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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12/15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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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주님이 영화롭게 내려오시리라.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어, 평화를 베푸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리라.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 백성이 다시 오실 외아드님을 깨어 기다리오니 구세주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저희가 등불을 밝혀 들고 깨어 있다가 그분을 맞이하게 하소서.

 

2023년 12월 15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2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요한 8,12)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요한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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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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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48,17-19)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 오늘 복음
    (마태오 11,16-19)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2월 15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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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오시니 마중 나가자. 주님은 평화의 임금이시다.

 

 

마태오복음
11장 16-19절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2월 15일 (금) 05:00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하성용 유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6:30

 

 

 

의정부 용현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2월 15일 (금) 10:00
의정부 용현동성당
이충열 티토 신부

 

📌 미사시작 14:15

📌 강론시작 20:06

 

 

 

명서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2월 15일 (금) 10:00
명서동성당 미사
구성진 율리아노 신부

 

📌 미사시작 03:37

📌 강론시작 10:59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미사

 

 

2023년 12월 15일 (금) 11:00
남양성모성지 미사
이상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미사시작 31:46

📌 강론시작 40:39

 

 

 

팔로티회 실시간 미사

 

☧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2023년 12월 15일 (금) 15:00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그분의 간절한 요청에 우리는 얼마나 성심성의껏 응답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장터의 아이들이 두 편으로 나누어 가장 놀이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놀이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 모양새입니다. 

한편에서는 놀이에 적극적인데, 다른 편에서는 반응이 영 시큰둥합니다. 전혀 맞장구를 쳐 주지 않습니다. 피리를 불며 혼례식 놀이를 유도하여도, 곡을 하며 장례식 놀이를 제안하여도, 반대편에 서 있는 아이들은 호응하여 주지 않습니다. 

놀이를 적극적으로 제안하는 이들은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입니다. 장례식 놀이를 연상하게 하는 세례자 요한의 금욕적인 모습(“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을 본 사람들은 회개로 응답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마귀 들린 사람처럼 대합니다. 

그리고 혼례식 놀이를 연상하게 하는 예수님의 비금욕적인 모습(“먹고 마시자”)은 하느님 나라 잔치에 대한 초대였으나, 사람들은 그 초대에 응답하기는커녕 사람의 아들을 방종한 사람으로 취급하여 버립니다.

하느님 편에서는 늘 최선을 다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을 비롯하여 그전에도 끊임없이 파견되었던 예언자들의 활동, 그리고 외아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기적과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 내고자 노력하시는 모습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피리를 불면 춤을 추어 주지 않을까? 혹시 곡을 하면 가슴을 쳐 주지는 않을까?’ 그들의 반응을 초조하게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간절한 요청에 얼마나 성심성의껏 응답하고 있습니까?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지는 않는지, 무관심하거나 외면하는 경우는 없는지 스스로 돌아봅시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의 부주의한 태도를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분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더 적극적으로 호응하여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의 무계획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본당에 어떤 행사를 계획하면 꼼꼼하게 챙겨야 할 것이 많아집니다. 다가오는 성탄 자정 미사를 위한 준비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전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성가는 무엇이 좋을지, 미사 후의 뒤풀이는 어떻게 할지, 그날의 봉사자는 어떤 단체가 해야 할지 등등…. 신경 쓸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매일 하는 것이 아닌 일 년에 딱 한 번 맞이하는 예수님의 기쁜 성탄이기에 특히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성탄을 기억하면서 잘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일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태 24,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체적인 계획이 하나도 없습니다. 분명히 중요한 일인데도 말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무계획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무계획은 주님을 오롯이 따르겠다는 고백을 통해, 즉 주님께 바치는 기도에 의해 채워지는 것이었습니다. 당신께 대한 믿음, 당신 뜻을 따르는 사랑 실천을 통해 하느님의 무계획이 조금씩 채워져 구원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라는 말씀만 보고서 아직도 그날이 멀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삶으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어 가는 것이기에 아직 무계획처럼 보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으로 채워지는 계획이기에 지금은 무계획처럼 보이지만, 계속 미루다가는 커다란 후회만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세대를 장터에서 노는 아이에 비유하십니다. 피리를 불면 함께 춤을 추면서 즐겨야 하고, 곡을 하면 함께 가슴을 치면서 아파해야 하는데, 지금 세대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만 현세의 행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귀를 막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자 마귀가 들렸다고 하고, 예수님께서 드시고 마시자 먹보요 술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 또 받아들이지 않으니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도 불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의 뜻에 함께하면서 하느님의 무계획을 채워야 하는데, 예수님을 오히려 반대하면서 하느님의 계획에 동참하지 못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뒤로 미루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도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 세상 것을 모두 채우고 나서야 하느님의 일을 따르겠다는 안일하고 자기 편한 마음을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크게 후회할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은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다.

- 에이브러햄 링컨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이 복음에 무감각한 이유

 

예수님은 당신과 세례자 요한에게 무관심한 이 세대를 질타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여기서 피리는 세례자 요한을 의미할 수 있고 곡을 함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춤을 춘다는 행위는 자기를 버리는 행위이고 곡을 한다는 행위는 누군가의 마음과 하나 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세상은 구원에 무관심할까요? 그분의 가르침을 따를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안 믿어야 할 ‘핑계’만 늘어납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습니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핑계 대지 않고 믿게 할 마음, 곧 “착한 뜻”을 갖게 만드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를 먼저 받아들이지 않으면 착한 뜻이 생기지 않습니다. 착한 뜻이 없으면 그 사람에게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은 가치를 잃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반면 지혜가 들어가 그 사람 안에 착한 뜻을 갖추게 하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놀라운 표징이 됩니다. 

곽상빈 변호사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좋은 스팩을 지녔다고 여겨집니다. 그는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공인회계사, 증권분석사, 감정평가사, 변호사, 손해사정사, 가맹거래사, 경영지도사, CIIA(국제공인투자분석사) 등 전문직 자격증 30여 개를 소지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150년이 걸려야 할 따낼 수 있는 자격증을 10년에 다 땄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머리가 좋았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했던 사람은 아닙니다. 고등학교도 선린인터넷고등학교란 곳을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서 다섯 가족은 거의 길거리 나앉다시피 하였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형제들마저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상황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마음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목사님이 우리 안에 주님께서 능력을 넣어주셨고 그 능력으로 이웃을 위해 무한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세상에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불만과 죽고 싶은 마음을 접고 공부해보기로 합니다. 죽기 살기로 하니 3개월 만에 열 개의 자격증을 따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광야의 삶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을까요? 바로 세례자 요한을 만난 것입니다. 그가 세례자 요한을 만난 이유는 세상에 좋은 일을 하려는 ‘착한 뜻’을 장착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세상에 좋은 일을 하게 만들기 위해 자기와 싸워 이기도록 이끄는 인물입니다. 

이것을 넘어서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힘은 ‘감사’입니다. 곽상빈 씨가 군대에 들어갔을 때 악마 같은 선임이 있었습니다. 그를 너무 견디기 어려워 그는 친구를 모아 하느님께 예배드렸습니다. 주님께 의탁하니 일이 잘 풀렸습니다. 시험을 얼마 앞두고 맹장이 터졌을 때도 주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하게 되니 이젠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 감사하여 보답하는 삶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요한을 만나는 것도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도 모두 지혜가 심어준 착한 뜻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착한 뜻이 없으면 그 착한 뜻의 열매를 맺게 하는 예언자와 주님에게 무관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에게는 이 광야가 신학교였고 세례자 요한이 ‘하.사.시’였습니다. 하.사.시를 읽은 것은 주일 학교 교사를 하는데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더 잘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신학교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려는 착한 뜻 때문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그리스도는 착한 뜻을 실천하는 방법과 힘을 주시는 분들입니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가집시다. 그러면 그분들을 순서대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의 장단에 춤추는

 

오늘 주님께서는 짧은 비유를 드시는데 당신 세대가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 같다고 하십니다. 당신 세대가 아이들처럼 미성숙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떻게 미성숙하냐 하면 자기가 반주해주는 대로 춤추지 않고 장송곡을 연주해도 같이 애도하지 않는다고 서로를 탓합니다. 

우리말로 바꾸면 나의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면서 정작 자기는 남의 장단에 춤추지 않는 완전히 자기중심의 미성숙이지요. 

그런데 이런 미성숙도 있습니다. 남의 장단에 놀아나고 아무 장단에 춤추는 미성숙입니다. 

이런 미성숙도 또 있습니다. 남의 장단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 아예 어느 장단에도 꿈쩍 않는. 이는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못하고 어느 것에도 공감하지 못하며 완전히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이고 혼자 웅크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미성숙이 있습니다. 


미성숙 1 : 
내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는 자기중심의 미성숙. 

미성숙 2 : 
아무 장단에나 놀아나는 줏대 없는 미성숙. 

미성숙 3 : 
어느 장단에도 꿈쩍 않는 경직되고 자폐적인 미성숙. 


그러므로 우리가 성숙한 사람이란 나의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지도, 남의 장단에 내가 놀아나지도 않으며, 아무 장단에나 춤추지 않지만, 어느 장단에는 춤추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성숙한 사람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출까요? 사랑의 장단에는 춤을 추고,,신앙적으로는 하느님 장단에는 춤을 춥니다. 

자기 사랑, 이웃 사랑, 하느님 사랑에 어긋나는 장단에는 놀아나지 않고, 사랑의 장단에는 어울려서 춤추고 신명 나게 춤을 춥니다. 

쓸데없는 말이나 남을 해치거나 흉보는 말은 듣지 않고, 하소연과 도움이나 동감을 얻으려는 말은 귀담아들으며, 하느님의 말씀은 경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그런데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은,요한의 말도 듣지 않고 주님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요한은 굶는다고 비난하고 주님은 먹는다고 비난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거부하면 그 사람의 어떤 말도 거부하기 마련이지요. 반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면 하느님의 계명을 들을 것이고, 그 사람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함께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이 대림 시기에 귀담아들어야겠습니다.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9장 22절)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12장 15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온전한 생각은 마땅히 행할 것을 행하게 하는 마음의 실천인 지혜로 드러납니다. 지혜는 사람을 자라게 하듯 아름다운 꽃을 더욱 아름답게 만듭니다. 삶의 본질적인 가치와 의미를 일깨워주는 지혜가 우리 곁에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지혜입니다. 지혜와 인격은 실천으로 드러나는 옳은 기쁨입니다. 늘 우리의 어리석음이 불행을 자초합니다. 어리석음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삶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어리석음을 치유하는 지혜입니다. 삶의 깊이를 더하는 지혜입니다. 지혜로 한 걸음 다가가는 대림입니다. 지혜는 삶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을 부정당한 사람들을 끌어안는 사랑이 지혜입니다. 

사랑이 옳다는 것은 그 사랑이 이룬 일로 드러납니다. 최고의 지혜이신 사랑이 우리와 함께 사랑을 시작하십니다. 사람을 기쁘게 살게하시는 지혜를 믿습니다. 지혜가 이루시는 오늘의 일입니다. 지혜와 함께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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