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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3/09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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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주님은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신다.

주님, 해마다 사순 시기의 재계로 파스카 성사를 준비하게 하시니 저희가 그 신비의 기쁨을 미리 맛보고 구원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소서.

 

2024년 3월 9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3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호세아서 6장 3절)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호세아서 6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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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서 6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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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호세아서 6,1-6)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 오늘 복음
    (루카복음 18,9-14)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3월 9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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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루카복음
18장 9-14절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3월 9일 05:00
조현용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7:17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우리의 기도는 누구를 향하고 있나요?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오늘 독서의 마지막 선언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려 줍니다. 복음에서도 비슷한 메시지를 발견하는데, 바리사이와 세리의 대조적 모습을 통해서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기도하려고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둘의 대비를 본질적으로 드러내는 요소는 그들의 기도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였습니다. 우리말로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라고 옮긴 그리스 말 문장을 그대로 옮기면 “바리사이는 서서 자기 자신을 향하여(‘프로스 헤아우톤’) 이렇게 기도하였다.”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에이스 톤 우라논’)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기도합니다. 바리사이의 기도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면 세리의 기도는 ‘하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향하여 그분의 현존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참된 기도이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하느님 없이 진행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결국 하느님의 최종 판단은 세리가 ‘의롭다’는 것으로 선언됩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하느님 없이 자기 행위만 과시한 바리사이의 기도는 그 응답을 받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을 향하여 온전히 그분을 만나고 그분과 소통한 세리는 ‘의롭게 됨’이라는 기도의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나의 삶과 성장에만 관심을 두는 태도는, 그것이 아무리 도덕적이고 품위 있는 생활이라 하더라도, 그저 신앙으로 포장된 경건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구태의연한 경건주의를 넘어서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소통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통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진정한 기도가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자,  이제.

 

“자, 주님께 돌아가자.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오늘 호세아서는 “자”로 시작하는데 오늘 저는 이 “자”라는 말이 왠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자”라는 말은 “자, 이제 조용히 하고 ---합시다.”처럼 지금까지 하던 것을 멈추거나 떠들고 있던 것을 멈추고 “자”라고 하는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고 그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 “돌아가자.”와 “알도록 힘쓰자.”입니다. 주님께 돌아가자는 것과 주님을 알려고 힘쓰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 주님께 돌아가자.”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주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는 것인데, 누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하면 나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주님 앞에 줄곧 있었다거나 지금은 주님 앞에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다시 “자, 진정 주님께 돌아가자.”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 있는다고 있지만 제가 참으로 주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비유로 드신 바리사이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하느님 앞에 서 있고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온전히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 올바로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 있는 것 같지만 세리와 자신을 비교하고 있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의 의로움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랑은 다른 인간들 앞에서나 하는 것입니다. 누가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그는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곧 세리 앞에 있는 것이며, 하느님 앞에 있다 하더라도 자랑할 수 있는 인간 정도로 하느님을 생각한 겁니다. 

진정 그리고 오롯이 하느님 앞에 있다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할 수 없고, 자기의 의로움을 보고 자랑할 수 없고 자기 죄 외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진정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오늘 복음의 세리이고, “자, 돌아가자.”라고 하는 것도 이제 진정 하느님 앞에 세리처럼 서자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자, 주님을 알도록 애쓰자.”라는 말을 보겠습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주님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뇌물을 좋아하고, 우리의 마음보다 십일조를 좋아하고, 겸손한 마음보다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더 좋아하는 분으로 안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몰라도 너무도 모르는 것이고, 잘못 알고 있어도 너무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결핍이 있는 인간처럼 알고 있고, 그 결핍을 채우려고 욕심을 부리는 인간처럼 하느님을 알고 있으며, 그 결핍을 인간을 통해서 채우려는 존재쯤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호세아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it is love that I desire, not sacrifice, and knowledge of God rather than burnt offerings.” 

자, 우리도 이제 확실히 압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겸손과 사랑임을..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일까?” 
 
항상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서 더 잘 살기 위해 늘 나 자신을 다그치곤 했습니다. 잠을 줄여서 열심히 기도하고, 또 시간을 쪼개 쓰면서 열심히 하느님을 알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도 부족해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정말로 열심히 산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나 스스로 그렇지 않음에 텅 빈 마음의 상태를 느낄 때가 참 많았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를 ‘영적 쾌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다그쳐서 영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 물질적 쾌락을 따르려는 이유인 것처럼, 영적인 것에 대한 집착 역시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영적 체험만 할 수 없습니다. 이때 오히려 영적 교만에 쌓이기 쉽게 됩니다. 
 
성당 안에 머무르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집안일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면 어떨까요? 성당 사람들은 정말로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상 안에 살면서 세상의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면 이는 영적 쾌락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기처럼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잘못되었다면서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영적 쾌락을 넘어 영적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과정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해야 합니다.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세상에 실천하면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식의 판단이 생기는 순간, 영적 교만이 자리를 잡은 것이고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바리사이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십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의 공로와 미덕을 하느님께 자랑하고 다른 이들을 멸시하면서 이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말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영적 쾌락에 빠져 있으며, 이를 넘어 영적 교만의 상태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세리는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뉘우치면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지합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상태, 이 순간에 비로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물질적인 쾌락에서만 벗어나면 그만이 아니었습니다. 영적 쾌락에서도 벗어날 수 있어야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사람만이 의롭게 되어 하느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정직하다. 혼자 있을 때는 자기를 속이지 못한다. 그러나 남을 대할 때는 그를 속이려고 한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하면, 그것은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속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올바른 기도는 우리자신을 감추거나 과장하지 않습니다. 모든 기도를 듣고 계시는 기도의 중심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시작기도는 잘 하는데 마침기도는 잘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기도입니다. 

시작도 마침도 기도입니다. 기도의 고백은 겸손한 자기성찰입니다. 정직한 자기성찰을 잃으면 기도는 나아갈 길을 잃게 됩니다.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이 의로운 자기성찰의 고백입니다. 기도로 되돌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의 중심입니다. 

잃어버린 믿음을 되찾는 것 또한 기도입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지면 기도도 깊어집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 기도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은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회개의 기도입니다. 자기변명을 기도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변명의 허물을 벗고 하느님 앞에 가슴을 치며 내 탓으로 서는 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의로운 기쁨입니다. 

이 사순시기의 시작도 마침도 하느님을 향하는 온전하고 의로운 기도의 여정이길 기도드립니다. 감추지 않고 낮아짐을 청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낮아짐이 의로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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