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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3/14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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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인자하신 주님, 주님의 종인 저희가 참회로 용서를 받고 착한 생활로 거룩하게 되어 주님의 계명을 언제나 성실히 따르며 깨끗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소서.

2024년 3월 14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3월 14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3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예레미아서 31장 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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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요한 5,31-47
오늘 복음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31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32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34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35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36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37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38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40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41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42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44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45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46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47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3월 14일
윤홍민 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8:00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정직하고 충실한 증언

오늘 복음에는 ‘증언’이라는 말이 열두 차례나 나옵니다. ‘증언’은 어떤 사건이나 사람, 사물에 대한 ‘사실’을 확인하여 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한 여러 본보기를 차례로 이야기하고, 더불어 이 증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본보기를 열거합니다. 

이 내용들은 우리 현실과 매우 비슷합니다. 특별한 설명 없이도, 문장 하나하나를 그대로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깊은 묵상으로 이어질 수 있을 듯합니다. 

“너희는 ……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는다.”

특별히 ‘성경’에 대한 경고는 매우 노골적입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성경을 연구하고 교의에 정통한 신학자라고 하여 모두 하느님과 가까운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연구하며 주로 만나는 것은 이론과 학설이지 하느님의 실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러한 우리의 곤혹스러운 현실을 “자기들을 위하여 수송아지 상을 부어 만들어 놓는” 우상 숭배로 고발합니다.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치장과 기교, 위선과 과시로 “자기들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한다면 모두 우상 숭배이며 죄입니다.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고 “당신 자신을 걸고 …… 맹세하신” 하느님을 내 삶의 실제 주님으로 고백하며 이를 정직하고 충실하게 증언하는 것만이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시게 하는 진정한 구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의 우선순위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에 관해 증언하는 것이 많다고, 곧 성경도 증언하고, 모세도 증언하고, 요한도 증언하고, 아버지께서도 증언하시고, 당신이 하신 일들도 증언한다고 하시며, 그런데 그 많은 증언을 듣고서도 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고 한탄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그들의 잘못과 죄상을 나열하십니다. 

ㅡ 다른 사람은 받아들이면서 당신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ㅡ 아버지의 말씀이 자기들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ㅡ 성경이 증언하는 당신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ㅡ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받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저는 그중에서도 다음 말씀이 특히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왜냐면 200주년 성서와 영어 성서를 보면 이 말씀이 조금 다르게 번역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I know that you do not have the love of God in you.” 

그러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느님의 사랑”을 풀어서 번역한 것 같은데, 제 생각에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직역하는 것이 실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없을 때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없고, 반대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때 하느님을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관련하여 저의 죄를 성찰할 때 제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죄보다 제가 하느님 사랑을 잘 받지 못하는 죄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내가 나의 사랑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주실 때 그 사랑을 내가 잘 받는 것이 우선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내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강박관념은 제가 보기에 우리의 주제를 넘어도 한참 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받는 것이 엄마를 기쁘게 하고 엄마를 사랑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일 어린아이가 나도 이제 사랑에 있어서 어른이니 엄마의 사랑을 받지 않고 내가 할 거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이 진정 엄마를 기쁘게 하고 사랑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사실 사랑은 잘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입니다. 특히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싫어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사랑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사랑입니다. 

사랑의 우리가 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잘 받는 것이 우선이 되고, 그래서 사랑의 우선순위가 바뀌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가 누구인지는 이것으로만 증명된다.

영화 ‘인투 더 와일드(Into the Wild)’는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의 삶과 모험을 연대기로 기록한 논픽션 책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크리스토퍼는 워싱턴 D.C.의 부유한 교외 지역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재능 있는 학생이자 운동선수지만, 그의 가족의 물질주의적인 생활 방식과 그들의 표면 관계 아래에서 긴장 상태로 살아왔습니다. 사실 그의 어머니는 친어머니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외도로 생기게 된 아들입니다. 그는 실력으로 아들의 자격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원하는 대로 1990년 에모리 대학교까지 졸업한 후 맥캔들리스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아버지에게 받은 24,000달러를 자선 단체에 기부하고 가족과의 관계를 끊고 참 ‘자유’ 찾아 미국 횡단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의 목적지는 알래스카고 자연과 하나 되는 삶입니다. 그는 시간과 돈, 경쟁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이 가장 자유롭다고 여겼습니다. 

여행 중 자유를 향한 그의 탐구와 자연 세계와의 강렬한 연결에 감동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우스다코타에서 곡물 엘리베이터 운영자를 위해 일했지만 돌아올 것을 약속하며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떠나고, 자기 부모처럼 떠나버린 아들을 그리워하는 집시 아주머니도 만나고 또 만납니다. 그리고 자기를 양자로 삼고 싶어 하는 가족을 잃은 할아버지도 만납니다. 그러나 그는 자연과 하나 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1992년 4월, 맥캔들리스는 알래스카에 도착해 버려진 버스(Fairbanks 버스 142번)에 캠프를 세웠습니다. 그는 땅에서 살아가고, 작은 사냥감을 사냥하고, 식용 식물을 찾고, 자기 생각과 경험을 일기에 기록하려고 시도합니다. 여름이 진행됨에 따라 식량이 고갈되어 갑니다. 

실수로 독초를 먹게 되어 몸이 약해지고 식량을 모을 수 없게 되면서 그의 상황은 더욱 악화합니다. 눈이 녹아 불어난 강 때문에 빠져나갈 수도 없게 된 그는 죽음을 직감하고 “행복은 함께 나눌 때만 현실이 된다”라는 글을 남기고 버스 안에서 외로이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그의 사망 4개월 후였습니다. 

사람은 꼭 일해야만 살수 있을까요? 맥캔들리스처럼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맥캔들리스는 꼭 일해야만 관계가 유지되는 세상을 등지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아내는 자녀를 키워야 하며 자녀는 부모의 기대대로 공부해야 합니다. 일하지 않으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맥캔들리스가 깨달은 것은 결국 일해야 행복이 실현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가 일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자유를 위해 일하였습니다. 결국 자연이라는 공간에 갇혀버렸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증명하는 가장 큰 증거는 바로 당신이 하시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성경 또한 당신이 하시게 될 일들을 증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에덴동산의 가죽옷이 되기 위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집안을 구원할 어린 양이 되기 위해, 광야에서 불만에 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끝까지 갈 힘을 주기 위한 구리뱀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은 수난 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가심이 바로 성경에서도 증명하는 메시아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성경은 외우다시피 하면서도 그 속에서 하느님의 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두 어린 딸을 잃고 심한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막내아들은 아빠의 마음도 모르고 계속 배를 만들어달라고 합니다. 아빠는 겨우 몸을 추슬러 물에 뜨는 작은 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배를 만드는 세 시간 동안 우울증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을. 

사제는 미사와 고해성사를 해야 하고 의사는 치료를, 선생님은 가르쳐야 합니다. 일하지 않으면 정체성을 잃습니다. 반대로 일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는 결국 내가 하는 일로 결정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그분의 일을 할 것입니다. 그 일이란 이웃의 행복을 위해 작은 배 하나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 오는 감정의 평화를 얻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미사 후 신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제게 다가와서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제가 2004년에 신부님을 갑곶성지에서 처음 뵀었는데요.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 같으세요.” 
 
이 말씀은 좋은 의도가 담긴 것일까요? 아니면 나쁜 의도가 담긴 것일까요? 당연히 좋은 의도가 담긴 말씀으로 감사할 내용입니다. 그러나 20년이나 지났는데, 제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20년이 지나면 외모가 바뀌는 것은 당연합니다. 바뀌지 않았다면 어디 아프거나 문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생각이 바뀌지 않고 행동도 똑같다면 이 역시 커다란 문제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야지만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가 똑같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분의 말씀은 저 듣기 좋으라고 하신 것이겠지만, 스스로 생각해 봅니다. 혹시 아무런 변화 없이 또 변화하려는 노력도 없이 예전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더 나은 ‘나’가 되도록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결같은 모습보다는 좋은 모습으로 계속해서 변하는 우리가 될 때, 이것이 주님의 뜻에 더 다가서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모진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들은 늘 한결같았습니다. 그런데 좋은 쪽으로 한결같은 것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한결같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율법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면서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들의 기준에 따라 큰 죄인이 되고 말았지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셨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인데, 이 사랑은 없어지고 오히려 활자만이 남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하느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단 한 명도 제외 없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빠집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는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다시금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피하지 않으셨던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더욱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게 되고, 비로소 주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 뜻에 더 다가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다.

- 양귀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봄날의 사랑이 이어집니다. 사랑은 행복을 비추는 참빛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놓으시는 근원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 이외에 어떤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 모두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부족한 탓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참된 기본입니다. 사랑을 마음 속에 심어주신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지켜나가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 사랑을 기쁘게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것이 영광입니다. 이와 같이 진정한 사랑은 우리가 생각한 것을 기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음마저도 끌어안고 받아들이는 사랑입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서는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진정한 여행자는 사랑의 순례자들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진실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인생은 사랑학습의 장(場)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이루어내는 사랑의 구원입니다. 희망은 참된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깨닫게 되는 생명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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