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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3/06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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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말씀대로 제 발걸음을 굳건히 하시고, 어떠한 불의도 저를 짓누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님, 저희가 이 사순 시기에 절제와 선행을 실천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언제나 한마음으로 기도하게 하소서.

 

2024년 3월 6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3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자자손손에게 그것들을 알려 주어라. (신명기 4장 9절)

 

자자손손에게 그것들을 알려 주어라. (신명기 4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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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4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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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신명기 4,1.5-9)
    너희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 오늘 복음
    (마태오복음 5,17-19)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3월 6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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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마태오복음
5장 17-19절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3월 6일 05:00
조현용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7:17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진짜 혁명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그 어느 때보다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나 기존 전통을 종식시키시고, 그와 상반된 도전과 파격을 주시려고 오신 분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율법은 인간의 삶에서 ‘실천’하도록 제정한 지침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직된 전통주의와 주입식 강요는 이를 실천하고 생활화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획일화된 이론은 공감으로 이어지지 못하였고, 공감하지 못하니 실천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지도층의 도식화된 교육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율법 학자들은 그 허술함을 감추려고 더욱 가혹하게 율법과 규정의 잣대를 들이대었고, 그 결과 가식과 위선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와 다른 방식을 택하십니다. 공생활을 통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가까이 계시면서’ 참된 진리를 몸소 보여 주셨고, 목숨까지 바치심으로써 사랑의 진정성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분은 정녕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참된 쇄신과 개혁은 이전의 것을 폐기하고, 과거와 단절하며 완전히 새로운 파격을 만들어 내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통과 역사 안에 한결같이 존재하여 온 진리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지를 공감하게 하여 구체적으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혁명이고 참된 진보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소 닭 보듯?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오늘 모세는 자기 백성에게 하느님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분이라고, 그러니 이런 하느님을 모신 이스라엘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렇다면 저는 또 우리 배달 민족은 이스라엘처럼 위대한 민족입니까?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선 저와 우리 민족에게도 가까이 계셔 주십니까? 

물론이고 당연합니다.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느 민족에게나 가까이 계셔 주십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누가 느낍니까? 모두 느끼고 모든 민족이 느끼는 것 아닙니다. 

소 닭 보듯 하는 사람 많습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무덤덤합니다. 그런데 소와 닭은 왜 관계가 그렇습니까? 

소가 닭을 잡아먹는 동물이라면 그럴 리 없습니다. 소는 잡아먹으려고 닭을 노려보고 닭은 소가 덮칠까 경계하며 볼 것입니다. 

서로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렇다고 둘은 친하지도 않습니다. 관심사가 다를 뿐 아니라 호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끌림이 서로 간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소 닭 보듯 관계가 바로 ‘실천적 무신론’의 관계입니다. 실천적 무신론은 존재적 무신론이 아닙니다. 

존재적 무신론은 신이란 존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적 무신론은 신의 존재 여부에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곧 상관없고 관심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시지만 내 삶 안에는 없습니다. 계시긴 하지만 저기 부산에 계신 것입니다. 여기 내게 가까이 있어도 내 삶 안에 없고, 내가 뭘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내 좋을 대로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하고 원치 않으시면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는 것으로 철저히 자기중심입니다 

요즘의 무신론은 대개 이런 무신론입니다. 있냐 없냐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없는 것이 아니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기에 고민조차 하지 않는 무신론이고, 그래서 존재적 무신론보다 더 나쁜 무신론이 소 닭 보듯 무신론입니다. 

하느님이 아무리 가까이 계셔도 소 닭처럼 계시니 하느님의 계명도 간단히 제쳐버리겠지요? 그래서 오늘 모세가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고 얘기해도 그저 웃기만 하고 코웃음 칠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이 아무리 가까이 계셔도 없는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 계명이 거미줄의 바람 같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와 하느님은 소 닭처럼 가까운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경에도 어머니가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각자 자기 성경 해석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런 환경에서 누가 가장 성경을 완전하게 해석하는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아버지는 하느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면 성경에도 어머니도 있지 않을까요?

성경을 대하는 첫 번째 단계는 성경에 어머니는 없다고 여기는 부류가 있습니다. 자신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교만해 하는 부류입니다. 나자렛 사람들과 같은 부류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성경을 설명해 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자기 멋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성경에 어디에도 성경을 해석해주는 이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라는 말은 없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고 내려올 때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에게 대한 배신이기도 했지만, 먼저 모세의 가르침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소용없음을 알고 십계명 판을 깨버렸습니다. 여기서 보면 성경의 어머니는 모세처럼 보입니다. 모세에게 순종하지 못하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에도 당연히 순종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성경 해석의 도움을 구하는 이들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 곧 계명이 쓰인 책입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 계명을 온전히 이해하고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나아만과 같은 인물이 그런 사람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를 찾아가 나병이 고쳐지기를 청했습니다. 엘리사는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그런 시시한 지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때 그를 도와준 인물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의 부하들이었습니다. 부하들은 나아만이 더 어려운 일을 시켰으면 했을 텐데 쉽다고 안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를 설득합니다. 나아만은 부하들의 도움으로 몸을 씻었고 나병이 나았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을 보고는 엘리야의 하느님을 믿게 됩니다. 성경 말씀에 순종하면 그러한 표징들이 일어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당신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이 지켜지게 하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진정한 성경 해석자는 성경 말씀을 본인도 지키고 다른 이들도 그대로 지키라고 가르치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그에게 먼저 순종할 수 있어야 말씀에도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성경 해석자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단계입니다. 참 어머니를 찾는 일은 쉽습니다. 어머니는 아기가 쪼개져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솔로몬이 두 여인이 한 아기를 두고 싸울 때 진짜 어머니를 어떻게 찾아냈습니까? 아기를 쪼개보라고 할 때 그것에 반대하는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라면 그래야 합니다. 

여기에서 개신교의 성경 해석을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는데 하늘 나라의 열쇠를 지닌 베드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가 당신의 살과 피가 되는 예식을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예식을 통해 빵과 포도주가 진짜 당신 살과 피라고 하셨습니다. 이 핵심적인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성경을 쪼개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성령을 주시며 죄를 용서하라고 교회를 파견하셨지만, 사람이 죄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의 어머니가 모세이고 성경의 어머니가 가톨릭교회임을 잘 압니다. 성경 계명의 일점일획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문제는 진리가 인간의 이해력에 따라 다르게 적용됐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는 무조건 할례를 받아야 했지만, 신약에서는 안 받아도 된다고 교회가 정하였습니다. 그러니 한 부분만을 잡아서 그것에 대한 순종을 강요하면 이단에 빠집니다. 더 나아가 성경에는 피를 먹지 말아야 하지만, 지금 대부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선지해장국을 먹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 있는 해석자를 만나지 않으면 성경 때문에 오히려 교회가 갈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누구에게 성경을 줬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십계명 판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 모세의 가르침을 따르면 십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에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정경화 과정’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교회가 생기고 교회가 그것을 정리하여 구약과 신약의 정경을 정하였습니다. 가장 처음 정해진 해가 서기 397년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거의 400년이 지나서 정경이 정해진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경 말씀을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도 교회를 “진리의 기둥”이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인 것은 맞지만, 무엇에 순종해야 하는지 구별이 되지 않을 때 그 진리를 바로잡아주는 가장 완전한 권위의 해석자가 교회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려움이 있을 때 성경이 아닌 교회에 의지하라 합니다. 

“내가 늦어지게 될 경우,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1티모 3,15)

그 해석자는 분명 하느님의 가르침을 최대한 실천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성경의 ‘정경화 과정’이 중요한데, 그 과정에서 교회가 권위를 가지고 정경을 정하였습니다. 

신약이 27권임을 인정한다면 이는 그렇게 정한 교회가 말씀을 해석할 완전한 권위를 가졌음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교회가 아닌 다른 성경 해석자들은 분명 성경의 일부분을 잘라버립니다. 

어쩌면 십일조를 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강조하지 않는 가톨릭교회도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교회는 부분적이 아닌 전체적 시각으로 온전히 성경에 순종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으로 그 해설자의 권위가 증명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게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성경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기에 가장 마지막 예수님께서 지향하셨던 계명들이 가장 충실한 교회가 진짜 성경의 어머니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고등학교 때 처음 타자기를 보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는 보편화되지 않았지요. 따라서 타자기는 너무 신기했습니다. 더군다나 직접 타자를 쳐보면서 종이에 글이 찍히는 것을 보면서 마치 책을 출판하는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자판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 이름을 타자 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특히 두 손가락만을 이용한 독수리 타법이라서 1분에 3~40개의 단어만 띄엄띄엄 타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뒤에 실력을 향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두 손가락의 독수리 타법으로는 실력 향상이 불가능했습니다. 저의 이 독수리 타법을 본 누군가가 양손을, 그러니까 모든 손가락으로 타자를 하면 속도가 빨라진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계속된 연습으로 양손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고, 또 타자기 자판도 모두 외우면서 속도가 비약적으로 향상했습니다. 한때, 1분에 800타까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당시에 두 손가락만 사용하는 독수리 타법만을 고집했다면 실력 향상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몸에 익히면서 비로소 향상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과거의 방식에만 매여있으면 어떤 발전도 이룰 수 없습니다. 새롭게 변화하는 모습을 만들어 갈 때,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와 너무 다른 이 현재를 살면서, 이 현재에 맞게 신앙생활도 계속 변화 발전시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그때가 좋았어.’만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과거에만 매여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만을 강조하면서 그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조항은 모두 613개에 이르지요. 사실 이 조항 613개를 거슬러 올라가면 십계명이 되고, 또 이를 다시 줄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이 사랑이 율법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매여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사랑은 보지 않고 613개의 조항만을 봅니다. 사랑의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으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이 녹아 들어갔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은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인 삶이 아니라, 지금 실천해야 하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 안에서만 우리는 하느님 나라로 힘차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 르누아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봄꽃소식을 듣고 또 봄꽃을 직접 봅니다. 노아란 산수유꽃이 피었습니다. 생명은 질서이며 질서는 계명입니다. 계명을 통하여 우리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최고의 완성은 최고의 삶입니다. 지키고 가르치는 삶이 완성을 향하는 삶입니다. 하나의 완성이 또 다른 완성을 부릅니다. 

바르게 사는 방법이란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올바른 실행이며 올바른 실행은 우리가 지켜야 할 생명의 의무를 우리가 지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삶을 위해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올바른 사랑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계명의 완성은 십자가의 완성으로 이어집니다. 계명은 십자가처럼 우리의 인격을 잡아줍니다. 기계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온전한 관계는 온전한 마음이며 온전한 마음이 선한 마음입니다. 

선한 마음은 생활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생활의 변화가 계명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단순히 악을 멈추게 하는 법만이 아니고 더 적극적인 신앙인의 삶을 살도록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완성은 사람의 완성입니다. 계명과 십자가를 사랑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사랑을 말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사랑을 지키고 가르치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계명과 삶은 십자가와 생활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며 폐지될 수 없는 우리 인격의 완성입니다. 사순과 인격은 하느님을 향하는 하나의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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