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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2/05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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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이제 순결한 예물, 정결한 희생 제물인 용감한 동정녀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양을 따른다.

주님, 복된 아가타는 동정과 순교의 영광으로 교회를 빛냈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2024년 2월 5일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2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에 가득 찼던 것이다. (열왕기 상권 8장 11절)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에 가득 찼던 것이다. (열왕기 상권 8장 11절) 성경말씀카드 열왕기상권 성경말씀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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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권 8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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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열왕기 상권 8,1-7.9-13)
    계약 궤를 지성소 안에 들여다 놓았다. 구름이 주님의 집을 가득 채웠다.

  • 오늘 복음
    (마르코복음 6,53-56)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2월 5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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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네.

 

 

마르코복음
6장 53-56절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53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2월 5일 05:00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 성녀 아가타 소개 00:06

✚ 교황님 2월 기도지향 01:03

✚ 미사시작 01:18

✚ 강론시작 08:18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영원한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

 

오늘은 초대 교회의 대표적인 동정 순교자인 성녀 아가타를 기념합니다. 성녀는 시칠리아섬 출신으로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삶에 매료되었고, 열다섯 살 때 카타니아의 주교 앞에서 공적으로 동정 서원을 하였습니다.

성녀는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시절에 체포되어 지방 총독 퀸티아누스 앞으로 끌려갔는데, 이때 총독은 아가타의 아름다운 용모에 사로잡혀 성녀를 소유하려고 하였습니다.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성녀가 끝까지 이를 거절하자, 총독은 성녀를 향락에 젖게 하려고 아프로디시아라는 창녀에게 보냈습니다. 

그 방법으로도 하느님에 대한 성녀의 마음을 돌릴 수 없자, 무자비하게 고문합니다. 사지를 잡아 늘이고, 쇠로 만든 갈퀴로 몸을 찢고, 불에 지지며 마지막에는 큰 집게로 성녀의 가슴을 뜯어냈습니다. 그래서 성화에서 성녀는 두 가슴이 놓인 접시와 집게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감옥으로 보내진 성녀에게 아이 모습을 한 천사와 함께 베드로가 나타나 상처를 치료하여 주었습니다. 총독은 성녀의 상처가 다 나은 것을 보고 분노하며 그를 뜨거운 석탄불 위에서 태워 죽였다고 전합니다.

아가타가 재판 때에 축성된 동정녀임을 드러내려고 종들이 입던 흰옷을 입고 나타나자 총독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자유롭고 고귀하다면 어찌하여 종처럼 행동합니까?” 

이에 성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최고의 귀족은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성녀는 세속적으로 고귀하고 높은 지위가 보장되었지만,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자유롭고 고귀한 삶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신앙 안에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돌아보고, 성녀와 같이 영원한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얼마나 매달리는가

 

지금은 제가 블랙 리스트에 올라 중국에 갈 수 없고 그래서 이곳에 와 있는 이주민들을 위한 선교를 하지만 전에 중국 지하교회 신자들을 종종 만나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제가 아는 지하교회 신부님을 만나러 갔는데 그분이 미사 중에 공안에 끌려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베드로 사도가 붙잡혀 감옥에 갇혀있을 때 신자들이 베드로를 위해 기도한 것처럼 저도 그곳 신자들과 신부님이 풀려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한밤중에 마침내 신부님이 풀려나는 뜨거운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 지하교회 신자들은 아직도 이렇게 옛날 우리 박해시대 때처럼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신앙생활을 하기에 그들과 함께 미사 드리거나 그들에게 강론하면 통역을 두고 하는데도 그들의 뜨거운 열기가 느껴져 제가 그들에게 뭘 주는 것이 아니라 제가 너무도 귀한 것을 많이 받고 돌아옵니다. 

그날도 그들과 밤새도록 기도하고 신앙 대화를 나눈 뒤 떠나기 전에 강복을 주는데 신자들이 모두 흙바닥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꿇어서 놀랐고 모두 저의 바짓자락을 붙잡아서 더더욱 놀랐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신자 중에 이렇게 강복을 받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제가 그리 소중하지도 않고 사제를 그리 존중하지도 않잖습니까? 그리고 강복도 그야말로 흔해 빠진 강복이지 않습니까? 

이에 비해 중국의 지하교회 신자들은 제대로 신앙교육을 받지 못하고 그저 부모로부터 이어온 지식과 전통에 의지해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그렇게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강복 때 사제의 바짓자락을 붙잡는 행위도 그런 그들의 전통과 열성의 표현 중 하나이지요. 

그리고 이 전통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붙잡으려고 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한 고을을 찾아가시고, 그러면 사람들이 병자들을 주님께 데리고 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땅으로 우리를 찾아오셨고, 이 땅에 오셔서도 한곳에 편히 머물지 않으시고 계속 이 고을 저 고을로 병자들을 찾아가십니다. 

이렇게 찾아오시는 주님께 병자들도 몰려듭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산과 내를 건너서 오시는 주님 사랑에 우리가 찾아가는 것은 우리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열성입니다. 

아니, 열성 이전에 절실함입니다. ‘주님, 당신이 없으면 저는 안 됩니다.’라는 절실함입니다. 그런데 이 열성과 절실함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열성과 절실함이 우리에게 없어도 우리를 치유해주실 분이지만 우린 이 열성과 절실함이 있어야만 주님의 치유에 충실하고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인 의사에게 갈 때도 이런 충실함과 집중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당신 아니면 의사가 없냐는 태도로 가면 의사의 처방과 치료에 충실하지 않을 것이고 그럴 때 치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붙잡는 행위는 이 열성과 절실함의 표시이고,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주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병자들과 중국 지하교회 신자들을 생각하며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 당신 없으면 안 됩니다.’라고 하며 주님을 붙잡고 주님께 매달립니까?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받았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주님 안에 머무는 방법: 뜻을 따를 것인가, 도움을 청할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기만 하면 병이 낫고 구원받았다고 나옵니다. 예수님께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려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진리와 은총을 받음입니다. 

누군가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그 사람 안에 머무는 것이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 사람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가르침보다는 은총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 나무의 가지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뿐께 붙어있어야만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이와 연결하여 오늘 복음에 따르면 은총을 청함도 그분께 붙어있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일까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음이 가능할까요? 사탄이 아니라면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다 보면 그 사람의 뜻도 따르게 됩니다. 

윌 스미스가 지니 역을 맡은 2019년 실사 영화 ‘알라딘’은 일부 현대적인 업데이트를 가미한 오리지널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와 유사한 줄거리 선을 따릅니다. 

알라딘: 이 영화는 아라비아의 도시 아그라바에 살고 있는 친절하지만 한 푼도 없는 길거리 알라딘을 소개합니다. 그는 살기 위해 종종 도둑질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악하지는 않습니다. 

술탄의 딸인 자스민 공주는 궁전 밖의 삶을 경험하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그녀는 알라딘을 만나기 위해 몰래 도시로 나갑니다. 
술탄의 권력에 굶주린 대재상 자파르는 불가사의의 동굴에 숨겨진 마법의 램프를 찾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 거친 다이아몬드가 필요하며, 그것은 알라딘으로 밝혀졌습니다. 

알라딘은 자파르에게 속아 동굴에 들어가 램프를 찾습니다. 자파르는 램프만 빼앗고 알라딘을 동굴로 밀어 넣었지만, 알라딘은 램프를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알라딘이 램프를 문지르자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가 나옵니다.

알라딘은 왕자만이 자스민과 혼인할 수 있음을 알고는 지니에게 자신이 왕자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자파는 알라딘의 진짜 정체를 알아내고 램프를 훔쳐 술탄이자 가장 강력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 사용합니다. 

알라딘은 자스민, 애완 호랑이 라자, 지니의 도움을 받아 자파르와 맞서게 됩니다. 그는 자파르의 교만함을 자극하여 전능한 자가 되게 해 달라는 청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전능한 자는 지니입니다. 지니는 그를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새로운 지니로 만들어버립니다. 자파르는 램프에 갇힙니다. 

알라딘은 자신이 왕족으로 영구적으로 변신하는 대신 지니를 자유롭게 해 주려는 마지막 소원을 사용합니다. 지금까지 지니를 위해 그러한 소원을 빈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니는 램프의 저주에서 풀려 자유로운 인간이 됩니다. 그리고 술탄은 자스민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고 자스민은 알라딘을 선택합니다. 

나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는 이의 뜻을 묻지 않으면 사탄일 수밖에 없고 그 교만함 때문에 스스로 멸망하게 됩니다. 마음이 착한 사람은 자신에게 모든 것을 해주는 이의 뜻을 물어봅니다. 알라딘이 그런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주님과 머물기 위해 많은 것을 청합니다. 언제나 도움을 청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없이는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파견하실 때도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이때의 소명이 진리이고 지팡이가 은총입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통해 주님께 끊임없이 청하며 그 받는 은혜 때문에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욕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에게 머문다는 말은 그 누군가의 은총과 진리를 거부하지 않고 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부모의 가르침과 음식을 먹지만, 사춘기가 되면 이를 거부합니다. 독립하겠다는 말입니다.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것은 또한 부모의 뜻을 따라주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주님께 붙어있기 위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뜻에만 집중하기보다는 그것을 위해 매 순간 어떤 은총이 필요한지를 청하는 게 낫습니다. 그 청함을 통해 주님에게서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은총을 받은 사람들처럼.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함께하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일이 된다.

 

한 남자가 시골길을 운전하며 가던 중, 주위 풍경에 한눈을 팔다가 그만 자동차가 진흙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했지만 차 바퀴가 헛돌 뿐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처 농장에 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농부는 들판에 있는 나이 많은 노새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워릭이 차를 웅덩이에서 꺼낼 줄 수 있을 거요.” 
 
남자는 이 늙은 노새가 과연 그 무거운 차를 웅덩이에서 꺼낼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농부는 고삐를 잡고 노새를 잡아당기며 소리쳤습니다. 
 
“당겨, 프레드. 힘껏 당겨, 잭. 온 힘을 다해 당겨, 테드! 너도 힘껏 당겨, 워릭!” 
 
노새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쉽게 차를 웅덩이에서 끌어냈습니다. 남자는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에, “노새는 한 마리인데 왜 다른 이름을 불렀습니까? 이 노새의 이름이 여러 개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웃으며 말했지요. 
 
“아니요. 워릭은 늙어서 눈이 보이지 않는다오. 하지만 자신이 다른 노새들과 함께 있다고 믿으면 어떤 무거운 것도 끌 수 있소.” 
 
혼자라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함께하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일이 되곤 합니다. 함께 한다는 믿음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주님께서 믿음을 강조하셨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요?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음을 믿음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힘센 주님께 대한 믿음이 지금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해줍니다. 
 
병든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들이 혼자서 오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병이 죄의 결과라는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에 돌아다니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함께합니다. 바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은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만 대어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복음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함께했기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또 주님과 함께하려는 마음에 구원까지 받을 수 있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함께하고 있을까요? 나의 이웃들과 함께하려고 노력하며, 그들과 함께 주님을 만나려고 하고 있습니까? 
 
누구는 자기만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믿는다는 것은 그 누구와도 함께하지 못한다는 고백과 같습니다. 함께하지 않는 곳에서 과연 진정한 믿음이 나올 수 있을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인생을 두 번 사는 것이다.

- 마르티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건강한 삶의 방향은 따로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건강한 방향이십니다. 예수님을 향한 마음의 방향은 새 마음을 얻고 새 마음을 얻으면 새로워진 것들로 가득합니다. 구원을 만드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장 정직한 모습으로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아픔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습니다. 저마다에게 어떻게든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구원을 받아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은 길을 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비로소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그래서 구원의 시작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 손을 대고 예수님 안에서 손 닿는 곳마다 평범한 삶이 은총의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먹고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 마음이 가 닿는 자리에서 하느님 사랑은 시작됩니다. 생명이 존재하는 방식은 하느님 사랑과 교류하는 방식입니다. 가려져 알 수 없던 하느님 사랑을 드디어 체험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길 닿는 곳마다 반겨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가리지 않으시는 넉넉하신 사랑으로 오늘도 풍요로운 구원을 주십니다. 풍요로운 구원이 예수님께 있음을 믿습니다. 구원의 접촉점은 예수님의 인격이시기에 예수님의 인격에서 새 마음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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