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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2/04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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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하느님께 경배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네.

주님, 주님의 가족을 자애로이 지켜 주시고 천상 은총만을 바라는 저희를 끊임없이 보호해 주소서.

 

2024년 2월 4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2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5주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별들의 수를 정하시고, 낱낱이 그 이름 지어 주시네. (시편 147장 4절)

 

별들의 수를 정하시고, 낱낱이 그 이름 지어 주시네. (시편 147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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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7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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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욥기 7,1-4.6-7)
    나는 고통스러워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 제 2독서
    (코린토 1서 9,16-19.22-23)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마르코 복음 1,29-39)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2월 4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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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그리스도 우리의 병고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 짊어지셨네.

 

 

마르코복음
1장 29-39절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29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2월 4일 05:00
정태영 멜라니오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14:30

 

 

 

가톨릭 스튜디오 주일미사

 

 

2024년 2월 4일 11:00
원당동성당 이병근 대건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3:10

✚ 강론시작 19:01

 

 

 

성필립보생태마을 주일미사

 

 

2024년 2월 4일 17:00
다볼사이버성당 김희성 그레고리오 신부

 

✚ 미사시작 07:19

✚ 강론시작 16:21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최정훈 바오로 신부

 

노고와 헌신으로 가득 찬 하루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고통스럽고 수고스러운 우리의 삶을 묵상하도록 이끕니다. 제1독서에서 시련에 부딪힌 욥은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임을 선언하며 비탄에 잠겨 있습니다. 

복음이 들려주는 예수님의 전형적인 하루는 노고와 헌신으로 가득 찬 우리의 하루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지쳐 쓰러지기도 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며 허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고백은 이 고역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 내야 하는지 그 실마리를 던져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의무”라고 여기고, 그것을 하지 않으면 “불행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에 따로 “삯을 요구할 권리”가 없으며,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받는 “삯”이라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에게 주어진 무거운 의무를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하지 않으면 불행하게 되는 행복의 원천으로 여깁니다.

삶은 우리가 반드시 살아 내야 하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와 같습니다. 이 의무에는 어려움과 고통이 따르지만, 그 이면에는 기쁨과 행복이 자리합니다. 삶이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기에,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선물이자 보상이 됩니다. 

삶 속에서 순간순간 느끼는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 이웃과 주고받는 따뜻한 사랑, 세상의 아름다운 인물들과 아름다운 사건들은 삶이 주는 행복이고, 이 행복은 수고스러운 삶을 살아 내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과 같은 “삯”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삶 속에서, 이 삶을 통해서만 행복과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아픔이 괴로움이 되지 않고, 괴로움이 불행이 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셨다.”

오늘 연중 제5주일은 고통과 불행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입니다. 많은 사람이 고통은 곧 불행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아갑니다. 불교는 고통과 불행은 다 자업자득 곧 자기 업보이기에 누가 어떻게 구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업보를 끊어 소멸해야 하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 업보를 쌓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하고 고집멸도의 길을 알아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조금 더 풀어 얘기하면 온갖 욕심과 집착이 고통의 원인임을 깨달아 고통에서 벗어나고 열반에 도달하는 길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불교의 이런 가르침은 자기 아닌 누구에게 고통의 탓이나 원인을 돌리거나 고통을 누구에게 의지하여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탁월합니다. 사실 고통이란 자업자득인 면이 큽니다. 고통이란 우리말로 풀이하면 괴로움과 아픔인데 아픔/통증은 아픔일 뿐 아직 괴로움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행무상하고 제법무아하며 일체개고의 이치를 인정하지 않고, ‘왜 고통이?’라고 의문을 제기하고, ‘왜 내게만 고통이?’라고 거부의식을 가지는 순간 아픔은 괴로움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니까 온갖 질병이 육체적인 아픔과 통증이라면 고통과 괴로움은 마음 곧 심리적인 통증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래서 일체유심조 곧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임을 깨닫고 그러니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도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깨달으면 아픔이 괴로움으로 발전하고 고통이 불행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가르침은 여기까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괴롭지 않고 불행하지 않는 길을 제시할 뿐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여기서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생은 무상하다는 것은 그리스도교도 가르치고 그러니 이 세상에선 영원을 찾지 말고 저세상에서 영원을 찾으라고, 이 세상과 저세상에서 모두 행복을 주실 하느님 안에서 만족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대 데레사도 이렇게 기도하지요.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리고 이 하느님은 네 고통과 행복은 네가 해결하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고통에 나 몰라라 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말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고 똑같은 고통을 당하시며, 당신 상처로 우리 상처를 낫게 하시는 분이시고,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 온갖 병고에 시달리는 이를 찾아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육신과 마음의 병만 고쳐주시는 분이 아니고,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까지 고쳐주시는 분이시며, 이 치유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구원이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치유가 목적이 아니고 언제나 구원이 목적입니다.

사실 치유가 목적이라면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치유해주셨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 친히 말씀하셨듯 나병 환자가 많았어도 나아만만 치유해주셨고, 과부가 많았어도 사렙다 마을의 과부만 구해주셨습니다. 아무튼 주님을 믿는 우리는 아픔이 괴로움이 되고 괴로움이 불행이 되는 삶을 살지 않고 오히려 괴로움을 통해 구원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여러분 가정안에 평화를 빕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삶에 의미나 목적을 꼭 찾아야만 하는가?

 

저는 한창 일할 나이입니다. 그러나 은퇴하고도 죽을 때까지 일을 할 생각입니다. 사실 아무 하는 일 없이 건강만 챙기고 놀거나 쉬며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께서 인생을 즐기다 오라고 창조하셨다고도 하고 그런 삶의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도 말합니다. 인생은 그냥 소풍이고 즐기다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잘 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은 이유 없이 태어나 우연히 죽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먼저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에 늦게서야 삶의 의미나 목적을 강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는 창조자를 배제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가 삶의 의미보다 앞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대표적인 철학자가 니체입니다. 그렇더라도 삶의 의미는 찾고 싶었습니다. 이전에 신에 의해 규정된 삶이 감옥처럼 느껴져서 탈출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목적이 없는 삶은 인생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고통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람들을 볼 때 사람들은 대부분 ‘소속감’을 위해 살고 있었습니다. 관계 맺기 위해 타인의 시선이 삶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니체는 신에게 휘둘리나 사람에게 휘둘리나 같은 것이라 여겨 고독한 초인이 되라고 권합니다. 

주체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 그것이 맞는다고 여기며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니체는 삶의 의미는 있는 게 좋지만, 결국 신은 부정하고 싶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수영 회장은 카이스트에 766억 원을 기부하였습니다.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때 나이가 87세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 기부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분이 말씀하실 때는 전혀 자신의 그러한 결정에 후회가 없어보이고 당당해 보입니다. 

이수영 회장은 기자였습니다. 1970년대에 일본산 카메라를 메고 이탈리아 소렌토 지방에 취재하러 갔을 때 일본 관광객들이 자기 앞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 회장은 본능적으로 옷으로 자기 카메라를 가렸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가 되니 우리나라 기업들의 광고판이 외국에도 붙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국력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신문사를 나와 소와 돼지를 키웠고 그 종잣돈으로 부동산에 투자하여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그러한 좋은 일을 하겠다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열심히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경희대 한의과에 1,300억을 기부한 분도 있습니다. 이란 왕실 주치의로 있었던 이영림 한의사입니다. 이분은 당시 자신을 가르쳤던 신상주 교수님과 우리나라에도 노벨상 의학상이 나올 연구소를 설립하자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의사로 버는 돈으로는 충분할 수 없었습니다. 우연히 이란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왕실 한의사가 되었으며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건설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궁즉통이라 바라는 게 있으면 길이 뚫리는 법입니다. 물론 그 돈을 기부하기 전에 신상주 교수님이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이분은 “다시 태어나도 지금처럼 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다가 새벽에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이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로 가자.”라고 하십니다. 

스스로 당신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목표지향적이십니다. 돌아가실 때도 “다 이루었다.”라고 하십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이뤄야 할 사명을 지니고 사셨습니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갇혀 살던 부족이 있었습니다. 급격한 사막화로 더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걸어서 사막을 빠져나오려 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길을 잃고 죽거나 되돌아왔습니다. 우연히 그곳을 여행하던 영국인 켄 리먼은 길을 찾지 말고 하늘의 북극성을 바라보며 갈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은 말합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한다면 원고를 다시 쓰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습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그러나 실상 삶의 의미나 목적을 찾음은 창조자를 인정하는 행위이고 찾지 않는 것은 무신론과 같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부모에게 자녀가 그렇듯이 모든 만들어진 것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창조자에 의해 의미와 목적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한 남자가 약속 장소를 향해 서둘러 운전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의 차가 거의 거북이 수준입니다. 경적을 울리고 헤드라이트를 깜빡여도 속도를 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자제력을 잃고 화를 내려는 순간, 차 뒤에 부착된 작은 스티커가 눈에 띄었습니다. 
 
‘장애인 운전자입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이 문구를 보는 순간, 마음이 차분해지고 조급함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화냈던 것이 미안했고, 그래서 오히려 그 차의 운전자를 보호해 주고 싶어졌습니다. 이제는 약속 시간에 조금 늦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이었습니다. 이 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각자 나름의 이유가 담긴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고 말입니다. 앞선 이야기의 남자도 가까이 다가선 다음에야 뒤에 붙인 스티커를 볼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다가가야 그 마음의 스티커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전에 운전 면허를 취득한 뒤, 동창 신부 차로 운전 연습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동창 신부는 운전 전에 꼭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서 무언가를 가지고 왔습니다. A4용지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글씨 ‘왕초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종이를 눈에 잘 띄는 청색 테이프로 돌려 붙였습니다. 창피하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하니, 그래야 다른 운전자들이 배려해 준다는 것입니다. 초보운전인 줄 모르고 “왜 저렇게 운전하는 거야?”라며 화를 낸다면, 그를 죄짓게 하는 것이 아닐지 싶어서 창피해도 붙이고 연습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한다고 화낼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마음의 스티커를 봐야 하고, 동시에 나의 감정 스티커를 상대에게 보이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함께 사는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를 찾아가셔서 손을 잡아 일으키니 열이 가십니다. 사위가 가족을 돌보지 않고 밖으로만 돌고 있으니, 화병이 날 만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바로 장모의 마음을 보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다른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 역시 예수님 앞으로 나옵니다. 그들 마음을 보시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즉, 병을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이렇게 전하셨습니다. 마음을 보고 함께하면서 기쁜 소식이 선포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에 기쁜 소식을 알려야 합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요. 복음 선포만이 주님의 마음을 보고 주님과 함께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와 같이 우리 역시 복음에 동참해야 합니다.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의 마음에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나는 성공하는 것보다 쓰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존 맥아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벌써 봄의 문턱에 들어서는 입춘입니다. 그래서 분주한 생명의 만삭 2월입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존재하기에 하느님의 간절한 치유를 필요로합니다. 치유하여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묻습니다. 치유를 받아야 할 우리가 있습니다. 허약한 우리 영혼을 자주 만납니다. 

우리의 삶이란 치유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여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질병과 욕망을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한 치유가 있기에 행복을 원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자신으로 살기를 바라십니다. 

삶의 질서를 깨뜨린 우리의 교만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하느님을 인정하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사람의 모든 생애를 보살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삶을 놓치고 있는 우리자신을 고쳐 주십니다. 

치유의 손길을 따라가다 보면 온전한 구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중한 한 사람을 고쳐 주시는 사랑 그 자체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치유는 예수님과의 만남이며 우리를 살게하는 복음이며 우리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하는 가장 소중한 사랑의 체험입니다. 

우리를 고쳐 주시는 주님을 맞아들이고 주님을 모시는 행복한 주일 되십시오. 치유가 필요한 우리자신을 기꺼이 주님께 내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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