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주님, 존엄하신 주님께 간절히 비오니 구원의 축제가 다가올수록 저희가 더욱 큰 열정으로 파스카 신비를 준비하게 하소서.
2024년 3월 7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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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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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들어라. (예레미야서 7장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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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아서 7장 23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예레미야서 7,23-28)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민족이다. - 오늘 복음
(루카복음 11,14-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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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니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루카복음
11장 14-23절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15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16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18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19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1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22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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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7일 05:00
김동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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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내 말을 들어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오늘 독서와 복음은 서로 대조되는 두 존재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듣지 않아서 말이 끊기게 된 이스라엘’(독서)과 ‘말을 못하였지만 이제는 말을 하게 된 벙어리’(복음)가 그들인데, 이들을 연결시키는 주제는 ‘소통’입니다.
복음의 본문은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라는 문장으로 ‘말을 못하게’ 된 것, 곧 듣지 못해서 말까지 못하게 된 것이 ‘악의 일’이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렇게 악의 일이 듣지 못하게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 결국 소통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일’은 듣게 하고 말하게 하여 소통을 되찾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일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악(베엘제불. ‘즈불룬의 바알’이라는 뜻)의 힘을 빌려 하는 것인지 궁금해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논지로 답을 주십니다.
어떤 나라나 가정도 분열되면 망하는데, 만일 악의 최고 존재인 베엘제불이 또 다른 악을 쫓아낸다면, 그것은 악의 분열을 자처한 것이니 너무도 분명한 모순이 됩니다. 그러니 악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일은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소통이 되지 않는 상태,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소통을 무력화하는 것이 악의 일입니다. 만일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 내 삶을 무너뜨리고 피폐하게 만드는 느낌이 든다면, 분열과 교란으로 우리를 붕괴시키는 악의 속성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선명하게 호소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소통하며 알려 주시는 길을 의연히 걸어갈 때, 우리는 반드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불편부당과 부하뇌동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불편부당(不偏不黨)과 부화뇌동(附和雷同).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불편부당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공동체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화뇌동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도 공동체를 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불편부당하지 않으면 공동체가 깨지는 것을 보겠습니다. 불편부당이란 어느 편에서 서지 않고 어느 당파에 속하지 않는 거지요.
그런데 한 공동체에서 누가 한편에 서고 누가 다른 편에 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 보듯 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주도적으로 그리고 나 중심으로 편 가르기와 줄 세우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편으로 만드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유력한 사람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은 비단 다른 편과 내 편을 가르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진리의 편에 서고 주님 편에 서야 할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 편 네 편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하느님 편만 있어야 하는데 내 편에 서게 함으로 그를 하느님 편에 서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부화뇌동하지 말아야 함을 보겠습니다. 남을 내 편으로 만들지 않을 뿐 아니라 나도 어느 편에 서지 않는 것을 말함입니다.
부화뇌동이 주도적으로 편 가르기와 줄 세우기를 하는 것보다는 덜 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공동체를 깨는 것이기에 못지않게 악하고, 무엇보다도 줏대를 잃고 악한 일에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기에 딱한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뇌동(雷同)이 의미하는 바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뇌동이란 천둥소리가 나면 사람들이 놀라 같이 움직이는 형용이고, 그래서 뇌동하지 말라고도 하지요.
이는 예기(禮記)에 聽必恭 毋勦說 毋雷同. 곧 남의 말을 공손히 듣되,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무조건 따라 하지 말라고 한 말과 맥을 같이하지요
그런가 하면 군자의 태도와 관련하여 논어에는 이런 말도 나옵니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 곧 남과 화합을 하나 꼭 같지는 않다는.
그러니까 진리에 어긋나는 말을 누가 하면 화이부동하고 부화뇌동하지 않아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군자를 넘어 성인 곧 진리 편에 서고 하느님 편에 설 사람들입니다. 확실하게 주님 편에 서야 하지 어정쩡하게 있다가 부화뇌동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쉬는 교우’란 용어가 주는 해악
영화 ‘사랑도 번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은 도쿄 한 호텔에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두 명의 미국인 밥 해리스(Bob Harris)와 샬럿(Charlotte)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밥은 유명 영화배우지만 인기가 조금씩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20억 원의 돈을 받고 도쿄로 위스키 광고를 찍으러 온 것입니다. 처음 접해보는 동양 문화에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고 집에 전화해도 아내는 시큰둥합니다. 결혼 24년 차이기 때문입니다.
밥처럼 같은 호텔에 있으면서 잠 못 드는 샬롯은 결혼 2년 차입니다. 남편에게 사랑받고 있지만, 출장이 잦은 남편에 비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샬롯도 여전히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외롭습니다.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나 술 한잔하고 대화를 나눕니다. 서로 비슷한 점이 많고 둘이 함께 있으니 잠이 옵니다. 둘은 미묘한 감정을 느끼지만, 선을 크게 넘지는 않습니다. 밥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 둘은 헤어지기 아쉬워합니다. 밥은 아쉬워하는 샬롯에게 가벼운 키스를 하며 귀에 대고 뭐라 말합니다. 샬롯은 얼굴이 밝아지며 영화는 끝납니다.
과연 저 둘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와 행복할까요? 어쩌면 더 큰 일탈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잠 못 드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계속 일탈을 꿈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탄의 힘을 빌려 그렇게 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다른 표징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물론 다른 표징을 보여주어도 그들은 믿지 않고 다른 핑계를 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이유가 당신 편에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나라도 나라고 천국의 나라도 나라라고 하십니다. 나라가 갈라지면 나라는 망합니다. 마귀의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도 악으로 단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를 악한 자가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를 하늘이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편 아니면 사탄의 편, 두 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중도는 없습니다. 빛 안에 어둠이 속할 수 없고, 어둠 속에 빛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긍정하지 않는다면 사탄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편에 서지 않는 자는 이미 사탄 편에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입니다.
어떤 이들은 새벽과 저녁은 빛과 어두움이 섞여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새벽은 빛을 선택한 사람의 상태이고 저녁은 어둠을 선택한 사람의 상태입니다. 내가 어느 편에 서기로 했느냐에 따라 내가 어느 나라에 속해있는지가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쉬는 교우’는 어떨까요? 예수님의 편일까요, 어둠의 편일까요? 당연히 예수님의 편임을 멈춘 상태입니다. 빛의 편이었다면 조금씩 더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멈춘다는 말은 어둠으로 가고 있기에 어둠의 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냉담자들을 ‘쉬는 교우’라고 칭합니다. 쉰다는 말은 좋은 말입니다. 걷다가 쉬면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가 축적됩니다. 그러나 신앙을 쉰다는 말은 죽어간다는 뜻입니다.
밥 먹기를 쉬면 어떻게 될까요, 물 마시기를 쉬면 어떻게 될까요? 오히려 힘이 빠져서 죽어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냉담 교우의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하려고 쉬는 교우라고 칭합니다. 오히려 그런 칭호가 냉담을 회두시킬 필요가 없게 만들고 그들도 자신들의 상태가 빛으로 나아가는 줄 착각하게 합니다.
영화 ‘삼사라’에서 타쉬는 절에서 나와 결혼합니다. 신앙을 잠시 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내와 자녀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잠시 쉬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쾌락의 기쁨을 알아버렸고 아내와 자녀가 다시 돌아오는 길을 막습니다. 그런데도 쉬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성녀 데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를 쉬면 조금씩 죽어갈 것입니다.”
이것이 영성의 길을 아는 사람의 말입니다. 쉼은 생명을 회복함이지만, 냉담은 죽음을 선택함입니다. 이 절실함이 자녀들이 공부를 위해, 직장과 혼인을 위해 신앙을 잠시 쉰다고 했을 때 우리의 반응을 바로잡아 줄 것입니다.
사랑은 쉴 수 없습니다. 사랑을 쉰다는 말은 사랑이 식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불에 올리면 뜨거워지고 불이 없으면 식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진, 아니면 후퇴입니다. 신앙, 아니면 불신앙입니다. 쉬면 죽는 게 신앙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상을 해 보십시오. 아인슈타인이 지금 이 자리에 강의하러 온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 강의를 듣겠습니까? 또 이 강의를 듣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올까요? 지금이야 워낙 유명한 분이라서 많은 사람이 강의를 듣기 위해 올 것이라고 예상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살아 있을 때는 교수로서 그렇게 인기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너무 아는 것이 없어서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물리학계의 주목받는 샛별이었지만, 수강 신청자는 겨우 세 명이었고 다음 학기에는 신청자가 아예 없어서 그 강좌가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통해 프린스턴 대학 총장은 아인슈타인의 교수 기량이 부족하다면서 정교수 직위를 주지 않으려고도 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더 잘 가르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자기 역량을 드러내는 분야가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실력 없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처럼 실력은 뛰어나지만, 단지 가르치는 것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늘 이런 식입니다. 하나의 모습으로 전체를 평가하는, 그래서 더 중요하고 큰 것을 보지 못합니다. 하느님 일 역시도 전체를 보지 못하기에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에 바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마귀가 나가고 이제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군중 중의 몇 사람이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이 말을 듣고서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런 표징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으로 알겠다는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도 하느님의 커다란 표징입니다. 당시에 벙어리 마귀는 하느님만이 쫓아낼 수 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못 하게 하는 벙어리 마귀이기에 하느님만이 쫓아내서 당신 말씀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편을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마귀를 쫓아내는 어리석은 행동들을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단순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에 관한 부정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주님의 반대편에 서서 반대하고 흩어 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일상이 바뀌어야 미래의 내가 바뀐다.
- 김시현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하느님의 편에 서서 하느님을 따르는 모든 분들의 미소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빠져있는 것은 다름 아닌 양심성찰입니다. 주어진 삶으로부터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웁니다. 자기성찰을 건너뛰며 만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잊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하느님 상을 갖고 있습니다. 복음과 함께 자라나야 하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자라나지 않으면 우리는 흉내만 낼 뿐입니다. 하느님을 모르기에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알게 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빼앗고 쫓아내고 흩어버리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의 힘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은 늘 흩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삶의 반대말은 삶을 내어드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믿음입니다. 포용과 관용의 십자가가 주님과 함께 사람들을 모아들입니다. 신앙의 이방인이 되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살고 있다는 표징입니다.
자기성찰의 표징이 마침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은총의 삶이 되듯 역방향이나 역주행으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는 지를 성찰하는 사순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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