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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12/12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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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주님이 거룩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시리니, 그날에는 큰 빛이 비치리라.

하느님, 온 세상에 구원을 선포하셨으니 구세주의 영광스러운 성탄을 저희가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2023년 12월 12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2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이사 40,6)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이사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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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40장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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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40,1-11)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 오늘 복음
    (마태 18,12-14)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2월 12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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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보라,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리라.

 

 

마태복음
18장 12-14절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2월 12일 (화) 05:00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하성용 유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8:39

 

 

 

의정부 용현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2월 12일 (화) 10:00
의정부 용현동성당
이충열 티토 신부

 

📌 미사시작 08:38

📌 강론시작 16:33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미사

 

 

2023년 12월 12일 (화) 11:00
남양성모성지 미사

 

📌 미사시작 32:05

📌 강론시작 39:47

 

 

 

팔로티회 실시간 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2월 12일 (화) 15:00
팔로티회 홍천
장화기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2:23

📌 강론시작 16:59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2월 12일 (화) 16:00
팔로티회 분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세상의 시선이 아닌 예수님의 시선을 따라가기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여러분은 이 비유에 동의하십니까? 백 마리 양 가운데 하나가 사라졌다고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를 과연 칭찬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무책임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산에 방치될 아흔아홉 마리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안전을 위하여 한 마리쯤은 그냥 포기하여 버리는 것이 더 합리적인 판단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우리가 아흔아홉의 무리에 속한다는 안도감으로 내리는 판단일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 무리에서 벗어난 한 마리 양의 상황에 놓이더라도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그 양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호소할 것입니다. 목자가 찾아오리라는 희망의 끈을 결코 놓지 않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예수님의 시선은 아흔아홉의 무리가 아니라, 혼자 외로이 길을 헤매고 있을 한 마리 양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새끼 때부터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기르신 당신의 양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걱정에 잠 못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양을 찾아다니셔야 합니다. 여기서 남겨질 아흔아홉 마리의 안위를 논하는 것은 비유의 주된 관심사가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주님의 몫일뿐더러, 그분께서 그 한 마리를 찾겠다고 나머지를 위태롭게 방치하실 리도 없습니다. 

세상의 시선이 아닌 예수님의 시선을 따라갑시다. 그분께서 관심 있게 바라보시는 그곳을 함께 바라보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서는 일에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사람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랜 시간 계속 반복되면 변하게 됩니다. 하지만 변화를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이 변하는 일은 없다고 단정 짓기도 합니다. 
 
어떤 형제님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납니다. 직장 동료 중에 도저히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들 앞에서는 착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딴생각을 품고 힘들게 일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보는 것이 고역이었고, 사랑을 실천하자고 매일 마음 먹으면서도 점점 미워하는 자기 모습에 우울과 절망을 체험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싫은 이유를 새롭게 만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불안과 미숙함을 그 사람에게 투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반성하고 성찰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나면 먼저 이야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제는 그 사람이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그 자체에 큰 기쁨을 가질 수 있었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계속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어느 순간, 변화된 나와 다르게 보이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이야기를 하십니다. 양 백 마리중에서 한 마리가 길을 잃게 되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내가 싫어하는 사람 한 명이라고 묵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사람은 정말로 몇 명 되지 않습니다. 즉, 그 수는 늘 적은 숫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이 자기 무리에서 벗어나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잘 되었다. 그런 사람은 없어져야 해.” 
 
이것이 과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들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내가 변하고, 너가 변하고, 우리가 모두 변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얼마나 잘 맞는가 보다 다른 점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이다.

- 톨스토이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의 잊혀진 작은 성체 조각들

 

오늘 복음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모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결론으로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 우리가 어떻게 착한 목자가 될 수 있는지의 그 방법이 들어있습니다. 

우리 성당에도 많은 어르신이 교통수단이 없어 성당에 나오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분들을 일일이 찾아서 모셔 오지 못하는 것이 저에게는 마음의 큰 부담이 됩니다. 지금도 그 방법은 계속 생각하고 있지만, 그분들을 직접 찾아 나설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저의 논문지도 교수였던 조르지오 마짠티는 본당 신부이기도 하였습니다. 이태리는 한 번 본당을 맡으면 굉장히 오래 있기에 신자들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압니다. 따라서 누가 미사에 안 나오면 그분은 끝까지 찾아가셨습니다. 한 번은 지붕 위에서 작업하시는 분과 이야기하기 위해 당신도 지붕 위로 올라가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성당에 나오게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 사람을 사랑해서라기보다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양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양이 내가 사랑하는 주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성당에 나오지 않으시는 분들의 얼굴을 아직 모릅니다. 그래도 찾아가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마음 아파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그들 한 사람도 잃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이 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가시킬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밥상을 엎으면서 부모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먼저 주는 선물에 감사해야 부모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그분의 살과 피로 주시는 성체를 영하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제가 유학할 때 어떤 신부님이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구둣발로 쓱싹쓱싹 지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분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을 찾아 나설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이 바로 그 땅에 떨어진 성혈 한 방울과 같기 때문입니다. 

김창옥 강사가 요즘 알츠하이머 증상이 있어서 강의를 거의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을 살펴보니 본인 생각으로는 아버지에게 매일 가정 폭력에 시달린 어머니를 구하지 않고 외면했던 어린 시절의 죄책감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부모에게 완벽히 감사하지 못할 때 자녀에게 그 영향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그만큼 사랑받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자녀도 그 정도로 세심하게 사랑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자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아주 작은 것까지 감사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언제나 부모를 기쁘게 해 주려는 마음이 근저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나에게 해 준 모든 조각도 다 감사한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부모가 나에게 준 것을 사랑하지 않으며 부모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성체의 한 조각, 떨어지는 가루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작은 영혼들이 그분의 성체의 한 조각임을 느끼게 되고 그러면 그들을 찾아 나설 수 있게 됩니다. 감사한 만큼 보답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주는 선물인 성체와 성혈의 조각들을 사랑하지 못하면 주인의 마음에 무감각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저는 백포도주보다 붉은 포도주를 미사에 사용합니다. 한 방울도 씻겨나가지 않도록 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노력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사랑으로 성장하기를 청해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도 길잃은 양

 

“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오늘도 역시 대림 시기에 왜 이 복음을 읽는지 생각해 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복음을 대림 시기와 연결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거지요.

제 생각에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처럼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고,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뜻에서 읽는 거겠지요. 그래서 오늘의 전례는 독서로 다음의 이사야서를 읽습니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루카 복음에서는 한 마리 양이 <잃은 양>인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오 복음에서는 <길 잃은 양>입니다.

작은 차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차이가 크다면 크다고 할 수 있지요. 왜냐면 <잃은 양>은 목자가 잃은 것이고, <길 잃은 양>은 양이 실수로 또는 일부러 길을 이탈한 것이니까요.

아무튼 오늘 마태오 복음에서는 <길 잃은 양>입니다. 그러니까 양이 실수로 또는 일부러 목자를 따라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길 잃은 양입니까, 아닙니까? 길을 잃곤 한다면 어째서 길을 잃습니까? 실수로 길을 잃습니까, 일부러 길을 이탈합니까?

우리 신자들의 경우 점쟁이한테 가는 신자가 적지 않습니다. 점쟁이한테 가지는 않아도 유혹을 느끼는 분은 더 많겠지요. 이런 경우 우리는 길을 잃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복음의 가르침 따르지 않고 정치가의 선동에 따라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얘기해주면 그분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제시하는 교회를 오히려 정치적이라고 비난합니다.

돈이나 권력을 쫓는 분들도 있는데 이분들도 길 잃은 양들이지요. 이런 분들은 돈이나 권력을 쫓다가 주님의 길을 잃는 것은 물론 요즘 잘 볼 수 있듯이 패가망신하기까지 하지요.

그런데 제 생각에 지금 저의 글을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는 제가 앞에서 열거한 그런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꽤 있을 겁니다.

집안에 시련이나 우환과 같은 큰일이 닥치면 하느님께서 계시는 건지, 나와 함께 계시기는 하는 건지, 나의 고통을 알아주시고 나의 말을 듣고 계시기는 하는 건지, 이런 의심을 하게 되고 우리는 신앙적인 방황을 하게 되지요.

현세의 고통 때문에 하느님을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고, 믿음이 굳건치 못한 분들은 결국 하느님을 떠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길 잃은 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의의 길을 가지 않고 사랑의 길을 가지 않는 사람도 사실은 길 잃은 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길 잃은 한 마리 양>이 아닌 사람이 사실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길 잃은 한 마리 양>이었거나 현재 <길 잃은 한 마리 양>이거나 미래에 <길 잃은 한 마리 양>일 것입니다.

그러니 목자인 주님께서는 한 마리가 아니라 모두를 찾아 나서시는 것이고 아흔아홉을 버려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시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찾아 나서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김 양을, 다음은 정 양을, 그다음은 박 양을 찾아 나서는 거겠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잃어버림도 떠나버림도 주님께 나눌 수 있는 나눔의 행복이 됩니다. 길 잃은 양 한마리를 되찾는 기쁨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며 기쁨으로 우리를 다시 살게하십니다.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이 되어봅니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끼는 것은 우리가 길을 잃었기에 만나게되는 새로운 체험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위해 내딛는 한 걸음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렇듯 신앙은 익숙한 방식이 아닌 때로는 낯선 방식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는 익숙함에 많이 갇혀있습니다. 익숙함에서 벗어나 우리의 신앙이 깨어나는 유일한 길은 주님과 함께 기쁨을 되찾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쁨을 되찾는 것은 새롭게 보는 감사에 있습니다. 

새롭게 보는 은총의 대림시기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 마음을 돌이켜 보는 시간입니다. 소중한 만남처럼 기쁘고 행복한 만남은 없습니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걸음을 멈추고 제 자신에게 묻습니다. 습관적인 신앙이 아닌 작지만 믿는 것을 실행으로 만드는 순간이 예수님을 만나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삶의 여유를 갖고 하느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기쁨의 길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내면의 기쁨을 나누는 오늘입니다. 감사의 길을 만나는 아버지의 뜻인 감사와 기쁨의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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