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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3/05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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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주님,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저희가 이 거룩한 제사를 정성껏 거행하고 언제나 주님의 도움을 받게 하소서.

 

2024년 3월 5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3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마태오복음 18장 33절)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마태오복음 18장 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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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복음 18장 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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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다니엘서 3,25.34-43)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받아 주소서.

  • 오늘 복음
    (마태오복음 18,21-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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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니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마태오복음
18장 21-35절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3월 5일 05:00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

 

✚ 교황님 3월 기도지향 00:24

✚ 미사시작 00:38

✚ 강론시작 07:46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 이유.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조건 없는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의 비유로 이러한 가르침을 주시는데, 만 탈렌트는 ‘일억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일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라고 할 때 백 년을 일하여야 벌 수 있는 금액이 삼만 육천오백 데나리온입니다. 그런데 일억 데나리온을 빚졌다면, 이는 평생을 일하여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막대한 빚입니다. 

결국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줍니다. 한번 상상을 하여 볼까요? 빚을 갚을 길이 없어 자신은 물론이고 ‘아내와 자식까지 팔아야 하는’ 채무자에게, 채권자가 “가엾은 마음이 들어” 이를 모두 탕감하여 준다면 그는 어떤 심정이 될까요?

그러나 이 종은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자 그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주인은 종의 빚을 탕감하여 주었는데, 같은 종들 사이에서는 이런 자비와 탕감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간절함을 아시고(제1독서, 아자리야의 기도 참조), 가난을 볼모로 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 자신을 희생하시어 인간을 가장 안전한 상태에 있도록 배려하시지만, 인간은 상대의 간절함을 이용하고 착취하며 파괴합니다. 같은 동료에게 가혹하게 굴었던 종의 소식이 전해지자 비유는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베풀었던 용서와 탕감을 거두어들입니다.

우리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여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상대가 회개하였거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두렵지만 청해야할 것

 

오늘 독서는 불가마 속에 곧 죽게 될 절체절명의 상태에서 세 청년을 대표하여 아자르야가 바치는 절절한 기도입니다. 

인간적으로만 보면 너무도 불행한 처지이기에 매우 두렵지만 그래서 막상 제가 이런 처지가 된다면 제가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런 처지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선 아무것도 없는 상태 곧 가난한 처지에 처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즈카르야는 이렇게 이스라엘의 가난을 얘기합니다.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희생 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당신께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즈카르야는 물질적 가난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물질적으로도 가난했겠지만 우리의 박해 시대처럼 교회가 완전하게 파괴되어 성직자와 교계 제도도 없고 성전도 없어서 제물도 없고 제사도 드릴 수 없게 된 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난이 이스라엘을 겸손케 했습니다. 그래서 이에 관해 즈카르야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주소서.” 

그렇습니다.,가난이 겸손케 하고, 겸손이 진정 하느님 앞에 서게 합니다. 그리고 겸손이 어제 수많은 예물과 군대를 거느리고 나타난 나아만과 달리 그런 것 없는 자신 그러나 마음만은 진실한 자신을 봉헌케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 영적인 갈망이 최고조인 상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제가 부러운 것이 이것이고, 이 때문에 두렵지만 이런 상태가 되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사실 저는 너무 부자이고 여러분도 그럴 것입니다. 

과거에 비하면 물질적으로도 무척 아니 너무 부유하고 신앙 환경은 더더욱 부유해졌고 어찌 보면 넘쳐납니다. 

사제도 많고, 성당도 많고,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나 피정 프로그램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신앙심은 굳건하지 않고 갈망은 없습니다. 

이제는 뭔 배인지 모르기만 배가 불러서 미사가 있어도 가지 않고,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도 가지 않으며 골라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뭐가 많아도 마음이 없고 갈망이 없는 것이 문제인데 실은 너무 뭐가 많아서 마음도 없고 갈망도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싫고 그런 상황이 닥칠까 두렵지만 가난한 처지와 겸손한 마음을 주십사고 기도하는 오늘 저이고, 주님의 가르침대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이 미워진다면 우선 감사일기 쓰고 십일조 내고 자선부터 실천하라.

 

영화 ‘레인 맨(Rain Man)’에서 돈만 아는 이기적인 찰리 배빗은 자폐증이 있는 그의 형 레이먼드와의 동행을 통해 성숙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찰리는 빚에 허덕이면서 파산 직전에 몰렸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많은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 유산을 받으려면 형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레이먼드를 고인이 된 아버지의 재산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고 함께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던 중 어렸을 때 형이 자기를 구하려다 오히려 부모님에 의해 시설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기는 형이 있는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레이먼드와 함께 다니며 모험을 경험하고 그 과정에 형과 정이 듭니다. 그리고 자신이 형을 데리고 다니는 것보다 시설에 살게 하는 것이 더 형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하고 유산을 포기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마음을 관계를 망가뜨립니다. 관계는 돈을 좋아하는 마음과 반대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용서에 관한 내용이지만, 비유 말씀은 돈을 주제로 하십니다. 곧 일만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일만 탈렌트는 하루 일당을, 곧 한 데나리온을 10만 원이라치면 6조 원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액수를 탕감받은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꾸어간 돈 100데나리온, 곧 천만 원을 갚지 않는 것에 더 화를 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6조 원을 받은 기쁨이 천만 원 잃은 고통보다 당연히 더 커서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치부할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용서는 내가 받은 용서의 기쁨이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이가 나에게 주는 고통보다 크지 못하게 느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피해의식’이 막습니다. 피해의식이란 내가 사랑받지 못한 존재라는 믿음입니다. 보통은 어렸을 때 받지 못했던 사랑의 상처가 너무 커서 나이가 들어서도 생존에 필요한 재물을 잃는 고통을 남들보다 몇 배나 크게 느낍니다. 그래도 6조 원의 기쁨보다 천만 원의 고통이 더 큰 것은 문제입니다. 
 
미움은 교만에서 옵니다. 그러나 그 교만은 또한 육욕과 탐욕을 자아냅니다. 가장 이기기 쉬운 것이 탐욕이고 그다음이 육욕이고 마지막이 교만입니다. 그러니까 용서는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우선 탐욕을 먼저 없애야 나에게 돈을 꾸어간 사람에 대한 원한이 줄어듭니다. 

우리는 탐욕을 없애는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일기 쓰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 것이라고 여기게 되어 나에게 돈을 안 갚는 사람이 덜 미워집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완전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재물을 주신 이유는 가난한 사람과 나누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돈을 버는 이유는 가정을 위해 내어주라는 뜻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감사만 하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록펠러는 십일조를 철저히 내는 사람이었지만, 돈에 대한 집착이 강했습니다. 쓸데없는 보험료가 나갔을 때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병이 들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때는 당연히 미운 인간들이 많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불치병에 걸려 오래 못 살게 되었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여자아이의 수술비를 지원하게 되었고 그때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진 것에 감사한 것을 넘어서서 줄 수 있어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잃은 재물은 오히려 좋은 일에 쓰였다고 하며 미워지던 사람이 고마워질 수도 있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은 그 한 군데의 상처 때문에 건강한 다른 많은 지체들의 행복을 잊어버립니다. 오직 그 상처에만 집중하고 그 상처에 아주 작은 아픔이라도 더해질라치면 기겁합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그 상처를 건드리면 용서할 수가 없게 됩니다. 

재물이나 명예, 인기나 혹은 내가 가진 무엇으로도 상처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 미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분노는 나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데서 옵니다. 그 욕망을 무력하게 만드는 게 이웃 사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어느 자매님께서 젊었을 때, 남동생이 사고로 하늘 나라에 가버려서 어린 조카들을 맡아 키웠다고 합니다. 남의 자식을 함부로 대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또 너무나도 사랑하는 남동생이기에 조카에게 자기 자식들보다도 더 먼저 챙겨주는 등 신경을 써서 키웠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녀들이 “우리가 의붓자식이야?”라며 어릴 적에 불만을 많이 표시했었다고 합니다.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남동생의 아들을 잘 키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조카가 성인이 되어 의사가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친척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오랜만에 만난 고모인 자기에게 인사는커녕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 자녀보다 더 신경 써서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본인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나 봅니다. 
 
아무튼 이 자매님은 너무나 섭섭했습니다. 그래서 친한 친구에게 이 서운한 마음을 이야기했더니, 친구가 “만약 다시 남동생 죽었을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조카를 받을 것 같아?”라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 자매님은 한참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조카가 커서 나를 섭섭하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맡을 거야.” 
 
이 모습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 그냥 ‘사람’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진짜로 가치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하시지요. 가치 있는 삶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한 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한계를 두지 않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사랑을 주시는 모습을 우리는 복음에서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에, 구원의 길에서 제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큰 빚을 탕감받고도 동료의 작은 빚을 참지 못하는 못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한 모습으로, 절대 가치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가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모습은 어떨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위대한 행위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위대한 사랑으로 하는 작은 행동이 있을 뿐입니다.

- 성 마더 데레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뺄 수도 더 할 수도 없는 우리의 현실을 살아보면 우리는 압니다. 용서가 있어야 할 곳에 형제가 있고 형제가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느님께로 흘러가는 삶이 바로 용서의 삶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손가락질 할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고통을 모르면 용서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고통도 나누고 용서도 나눌 수 있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주님의 살과 피인 사랑과 용서임을 깨닫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용서할 차례입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건 마음으로부터의 용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해자를 향한 증오와 복수심에 갇혀있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용서는 우리 영혼을 씻어주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용서는 말보다는 마음이며 마음보다는 행(行)하는 우리의 실천입니다. 아픈 마음으로부터 아픈 이들을 위한 용서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를 위한 용서가 아니라 우리자신을 위한 용서입니다. 

우리 삶의 마지막도 용서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지켜나가는 것이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깊은 마음의 용서이십니다. 이 사순의 여정이 진정한 용서의 여정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 삶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십자가 아래에서 용서를 청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용서를 통해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모상임이 드러납니다. 용서를 행하는 용서의 사순이며 마음으로부터 하느님을 청하는 마음의 오늘입니다. 오늘이 용서이며 서로의 용서가 오늘을 되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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