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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3/13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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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의 기도가 당신께 다다르게 하소서. 은총의 때이옵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은 참된 구원이시옵니다.

하느님, 의로운 이에게 상을 주시고 참회하는 죄인을 용서하시니 죄를 고백하는 저희를 자비로이 용서하소서.

2024년 3월 13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3월 13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3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야서 49,8-15)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다.

  • 오늘 복음
    (요한복음 5,17-30)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오늘 말씀 카드
    (요한복음 4,50)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야서 49장 15절)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야서 49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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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요한복음 5,17-30
오늘 복음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3월 13일
유재현 다니엘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7:03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부모와 자녀 관계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극한의 절망 속에서 부르짖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 선언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어머니와 자녀는 같은 살과 피를 나눈 관계이므로 결코 서로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보다 더 강한 유대가 바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임을 선언합니다. 특별히 복음에서는 이러한 유대가 아버지와 아들의 ‘동질성’으로 드러납니다. 아들이 이 세상에 온 이유는 아버지의 일을 하기 위해서이고, 따라서 아들의 일은 곧 아버지의 일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오늘 본문 내용 바로 전에 벳자타 못에서 일어난 치유 사건으로 유다인들이 분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그렇게 친밀한 사이로 규정한 적이 없는데 감히 하느님과 자신을 ‘부자’ 사이로 이야기하고 심지어 ‘동질성’까지 선언하니 불쾌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오늘 독서에는 ‘어미와 젖먹이’의 관계보다 더 긴밀한 관계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맺는 관계 가운데 가장 치열하고도 에너지가 집중적으로 요구되는 관계가 부모와 자녀 관계입니다. 최고의 사랑과 희생,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보다 더한 사랑을 우리에게 가지고 계시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완성됩니다. 무엇보다도 큰 사랑이기에 가장 큰 고통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여태 사랑

오늘 이사야서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시온에게 하느님께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라고 대답하고,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다시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런 엇박자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은 사랑하셨다고 하는데 인간은 그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고, 하느님은 은혜의 때에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의 날에 도와주셨다고 하는데 인간은 그 은혜를 받은 적이 없고 그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온만 이런 것이 아니고 사실 많은 경우 우리 인간은 이렇습니다. 고통이 극심할 때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 고통일 뿐이고, 고통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그 은혜를 그때는 느끼지 못하여 버림받았다고 하다가 나중에 가서야 은혜로 느끼곤 합니다. 사랑과 고통의 불일치요 때의 불일치인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이런 우리 인간의 불일치와 달리 아버지 하느님과 당신 사이의 일치를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 주님 친히 이렇게 정답을 말씀해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그러니까 주님의 관상적 믿음이고, 믿음의 관상 때문입니다. 

먼저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런 믿음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지 않는 관상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은 다 사랑이라는 믿음이 있고, 그래서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 벌어져도 그것이 바로 은총임을 봅니다. 

그리고 벌어진 일들과 그 일을 벌인 인간들을 볼 때 그것들에 의해 현혹되지 않는 하느님 관상을 하기에 그것들로 인해 실망이나 절망이나 포기를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그 생명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여태 사랑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은 여태 사랑입니다. 여태 사랑은 중단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여태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좌절감이나 절망감 때문에 중단치 않는 사랑입니다. 내 사랑을 배신하는 그 인간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가 사목회에게 『하.사.시.』를 읽히는 이유

2005년 영화 ‘아일랜드’에서 줄거리는 두 명의 주인공인 링컨 식스 에코(Lincoln Six Echo)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링컨은 유토피아처럼 보이지만 고도로 통제된 시설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구 오염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라고 믿습니다. 외부 세계로의 유일한 탈출구는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오염되지 않은 곳으로 추정되는 ‘섬’으로 가는 선택을 받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링컨은 시설의 주민들이 실제로 외부 세계의 부유한 기증자에게 장기 이식 및 기타 생물학적 요구 사항을 제공할 목적으로 자란 복제품이라는 충격적인 진실을 발견합니다. 그들이 가고 싶어 하는 섬은 조작된 개념입니다. 선택된다는 것은 실제로 장기 적출이나 대리모 역할을 위해 파견되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초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링컨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 조던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합니다. 조던은 좀처럼 믿지 않습니다. 조던이 섬으로 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링컨의 끊임없는 설득과 여러 정황을 통해 조던도 조금씩 링컨을 믿어갑니다. 그래서 아일랜드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함께 탈출을 감행합니다. 

본래 세상은 오염되지 않았고 그들은 자기들에게 유전자를 준 이들에게 장기를 주기 위해 키워지는 클론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조던이 링컨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았다면 둘은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관한 판단이 일치하지 않으면 둘의 사랑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누구는 사탄이 좋다고 하고 누구는 하느님이 좋다고 한다면 둘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미움을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하느님과 대등한 존재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라고 하십니다. 심판의 권한을 넘긴다는 말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당신과 대등한 존재로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라고 하십니다. 

어차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심판할 것이면 아버지가 심판하면 되지 왜 아드님께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을까요? 아드님의 심판이 당신의 심판과 일치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당신과 대등하게 대하시는 방식입니다. 

저도 조원동 성당에 왔을 때 주교님께서 “전 신부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고 하셨습니다. 주교좌 성당의 주인은 주교님입니다. 주교님께서 저에게 전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이는 제가 판단하는 것을 주교님께서 인정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주교님께서 저를 대등한 위치로 올려주시는 방법이셨습니다. 

아기들이 음식을 먹을 때 손으로 집어 먹으며 자신과 주위를 더럽힙니다. 이는 부모가 보기에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모릅니다. 그러면 아기와 부모는 온전한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부모는 아기에게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일치할 때 그들은 비로소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이 수준으로 우리가 올라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저는 사목회 위원들에게 ‘하.사.시.’를 읽힙니다. 저의 삶의 옳고 그름은 이 책을 기준으로 합니다. 만약 이분들이 매일 이 책을 읽고 자신들의 삶을 이 책의 모범과 일치시킨다면 저는 이분들에게 저 자신의 모든 권한을 맡길 수 있습니다. 어차피 저 혼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심판하시는 대로 심판하실 분이기에 아버지의 모든 영광을 차지하게 되는 것처럼, 신자들은 사제의 옳고 그름에 일치해야 하고, 사제는 주교의 옳고 그름이 일치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대등해지기 위해 우리의 모든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이 그리스도의 그것과 일치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정신과 의사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늦은 밤에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는 여성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여자는 이제 곧 자살할 것이라면서 자기의 지금 어려움을 이야기했습니다. 프랭클 박사는 새벽까지 이 여성과 대화를 나눴고, 그녀가 삶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들을 하나하나 제시했습니다. 긴 설득 끝에 이 여성은 목숨을 끊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중에 이 여인을 만난 빅터 프랭클 박사는 그가 제시한 여러 가지 근거 중에 어떤 것이 그녀의 결심을 번복하게 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그것 중에는 그 어떤 것도 제게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대신 결심을 번복하고 다시 힘을 내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녀를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오랫동안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프랭클 박사의 자세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자세가 마음을 바꾸게 했고 자기 삶을 살 가치가 있음을 이해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단순히 말로써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면서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자세에서 힘을 얻게 되어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결코 혼자가 아님을, 나의 말도 귀 기울여 주는 함께하는 누군가가 있음에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늘 함께하는 주님의 존재를 느끼는 삶이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말을 들어주시고, 당신의 따뜻함 품으로 안아 주십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주님께서 안식일을 어기셨던 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멈춰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시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지금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죽이려는 이유만을 찾습니다. 율법의 핵심이 사랑임에도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니,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합니다. 
 
주님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 자체를, 즉 있는 그대로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 삶 안에서 늘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 사랑을 알아보는 사람만이 큰 힘을 얻을 수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용기만 있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바로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알프레트 아들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지금이 바로 그때다.

곳곳마다 생명의 꽃들이 하나둘씩 피어납니다. 바로 지금이지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라는 소중한 생명이 있을 뿐입니다. 다시 살리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걸어가야 할 영원한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다른 그 무엇을 우리가 더 바라고 더 구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을 혼동하고 있듯이 주님과 주님 아닌 것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다시 살리시는 주님 앞에 우리자신을 내려놓습니다. 생명을 살리시는 주님의 마음이 헤아려집니다. 어둠을 걷고 밝음을 드러내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생명을 먹고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지금 이순간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가리칩니다. 생명 아닌 것이 없습니다. 꽃을 다시 피우시듯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복음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바로 지금이 눈부신 생명을 만나는 가장 좋은 때입니다. 생명 안에 살고있는 우리들입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충분합니다. 생명의 목소리를 듣는 가장 좋은 생명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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