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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3/15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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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당신 이름으로 저를 구하시고, 당신 권능으로 제 자유를 찾아 주소서. 하느님, 제 기도를 들으시고 제 입이 아뢰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느님, 나약한 저희를 이 제사로 도와주시니 저희가 구원의 은혜를 기쁘게 받아들여 그 은혜를 새로운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2024년 3월 15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3월 15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3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지혜 2,1ㄱ.12-22)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 오늘 복음
    (요한 7,1-2.10.25-30)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 오늘 말씀 카드
    (지혜 2,21)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지혜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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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요한 7,1-2.10.25-30
오늘 복음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3월 15일
박우성 암브로시오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7:13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적대와 증오와 분노는 모두 그분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죽이려는 자들 때문에 유다 지역으로 가시지 못하고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시는 정황을 드러내며 시작됩니다. 

그러나 초막절이 되자 그분께서는 더 이상 갈릴래아에 머물지 않으시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시어 “드러내 놓고” 가르치십니다. 본문은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다.”라는 표현으로 예수님께서 단순히 두려움 때문에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신” 것이 아님을 밝혀 줍니다.

이렇게 과감하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자 유다인들은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라며 불안해합니다. 

이유는, 유다인들의 통념에 따르면 메시아는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이신 것이 알려져 있으니 분명 메시아이실 리가 없고, 그럼에도 산헤드린의 의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까 보아 안절부절못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라고 인정하시면서 여기에 중요한 사실 하나를 덧붙이십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다.” 곧 당신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신 것은 맞지만, 무엇보다 ‘하느님에게서 오셨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권력과 권한이 막강할수록 자신에게 불편함을 주는 존재를 처리하는 방식은 단순합니다. 제거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독서의 지혜서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어떠한 최후를 맞게 되실지를 요약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에게 가해진 폭력을 ‘눈먼 비극’으로 선언합니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여기는 확신이야말로 눈먼 판단이며, 위험한 폭력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짐이 되는가? 힘이 되는가?

사순시기가 점차 끝을 향해 가기에 독서와 복음은 주님께서 왜 죽임을 당하게 되는지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오늘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우리(악인들이)가 죽이려고 들 때 그가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살리실 거라는 논리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인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런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요.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호하고 구해주실 거라는 믿음 말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짓을 할 때 그런 짓을 하도록 보호하거나 구해주지 않으실 것이니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호하고 구해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지요. 

문제는 그 악이 어떤 악인가 그것입니다. 그 악이 우리가 싫어하는 그런 악인가,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그런 악인가?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싫어하는 그런 악들, 예를 들어, 병이나 실패 같은 것들로 우리를 오히려 시험하시고 단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선 그런 악에서 언제나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으시고, 어떤 때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주시어 우리를 진짜 악에서 보호하십니다. 

진짜 악.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짜 보호받아야 할 것은 진짜 악들로부터입니다. 진짜 악은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인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 가지 못하게 하고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 세상에서의 시련은 우리를 세상에서 떠나 오히려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가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사람들이 악한 의도로 주는 시련과 악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과 악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가지 않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서. 

그런데 오늘 지혜서를 묵상하면서 제게 더 강렬하게 다가온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To us he is the censure of our thoughts; merely to see him is a hardship for us.” 

하느님의 아들이 악인들에게는 보는 것만으로도 짐이 된다고 하는데 내게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람들은 힘이 되는가? 짐이 되는가? 이 점을 묵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누구나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키울 수 있다.

『하.사.시.』에 나오는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합니다. 예수님께 어떤 이방 여인이 다가와 남편이 싸움하다가 머리에 상처를 입어 의사의 말로는 실명이 될 것이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시메온이라는 남편은 이전에 죄를 지었다가 아내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신 적이 있는 남자였습니다. 그의 삶이 다시 냉혹과 탐욕으로 비뚤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사정은 알지만, 그가 용서받고 죽어 천국에 갈 것인지, 아니면 치유 받고 지옥에 갈 것인지 선택하라 합니다. 갈등하던 여인은 남편의 영원한 생명을 선택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도 같은 선택을 하게 하십니다. 

남자는 “용서하십시오! 용서하세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지난번처럼 선생님의 용서를 주십시오! 그러나 지난번처럼 병도 고쳐 주십시오. 아리아! 아리아! 나 당신에게 맹세하오. 다시는 폭력도 쓰지 않고 속임수도 쓰지 않겠소. 나는….”라며 죽음의 공포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약속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청하는 것이 속죄하기보다는 죽음이 두려워 그러는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가 뉘우치도록 그의 아내에게처럼 두 가지를 제시하시고 하나를 선택하라 하십니다. 

그도 지금 죽음과 심판, 지옥의 공포를 느끼고 있으므로 결국 “제 병을 고치기 위해 손을 들지 마시고, 저를 용서하시고, 저를 붙잡고 있는 마귀에게서 저를 구해내시기 위해 손을 드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내미시어 용서해 주시니 그는 이내 눈물을 흘리며 잠이 듭니다. [출처: 『하.사.시.』 6권 150장]

결국 예수님은 그 사람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평화를 주셨습니다. 두려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의 근원은 모두 ‘죽음’입니다. 두려움은 살려는 욕구에서 생깁니다. 더는 잃을 게 없다면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죽이려 하는데도 당당하게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십니다. 아직 당신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운명을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누구보다 강력한 분이셔서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누구도 당신께 손을 댈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더 가지려 하고 더 먹으려 하고 더 강해지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할 수 있을까요? 만리장성을 쌓는 일은 힘이 듭니다. 그래도 진시왕은 일찍 죽었습니다. 모든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부은 까닭에 더 빨리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유튜브에 한 강아지가 여러 마리의 호랑이에게 젖을 먹여 키우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개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개가 되었습니다. 호랑이들이 성장해서도 그 강아지를 자기 어미라 여기기 때문에 그를 보호합니다. 그 개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다가가려면 수많은 그 둘레의 호랑이들과 맞서야만 합니다. 이때 강아지는 다른 개들에게 전혀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모든 에너지를 정말 강한 대상에게 쏟았기 때문에 얻는 보상입니다. 

위 이야기에서 죽어가는 남편과 그의 아내는 생존의 두려움을 병 나음으로 이겨내려 했습니다. 다행히 그들은 올바른 선택을 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심판관이 되셨습니다. 그들은 지옥에 가지 않게 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 세상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를 얻었습니다. 자신 안에 잉태된 호랑이를 키우려면 임신부처럼 세상에서는 가장 약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세상 것들에 의지하여 자기를 지키려 하다가는 내 안의 호랑이가 죽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몰방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믿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물 위까지 걸었던 베드로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다만 조금씩 젖을 줄 때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조금씩 더 평화로워짐을 느낍니다. 그러면 더 많이 투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라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은 이 세상에서 작은 투자로 백 배의 보상을 받는 것으로 성장합니다. 한 번에 하느님의 보호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마치 성모님 태중의 아기처럼 나의 희생을 먹고 자라십니다. 

저도 주일 학교 교리 봉사하고 성당에서 활동하면서 거기서 오는 평화 때문에 저의 전 생애를 바쳐도 되겠다는 믿음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나의 이 지상에서 두려움을 이기려고 원하는 것들을 포기하고 조금이라도 주님께 의지해 봅시다. 내가 포기하는 그것들이 내 안에 잉태된 하느님을 성장시키는 영양분이 됩니다.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완전히 이기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신학교에 입학해서 사제 성소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사제로 만 25년을 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성소는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이미 신부가 되었지만, 완성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자기 성소가 아니라며 사제의 길에서 벗어나는 경우를 관심 있게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성소가 아니라는 본인의 말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완성된 성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완성되지 않았으니 자기 성소가 아직 아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완성되기 전에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성소’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늘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는 길이었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길로만 가려고 할 때, 진정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낄 수가 없으며 그 길로 제대로 갈 수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주님의 진정한 협조자도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을 드러내고 당신을 세상에 높여 세우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자기만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는 성소의 초기 단계에 머무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는 완성된 것이 아니어서 그 안에서 결코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또 큰 혼란 속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 성소가 아니라면서 걷어차고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주님 안에서만 자기 성소가 완성되어 갑니다. 기도하며 또 사랑을 실천하면서 나의 성소를 성숙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성소를 확실하게 지켜 나가셨습니다. 즉, 자기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삶을 철저하게 사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사람은 두려워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최고 의회 의원들의 모습이 대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시지만, 최고 의회 의원들은 못마땅해하면서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분을 잡으려고 하지만 손도 대지 못합니다. 성경은 아직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이 두려웠고 자기들이 하려는 일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삶을 살다 보니 다른 사람의 시선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봐야 할 시선은 하느님의 시선이었습니다. 그 시선에 집중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오늘의 명언

감사는 좋은 마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느낄수록 분노와 불안, 시기심과 같은 부정적인 정서를 덜 느낀다. 감사하면 행복해지는 것은 분명하다.

- 김경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그분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삶을 우리가 안다는 것입니다. 결코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향하는 참된 마음입니다. 참된 마음이 참된 사람이 되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참된 사람의 삶을 사셨습니다. 먹고 입는 삶의 방편이기에 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의 길이기에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지러운 곳에서도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시며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십니다. 

희망은 가득찬 정성이지 게으른 소홀함이 아닙니다. 잘산다는 것은 참되게 산다는 것입니다. 참되게 산다는 것은 묵묵히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간절히 실천하는 것입니다. 

참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실행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참되게 새로운 삶을 새로운 오늘을 예수님과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마음을 다시 바치는 사순의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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