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하느님, 말씀이신 성자를 통하여 오묘하게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그리스도인들이 다가오는 파스카 축제를 열렬한 믿음과 정성으로 준비하게 하소서.
2024년 3월 10일 사순 제4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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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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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에페소서 2장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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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서 2장 10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역대기하권 36,14-16.19-23)
이스라엘 백성의 유배와 해방으로 주님의 분노와 자비가 드러난다. - 제 2독서
(에페소서 2,4-10)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여러분은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복음 3,14-21)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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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요한복음
3장 14-21절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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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민준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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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동성당 이병근 대건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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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사순 제4주일에 강조되는 주제는 ‘기쁨’입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입당송).
예수님의 수난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이 시점에, 도대체 교회는 무엇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일까요?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기쁜 순간 가운데 하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확인하였을 때가 아닐까 합니다. 하물며 내가 ‘하느님 사랑의 대상’임을 확인한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이 있을까요?
제1독서는 이스라엘의 배신과 외면에도 변함없이 성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유배하던 유다인들을 해방하여 준 페르시아 임금의 칙령이 사실은 하느님의 조처였음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한결같고 성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은 복음에도 잘 드러납니다. 광야에서 생활하며 되풀이하던 이스라엘의 반역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뱀’을 보내시지만, 결국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시려고 구리 뱀을 들어 올리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여기에서 관심을 끄는 내용은 “- 해야 한다”라는 표현입니다. 누군가를 대신하여 배상하거나 속죄하는 것은 사랑할 때 나오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니까 그를 대신해서라도 배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어 올려지셔야 한다’라는 표현은 사랑하기 때문에 생겨난 주님의 희생을 의미하고, 그렇게 십자가는 사랑이 완성되는 자리가 됩니다.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3)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분을 ‘올려다보며’ 그 사랑을 기억하고, 그렇게 날마다 ‘위’로부터 그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 그것만이 우리를 살게 하는 참다운 삶의 ‘기쁨’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구원과 심판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오늘 사순 제4주일은 죄지은 인간이 어떻게 될까?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인간을 구원하실까? 단죄하실까?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죄지은 인간을 구하러 오신 걸까? 단죄하러 오신 걸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들은 하느님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인가? 단죄하시는 하느님인가? 하느님이 사랑이시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하느님 사전에 단죄란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사랑의 하느님 안에서 지옥이란 없지 않겠는가? 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질문에 대한 사순 제4주일의 답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구원을 바라시고, 그래서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사순 제4주일은 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판과 단죄와 지옥은 실제로 없는 것입니까? 우리 교회는 이런 것들이 없다고 가르칩니까? 아니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는 분명 심판과 단죄와 지옥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아무리 바라셔도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바로 단죄받는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우리 교회도 가르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구원자라는 믿음과 심판자라는 믿음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심판자라고 믿는 사람은 그 믿음대로 심판받습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마지막 사람은 하느님을 모진 심판자로 믿었고, 그는 자기의 믿음 대로 심판받았다고 주님은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우리가 믿기만 하면 됩니까?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믿기만 하면 됩니까? 믿기만 하고 정말 아무것 안 해도 되는 겁니까?
진정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진정 믿는다면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완전히 맡깁니다. 그래서 빛이신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굴이랄까 굴다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굴은 어둡고 위험합니다. 문제는 그 굴을 통과해야 신세계가 열린다는 겁니다. 희망은 굴 저편에 그 굴을 먼저 통과한 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 굴을 통과해 당신에게 오라고 손짓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이 나를 사랑하는 분이고 그래서 믿을만한 분이라면 통과하겠지요? 나를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는 어머니가 바로 그분이라면 통과하겠지요?
오늘 복음의 주님은 당신이 바로 그분이라고 가르치시고 오늘 독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주님 사랑을 믿지 못하고 그 가르침도 믿지 못한다면 주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빛이신 그분보다 어둠인 세상을 더 사랑한다면 그 경우 주님은 더더욱 어쩔 수 없습니다.
주님 사랑에 대한 불신과 주님 사랑을 사랑하지 않음이 우리의 비 구원이고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단죄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도약: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의 필연성 이해.
인간은 집과 같습니다. 집은 그 주인에 의해 정체성이 결정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느님이 되려는 무엇을 주인으로 삼고 삽니다. 문제는 그런 주인을 모셔놓고 살다 보니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구해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모든 만들어진 것의 반드시 만든 자의 목적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계명’입니다. 자동차가 핸들과 거꾸로 움직이면 큰일입니다. 고쳐질 수 없다면 폐기처분 되는 게 당연합니다. 인간이 창조된 게 맞는다면 왜 인간을 만들어놓고 지옥 보내느냐고 말해봐야 소용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인간답도록 당신 창조 목적인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잘 됩니까?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온 것입니다. 그도 십계명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왜 믿어야만 하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장대에 들어 올린 것처럼 당신도 그렇게 들어 올려져야 하고 당신을 믿는 이들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에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한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평생 모은 것을 일시에 날려버릴 아들에게는 물려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높고 험준한 산꼭대기에서 기다리고 두 아들이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열 개의 비석을 찾아서 그 길로 올라오라고 합니다.
첫째 아들은 두세 개의 비석을 지난 뒤 지쳐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형은 아버지가 자신들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동생은 비석에 새긴 글씨가 옅어지는 것을 눈치챕니다. 아버지는 자신들을 위해 비석을 새기며 지쳐갔던 것입니다.
이 말에 형도 여덟 번째 비석까지는 갔지만, 결국 편한 길을 택합니다. 동생도 형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비석에 새겨진 글씨가 검붉게 된 것을 발견합니다.
아버지가 자신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려고 피까지 흘리셨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를 의심한 것을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올라 아버지를 만납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형은 불구덩이 속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누구든 무언가를 만들 때 그 안에 땀과 피를 섞습니다. 손흥민 선수도 아무리 축구를 좋아해도 아버지의 고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위치까지 오를 수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자녀에게 힘을 주려 하는데 자신은 편히 쉬며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부모의 뜻은 항상 부모가 자기를 위해 흘리는 피에 대한 ‘감사’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따르지만, 마음 안에서는 여전히 ‘내가 이렇게 많이 봉헌했는데 주님이 주시는 것은 고작….’ 이라고 불평했습니다. 이때 성체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나’가 내 안의 불평불만인 ‘나’를 죽이기 위해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의 수난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할까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영적으로 몹시 지쳐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기도실에 들어갔는데 어느 축일을 위해 들여온 성상을 보았습니다. 상처투성이인 그리스도를 표현한 성상이었습니다.
성녀는 깊은 감동에 사로잡혔습니다. 자신 때문에 그런 상처를 받으신 것에 비해 주님께 아주 조금밖에 보답해 드리지 못한 것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그분 앞에 엎드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성녀는 다시는 주님을 거스르지 않도록 힘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 9,1 참조).
민수기에서 뱀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만’이었습니다. 십계명이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믿음의 부족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들 안에 있는 뱀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뱀을 보내시고 그 치유 방법으로는 또 다른 뱀이 장대에 달리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묵상함으로써 우리에게 오시는 은총의 선물은 우리 안에 자아라는 뱀에 물린 죄의 독이 눈물로 빠져나와 치유되는 열매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사무라이가 되고 싶은 천민 아이도 기둥에 들어있는 어머니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어머니의 꿈을 이뤄드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믿음이 아니면 누구도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믿는다면 그 수난 때문에 항상 ‘감사’의 감정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늘 최고의 선물을 주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녀가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쏟아붓지만, 자녀가 사랑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서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은 무조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왜 자녀는 그 사랑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느 정신과 의사가 쓴 책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경제적 안정, 신체적 건강, 좋은 관계를 가진 부모’라고 이야기합니다. 자녀에게 주는 선물이 부모 자신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 충분히 공감 갑니다.
부모가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면 자녀가 부모의 노후를 걱정하느라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부모가 혼자 병원 다니고 자기 관리를 할 수 있는 신체적으로 건강한 상태이면 그만큼 부모 간호하는 데 드는 힘을 줄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부모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자녀에게 의존하게 않게 되지요. 실제로 부모에게 자녀가 유일한 ‘베스트 프렌드’가 된다면, 자녀에게 부모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을 멈추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지요. 진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니코데모는 바리사이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 늘 거룩한 모습으로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의 규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려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을 찾아가 마침내 밤을 몰아내는 빛을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진짜 사랑을 알 수 있었고 이로써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찾았던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입으로만 말씀하시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그러나 먼저 주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우리 역시 실천해 나갈 때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으며, 참 기쁨에 이를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의 자존감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어요.
- 글로리아 게이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들 사이에 봄꽃이 선명하게 피어납니다. 사랑이 성장할 때마다 선명해지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평화와 기쁨이 있지만 심판은 평화가 없습니다.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인 구원입니다. 참된 사랑을 하느님에게서 찾습니다.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이 되십니다. 모순덩어리인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구원의 대상은 다름아닌 행복을 놓치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를 살게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어리석어 부끄러움을 모르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진정한 삶을 가르쳐주십니다. 구원은 저 너머의 세상이 아니라 빛과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의 삶이 사랑의 구원이며 영원한 삶입니다.
사랑이 믿음이 되고 사랑이 빛이 됩니다. 사랑의 빛은 힘겨루기를 하지 않습니다. 기다려주시고 바라보시는 믿음에서 사랑의 빛은 더욱 빛납니다. 어둠에 묶여있던 우리를 죽음에 갇혀있던 우리를 구원으로 풀어주시며 하느님의 기쁨과 하느님의 사랑으로 활짝 열어주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러줄 수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과 함께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게되고 하느님을 보게되는 이 엄청난 기쁨을 우리는 사랑의 신비이며 구원의 신비라 부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구원은 끝이 없습니다. 하느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의 삶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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