안식일의 규정만 무성할 뿐입니다. 

건강한 삶은 정신을 차리는 삶입니다. 서른여덟 해나 앓아 누웠다 치유된 사람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내적으로 병든 사람들입니다. 사랑이 없는 우리가 병든 사람입니다. 

따스한 마음으로 축하하고 기쁘게 함께 지낼 수 있는 건강한 우리들이 되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건강한 삶이란 주님과 함께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죄가 아니라 건강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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