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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3/04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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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뜨락을 그리워하며 이 영혼 여위어 가나이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이 몸과 이 마음 환성을 올리나이다.

주님, 주님 없이는 교회가 온전히 서 있을 수 없사오니 언제나 주님의 은총으로 교회를 이끄시고 무한하신 자비로 깨끗하게 하시어 저희를 보호하소서.

 

2024년 3월 4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3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나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시편 130장 5절)

 

나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시편 130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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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0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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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열왕기하권 5,1-15ㄷ)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 오늘 복음
    (루카복음 4,24ㄴ-30)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3월 4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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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나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루카복음
4장 24ㄴ-30절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3월 4일 05:00
김동규 바오로 신부

 

✚ 교황님 3월 기도지향 00:24

✚ 미사시작 00:38

✚ 강론시작 10:35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믿지 못함’은 죽음으로 ‘믿음’은 구원으로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 내용이 매우 훌륭하고 권위가 있어 모두 놀라는데, 오히려 그 경이로움이 예수님을 ‘환영받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가정 환경과 성장 과정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고향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놀라운 가르침이 나오자 이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알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유다인들’의 모습과 대조되는 ‘믿는 이방인들’의 모습이 제1독서에 제시됩니다. 

존경받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불치병에 시달렸지만, 오랜 고통의 시간을 지나 결국 치유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처음에는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는 말에 황당해하며 화를 내었지만, 놀랍게도 그의 부하들은 대범하게 권유합니다.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느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믿음과 순명이 불가능한 치유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의 앎이 과도한 확신으로 왜곡될 때 주변은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됩니다. 더구나 그 앎이 비교나 질투, 열등감을 기반으로 할 때 그 앎은 극단의 폭력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믿지 못함’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믿음’은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요르단 물은 나아만의 몸만 고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에 대한 진정한 앎(인식)은 그의 의식과 마음까지 낫게 하여 준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이제라도 깨닫는

 

사순 3주간이 되면서 전례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야 할 이유를 하나하나 전합니다. 어제 주일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심으로 죽음을 재촉하신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과부와 나병 환자만 고쳐 주시는 분이 아니라 이방인인 나아만과 과부도 구해주신 분이라고 하여 죽음을 재촉하신 얘기입니다. 

성전 정화를 하지 않으셨으면, 이런 얘기를 하지 않으셨으면, 주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을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으면 어제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이 치우라는 말씀대로 잡것을 치웠다면, 주님 말씀을 듣고 민족 편견적인 믿음을 깼다면 주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을 수 있었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인간의 잘못된 믿음들이 여럿 드러납니다. 우선 이미 말씀드린 대로 민족 편견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편견이 본래 나쁜 것이지만 편견적인 믿음은 더 나쁜 것이고, 편견도 다른 편견이 아니라 민족적인 편견은 더더욱 나쁜 것이지요. 

하느님께 대한 다른 민족의 믿음은 틀려먹었고 자기들의 믿음만 옳다는 편견, 하느님께서 자기들만의 하느님이시고 다른 민족은 사랑치 않으신다는 편견에서 더 나아가 다른 민족을 사랑하셔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실은 믿음도 아닐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셔서도 안 되겠지요? 나아만의 믿음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많이 부족한 믿음이지요. 그는 치유를 받기 위해 엘리사에게 가는데 이스라엘 종의 말만 믿고 갑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종의 말만 믿고 갔으니 대단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이랄까 믿음으로 간 것이고, 하느님을 믿고 간 것이 아니라 종이든 엘리사든 인간을 믿고 간 것입니다. 

그가 하느님을 믿지 않고 엘리사를 믿었다는 표는 엘리사가 자기의 치유를 위해 적극성과 정성을 더 보여 주기를 바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의사가 치유해주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의사가 치유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면 굳이 하느님께서 치유해주시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의사가 얼마나 능력에 노력을 더하는지 그것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의사를 통해 고쳐 주시는 거라고 믿으면 의사의 능력이나 노력이나 정성은 그리 중요치 않을 겁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신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집에까지 오실 필요도 없고 자기 종의 이마에 손을 얹어주실 필요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나아만은 또 요즘 자연 치유자들이 주장하듯 좋은 물이 치유해 줄 거라는 믿음도 비칩니다. 그래서 요르단강 물보다 자기 나라 강물이 더 좋다고 하고, 물로 씻는 세례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물이 치유해준다고 믿습니다. 

나아만은 또 치유를 받기 위해 자기의 정성도 극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 정성이 부족하면 하느님께서 치유해주지 않으실 거라고 믿는 것이고, 결국 하느님 은총의 무상성 곧 거저 주시는 하느님 사랑을 믿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엄마가 아들에게 밥을 줄 때 아들이 하는 짓 보고 줍니까? 예쁜 짓 하면 주고 미운 짓 하면 주지 않습니까? 먹고 싶어 하면 주고 먹기 싫어하면 안 주는 것 아닙니까? 필요하면 주고 필요치 않으면 주지 않는 것 아닙니까? 

인간의 정성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조건이 아니라 무상으로 주시는 은총을 우리가 받는 조건임을 “이제야 저는 알았습니다.”라고 한 나아만처럼 이제라도 깨닫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아직도 성경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요즘 흥행하는 영화 ‘파묘’(2024)에서 많은 가축과 사람들이 죽어가자 정부는 곰의 소행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결국 귀여운 곰 한 마리를 발견하여 살릴까, 죽일까를 고민합니다. 하지만 무당과 풍수사, 장의사 합세한 주인공 팀은 그 원인이 관에서 나온 ‘험한 것’임을 압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진짜 적과 싸웁니다. 

현상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러 해석이 나옵니다. 누구나 자기가 가진 지식대로 판단합니다. 한 가지 현상에 대해 여러 해석이 나오는 이유는 각자가 가진 믿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믿음을 키워주는 무엇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 이끄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그것을 해석하여 믿음을 얻고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는 어리석습니다. 개신교에서 아무리 성경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해도 그것은 틀렸습니다. 현상을 파악하는 능력은 전문가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2베드 1,2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자렛에 가십니다. 그리고 대놓고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믿음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십니다. 엘리야 때 하느님께서 기근을 주셨는데 예언자를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사렙타 과부에게만 보내신 것, 또 이스라엘에도 나병 환자가 있었지만, 이방인인 나아만만 치유해 주신 내용입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성경을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성경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해석해주는 이의 권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꽃 편지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사랑을 고백한 대상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성경을 통해 구원의 믿음에 이른다고 착각하는 이들은 분노를 터뜨리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에 의해 이뤄지는데 성경은 그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만을 설명하지, 그 믿음에 도달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성경 묵상을 하면 자기 생각 안에서 맴돌고 성경 공부를 하면 그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의 믿음을 성경을 통해 전달받을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2티모3,15)

성경은 믿음을 주는 게 아니라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경을 가장 완전히 해석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야지 성경을 파고들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각자의 믿음대로 해석되기 때문에 성경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기 가장 쉽습니다. 성경을 맹신하다가 성경을 이용해 자기 사상을 주입하는 이들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도로 쓰였기에 성령님만이 참된 해석자이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장 완전한 성경 해석자입니다. 성령강림은 각자에게 내린 것이 아니라 교회에 내렸습니다. 그곳에는 성모님도 계셨고 베드로도, 열두 사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개별적 해석은 언제나 한계에 부딪히고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성령으로 해석한 성경을 가르칩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2티모 3,16)

성경은 무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스텔스 전투기처럼 우리 힘만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무기입니다. 그러니 그 전투기를 잘 조종할 수 있는 이들에게 배워야 하는데 미국은 그 능력을 몇몇에만 부여하였습니다. 스텔스기를 만든 기술자들이 그 운행 능력을 누구에게 맡기겠습니까? 자기 조국을 위해 맡깁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성령을 맡기셨습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라 불린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교리는 성경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닌 교회를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배운 교리를 가르치는 도구입니다. 그러니 개신교처럼 성경을 절대화하여 각자가 자신이 옳은 해석을 한다고 하며 수백 개 종파로 갈라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자렛은 성경은 가졌지만, 결국 예수님은 배척하였습니다. 성경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하면서 성체성사나 고해성사를 배척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춥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면 두 가지 등급이 좋아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수능 시험 등급이고, 또 하나는 내신 등급입니다. 그런데 엄마들이 보는 자식의 등급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적어봅니다. 
 
1등급: 공부를 잘한다. 
 
2등급: 공부는 못하지만, 성격이 좋다. 
 
3등급: 공부도 못하고 성격도 나쁘지만, 건강하다. 
 
4등급: 지 아빠 닮았다. 
 
공부 잘하는 것이 1등급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아이를 위한 엄마의 마음을 볼 수 있어서 뭐라 하기도 뭐합니다. 하지만 성적을 위해 학원 열심히 다니고, 각종 스펙을 쌓느라고, 성격도, 건강도, 또 가족 간의 사랑도 잃는다면 성적과 스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오히려 4등급을 맞아야 갈 수 있습니다. 즉, ‘지 아빠’인 하느님을 닮아야 그 나라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과는 다른 하느님 나라에 가는 기준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은 잊어버리고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회당에 가셔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회당에 있던 고향 사람들은 이 말씀에 화가 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통해, 더 화가 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선택된 자기들만 당연히 구원받아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은총이 넘어감을 이야기했다고 화가 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4등급을 맞아야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 아빠’인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얼굴만 닮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따라야 진정으로 닮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화를 불러일으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구원의 길에 들어가는 은총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이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몹니다. 심지어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지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갑니다. 그들은 구원의 은총을 걷어찼습니다. 겸손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기도는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 버리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다른 면’을 직접적으로 찾는 것입니다.

- 토마스 머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하늘이 알고 땅도 알지만 사람은 모릅니다. 일생동안 우리를 따라다니는 선입견입니다. 선입견은 환영을 받지 못하는 예수님과 예언자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편견 속에 갇혀 있는 우리들 현실입니다. 사랑이 부족한 부끄러운 믿음은 편견을 내려놓기가 힘이 듭니다.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고 판단합니다. 선입견을 비워내는 자기성찰이 참으로 부족합니다. 교만에 취해있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편견이 빠져나가는 복음화의 과정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편견을 뒤엎는 사랑입니다. 

못 자국으로 우리의 편견을 들여다봅니다. 사람에 대한 예의가 필요합니다.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구원은 서로를 살릴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이유가 사랑의 기쁨이듯 우리 만남의 이유가 서로를 향한 선물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그 어떤 사람도 결정되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정된 그 생각을 뒤엎듯이 사람을 회개로 바꾸어 놓습니다. 환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변화입니다. 환영받지 못해도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간 이들이 있기에 복음은 단절이 아닌 이어지는 연속이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사순이며 사순의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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