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하느님께 경배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네.
주님, 주님의 가족을 자애로이 지켜 주시고 천상 은총만을 바라는 저희를 끊임없이 보호해 주소서.
2024년 2월 8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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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너희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여라. (야고보서 1장 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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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1장 21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열왕기 상권 11,4-13)
네가 계약을 지키지 않았으니, 이 나라를 떼어 내겠다. 그러나 다윗을 생각하여 한 지파만은 네 아들에게 주겠다. - 오늘 복음
(마르코 복음 7,24-30)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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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여라. 그 말씀에는 너희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다.
마르코복음
7장 24-30절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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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8일 05:00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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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최정훈 바오로 신부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도록 살아야 해.
제1독서는 솔로몬의 타락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이야기는 죄가 어떻게 시작되며 어떻게 인간을 무너뜨리는지에 대하여 묵상하게 합니다. 솔로몬의 타락은 인간적으로 매우 지혜로운 선택과 함께 시작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번영을 위하여 가장 좋은 결정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혼인으로 동맹하였고,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고자 이웃 나라와 물자 교역을 늘렸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웃 나라의 신들을 받아들인 것은 그 나름대로 문화적 다양성과 풍요로움에 이바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 번영과 함께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솔로몬이 하느님에게서 마음이 멀어지는 과정은 서서히 진행됩니다. 그는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었고, 조약을 공고히 하고자 정략혼인을 하였습니다.
또한 이민족에서 데려온 아내들을 위해서 그들이 섬기는 신을 위한 신당을 짓고서 그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위한다는 좋은 의도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다른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최악의 결과로 끝이 납니다.
솔로몬은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뿐이라 변명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죄는 이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야.”라는 말로 우리의 경계심을 늦추며 조금씩 조금씩 자기 자리를 차지합니다.
몰라서 짓는 죄보다 그것이 죄인 줄 알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어 짓는 죄가 더 많아 보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죄악과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물신주의, 무관심, 이기심과 같은 세속적 정신과 손을 잡고, 자리를 내주며, 결국 그 세속적 신념에 동의하고 그것에 제물(삶)을 바치게 됩니다.
그렇게 합리화하고 자기 정당화를 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악에 빠져듭니다.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도록(요한 17,14-16 참조) 죄악을 근본적으로 끊어 버리는 단호함과 용기를 청하여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믿음의 깊은 눈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이 말씀이 설마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일까 의심도 하고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도 송구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송구스러워할 필요 없고, 의심할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잘못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주님께서 너무도 교만하시기에 우리처럼 깔보신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처럼 교만하시고 우리처럼 깔보시는 분이시라면 그런 분을 우리가 우리의 주님이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 그런 분이 절대로, 절대로 아니실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주님은 동족이라고 더 사랑하고 이방인이라고 덜 사랑하는 분이 절대로 아니고 모든 족속을 다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그래서 동족 의식이나 민족주의는 아예 없으신 분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주님께서는 왜 이렇게 하신 것인지, 분명 숨겨진 좋은 의도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제 생각에 그 숨겨진 의도는 이스라엘 사람들, 그중에서도 제자들에게 도전을 주시려는 것일 겁니다. 이방인도 이런데 너희는 더 그래야 하는 것 아니냐? 이런 식의 도전 말입니다.
실로 주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그리고 복음사가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이스라엘 동족은 주님을 죽이는데 오히려 이방인인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주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미리 아시고 도전하셨습니다. 당신이 동족 주의자인 거처럼 이방인인 자기를 무시하셔도 이 여인은 당신이 그런 분이 아니라고 믿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사실 여인이 그것도 이방 여인이 유대 남자를 찾아온 것은 그 당시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이 여인에게 주님은 유대 남자가 아닙니다. 겉모습은 유대 남자지만 그것을 초월하시는 분, 겉으로는 무시하는 척하시지만 실은 그렇지 않으신 분임을 믿음으로 이미 안 것이고 믿음의 깊은 눈으로 본 것입니다.
믿음의 깊은 눈.
저는 이것을 오늘 강조하고 싶습니다. 눈 속의 풀을 보고 얼음 밑의 고기를 보듯 겉모습과 겉 행동 속의 본질을 보는 깊은 눈 그것이 믿음의 눈이고, 그렇게 아는 것이 믿음의 앎입니다.
주님께서 이방 여인에게서처럼 우리를 거칠게 다루셔도 그것이 주님께서 하신 거라고 믿는다면 그것을 통해 좋은 것을 주시고 가르치시려는 것을 보는, 그런 믿음의 깊은 눈을 우리도 이방 여인처럼 가져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죽을 때까지 청해야 하는 것 하나는 있어야 하는 이유
영화 ‘백조의 노래’(2020)는 깊은 감정적, 윤리적 딜레마를 탐구하는 생각을 자극하는 공상 과학 드라마입니다. 이 영화는 불치병 진단을 받은 사랑하는 남편이자 아버지인 카메론 터너에 초점을 맞춥니다. 임박한 죽음과 씨름하는 동안 카메론은 스콧 박사로부터 혁신적인 과학적 해결책을 소개받습니다. 그 해결책은 자신의 클론, 즉 모든 면에서 같지만, 불치병이 없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족은 스콧이 죽어도 그것을 모르고 제2의 스콧과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카메론은 자기 대신 자기의 복제인간이 가족과 함께 살게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것이 이미 동생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에게 또 한 번의 고통을 더 주는 자기 이기심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스콧 박사에게 청합니다. 그렇게 해 달라고.
그러면서도 왠지 다른 인간에게 자기 아내와 아들을 빼앗기는 느낌이 들어 몰래 집안으로 숨어들기도 합니다. 아내나 아들이 두 카메론을 동시에 보면 큰일입니다. 그러나 복제 카메론은 자기만큼 카메론을 아는 인간이 없기에 자기가 숨어줍니다. 카메론은 그런 자신의 복제 인간에게 가족을 맡겨도 된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스콧 박사도 결국엔 가족의 행복과 카메론이 편하게 죽게 해주는 좋은 사람임을 인정합니다.
카메론이 스콧 박사에게 무언가 청할 때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무언가 청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를 청하는 것은 믿음의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로 페니키아 이방 여인이 예수님께 악령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의 청에 처음엔 완강히 거부하십니다. 여인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무언가 이 여인처럼 목숨을 걸고 청할 수 있는 것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청할 줄 아는 사람이 주님께 대한 믿음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무언가 청할 때 우선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강아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여인은 강아지도 자격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는 무엇이든 청할 자격이 있습니다.
둘째는 ‘자비와 능력’에 대한 믿음입니다. 상대에게 내가 청하는 것을 들어줄 능력과 자비가 없다고 여긴다면 나는 청하는 것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자비롭지 못하다고 여기면 결국 내가 이용당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평소에도 주님을 좋은 분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분을 모진 분으로 여겨 불만을 품는다면 스스로 주님께 청하는 일을 포기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제일 중요한 것인데 주님의 ‘뜻’에 맞는 것을 청해야 합니다. 아이가 칼과 총을 사달라고 청한다면 부모가 들어줄 리 만무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알아서 그런 것을 청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뜻에 어긋남을 알기 때문에 계속 청해봐야 소용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로 페니키아 여인은 자기 딸이 악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기도에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시며 끊임없이 청하라는 의미로 불의한 재판관에게 지치지 않고 청하는 과부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주님의 기도로 청하면 내 청함이 하느님 뜻에 맞는지, 안 맞는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통해 내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 뜻에도 옳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죽을 때까지 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자비와 사랑, 그리고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자격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청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헛갈릴 때는 주님의 기도나 십계명, 혹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해당하는지만 살피면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드는 것이라면 죽기까지 청하십시오. 그것이 주님과 같은 식탁에서 빵을 먹을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자신을 인정하는 이의 청을 주님께서는 결코 실망시키거나 뿌리치실 수 없으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20세기 초, 덴마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을마다 순회공연을 하는 유랑 극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곡마단에 불이 난 것입니다. 곡마단의 광대는 분장을 지우지 못한 채 마을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불이 났다고 소리치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때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광대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아무도 광대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공연을 보는 사람이 적으니까, 이제는 별 희한한 방법을 다 동원한다.’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광대는 진짜 불이 났다면서 계속해서 호소했습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광대가 정말로 연기를 그럴싸하게 잘하는데?”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곡마단은 모두 불타버렸고, 그 불이 번져서 마을까지도 모두 불에 타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세상입니다. 워낙 거짓이 많아서인지 먼저 의심부터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불신에서 모두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시대에 믿음 없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의심하며 불신했습니다.
이런 불신은 자기를 힘들게 합니다. 정확한 답을 위한다는 이유를 말하지만, 우리 인간이 정확한 진리로 나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삐딱한 마음을 가지고 의심한다면, 삶 자체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것도 습관이라고 합니다. 물론 여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더욱더 주님 뜻에 집중하면서 그분 안에서 진리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의심과 불신으로 만든 힘든 삶에서 벗어나 기쁨과 행복의 만족스러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대단한 믿음의 여성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한 어머니의 믿음이었습니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매정한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 딸을 강아지에 비유하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이 말씀에 심한 모욕과 수치심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매정한 말씀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사랑의 딸에게서 마귀가 쫓겨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굳은 믿음을 가졌다고 스스로 말하는 이스라엘 사람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에도 믿지 못하지만, 믿음이 없는 이방인이라면서 비판을 받던 이방인 여성은 그 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굳은 믿음을 보인 것입니다.
믿음은 하느님 때문이라면 모욕적인 수치심도 기쁘게 견디게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은 모든 문제의 원인이자 해결책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부스러가 있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쏟아붓는 주님의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스러기에 감사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진실로 믿는 사람입니다. 부스러기들의 역사가 모여 신앙의 역사가 됩니다. 부스러기들이 모여 우리의 기도를 건져올리고 있습니다.
날마다 부스러기처럼 작아지지 못해 은총을 놓치는 우리들 삶입니다. 부스러기처럼 작아지면 고요해지고 부스러기처럼 작아지면 삐걱거리지 않습니다. 믿음의 처방전은 언제나 우리가 부스러기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부스러기가 향하는 곳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부스러기가 가야 할 길은 겸손한 믿음의 길입니다. 부스러가가 쌓이고 쌓여서 큰 뜻을 이룹니다. 우리에겐 부스러기 은총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긁어모아야 할 충실한 생활입니다.
부스러기에게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길을 잃는 것은 부스러기들을 놓치며 살기 때문입니다. 사라지기 위해 부스러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감사하기 위해 부스러기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스러기 사랑에 감사하는 오늘 되십시오. 무디어가는 일상의 날을 바로 세우는 것은 부스러기의 힘입니다. 부스러기의 손을 들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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