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시온 백성아. 주님이 민족들을 구원하러 오신다. 주님의 우렁찬 목소리를 듣고, 너희 마음은 기쁨에 넘치리라.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가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고 기꺼이 성자를 맞이하여 천상의 지혜로 성자와 하나 되게 하소서.
2023년 12월 10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2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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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 베드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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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2서 3장 13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40,1-5.9-11)
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아라. - 제2독서
(베드로2서 3,8-14)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오늘 복음
(마르코 1,1-8)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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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마르코복음
1장 1-8절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1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2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3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5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6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7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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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이사야 예언자는 일찍이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여기서 ‘주님의 길’은 하느님께서 걸어가실 길, 곧 유배의 속박에서 당신 백성을 이끌고 그들과 함께 광야를 지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새로운 파스카’의 길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걸어가실 구원의 길을 미리 준비하라는 외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는 이 예언의 말씀을 자신의 복음서 시작 부분에 인용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그런데 여기서 ‘주님의 길’은 문맥상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로 이해됩니다. 복음서 시작부터 예수님께서 주님으로 불리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드러내면서 또한 그분께서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계심을 암시합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파스카, 곧 구원의 길은 결국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길로 실현되며, 그 길은 역설적으로 수난과 죽음의 길로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를 통하여 마침내 실현됩니다. 그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고, 그 외침을 들은 많은 이가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광야에 있던 외침은 세례자 요한의 시대를 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다다릅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그 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 주변에서 늘 울려 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소리에 제대로 반응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을 맞이할 준비에 적극적입니까? 대림 제2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의 길을 마련하며 그 길을 곧게 내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미국 레이더 기자에서 근무하는 어느 장교가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근사한 파티가 있다고 해서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요. 그런데 한 사병이 레이더 스크린을 가리키면서, 그 안에 까만 점들이 가득 채우고 있음을 보고했습니다. 적 비행기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많은 숫자였습니다. 더군다나 미국을 상태로 이렇게 적 비행기를 보낼 나라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이렇게 단정 지어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저것은 우리 비행기이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 비행기 353대가 진주만으로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고, 이렇게 레이더 기지에서는 1시간 전에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곧바로 응전했으면 피해를 줄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장교의 안일한 생각에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자그마치 미군 3,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177대의 항공기가 파괴되었습니다.
“깨어 있어라.”(마르 13,35)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바라보게 됩니다. 혹시 우리 역시 그 장교처럼 순간에 누릴 쾌락만 생각하면서 안일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과연 지금의 모습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일까요?
안일한 마음을 벗어버리고, 주님을 바라보는 데 더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 뜻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만납니다. 그는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지요. 그가 이렇게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 실제로 세례를 베풀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우리가 모두 철저히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역시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떠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더 편하고 쉬운 삶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겸손을 갖추어 더 열심히 살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고 살았다고 전합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위해, 그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엘리야 예언자처럼 옷을 입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엘리야처럼 마지막 날을 준비하려고 순수한 음식인 메뚜기와 들 꿀을 먹었던 것입니다. 바로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듯,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아라.”라고 명령합니다. 진정한 회개와 함께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면서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생활을 통해서만 주님께 더 집중할 수 있으며, 주님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화가 날 때는 10까지 세어라. 화가 너무 많이 날 때는 100까지 세어라.
- 토머스 제퍼슨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리스도인이 친구를 손절해도 될까?
대림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라고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이때 틀림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죄의 용서는 회개의 세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세례로 성취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의 세례를 준비하는 세례가 요한의 세례입니다.
요한의 세례를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는 방향을 트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선물을 주고 계시는데 받지 않고 반대쪽을 보고 있는 이들의 시선을 그분께로 돌리는 일이 회개입니다. 회개가 없이는 그래서 죄의 용서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옥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은 이에게 당신 선물을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땅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끝까지 자신을 잡아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신앙을 이용해 심리적으로 지배하려는 시도입니다. 오히려 손절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참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유튜브 채널 ‘포크포크’에 ‘전 세계 화제가 된 어미 리트리버의 훈육’이란 제목의 동영상이 있습니다. 리트리버 어미는 8주 된 여덟 마리의 새끼들이 젖을 먹겠다고 달려들자 갑자기 짖으며 새끼들을 떼어놓습니다. 새끼들은 처음 보는 어미의 반응에 어리둥절 쥐 죽은 듯이 뒤로 물러납니다.
어미는 차분해진 새끼들을 핥아주며 위로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때가 되면 놓아주어야 하는 ‘단호함’과 그러면서도 새끼를 사랑하는 ‘다정함’이 공존하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훈육법을 배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단호하고 언제 다정해야 할까요?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간다면 단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항상 다정해야 합니다. 대신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면 단호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자신도 망치고 자녀도 망칩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에서 갓 대학을 졸업한 앤디는 권위 있는 패션 잡지 ‘런웨이’의 강력하고 까다로운 편집장인 미란다 프리스틀리의 보조 비서로 취직합니다. 미란다의 정식 비서는 에밀리입니다. 그녀는 촌스러운 앤디를 비웃습니다. 앤디는 다소 순진하고 수수한 옷차림을 한 젊은 여성이며 고급 패션 세계에는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는 저널리즘 산업에서 그녀에게 문을 열어줄 것이라고 믿기에 미란다 프리스틀리 밑에서 자기 실력을 증명하려 합니다.
처음에 앤디는 까다롭고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 그리고 불가능해 보이는 미란다의 작업과 기대로 인해 어려움을 겪습니다. 오기가 생긴 앤디는 자신의 역할에 적응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더욱 멋지게 옷을 입고 모든 노력을 다한 끝에 미란다의 인정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기 상사인 에밀리를 밟고 오르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심지어 애인과도 헤어지고 친구들과 가족도 변한 그녀의 모습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영화의 결말쯤, 앤디는 미란다가 자기 지위를 지키기 위해 가장 가까운 동료인 나이젤을 희생시키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나 미란다는 앤디도 에밀리를 밟고 오르는 모습이 자신을 닮았다고 말합니다. 앤디는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란다는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모두가 우리처럼 되길 원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애디는 미란다와 ‘런웨이’의 세계를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납니다. 그러자 남자친구와 친구들, 가족들과의 관계가 다시 정상화됩니다.
물론 선교하려면 죄인들에게 가까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행복 기준을 바꾸지 않는다면 떠나야 합니다. 낭떠러지로 가는 노새의 끈을 끝까지 잡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타인을 위해 나의 영혼을 희생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나의 영혼도 귀합니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가 돈이나 명예, 쾌락이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임을 느끼며 참사랑으로 살기를 원할 때 머무르면 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나부터 죄의 본성인 탐욕과 육욕, 그리고 지배욕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를 손절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나도 그 행복을 바라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와와 손절하지 못해 결국 그의 지옥에 빠졌습니다. 자신도 세속-육신-마귀를 이기는 연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단식하며 광야에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례자 요한의 초대에 응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정함과 단호함을 동시에 지니고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신망애 삼덕의 길
오늘 대림 제2주일은 오실 주님을 위해 주님의 길을 닦으라는 주일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그런데 정확히 얘기하면 주님의 길을 닦을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실 나의 길을 닦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의 길이라면 주님이 닦아야지 우리가 어떻게 닦겠습니까? 주님도 당신이 길이라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길이요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 길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사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길을 우리가 닦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길은 주님께서 몸소 닦고 오시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오신 주님께서 나에게 오실 길만 닦으면 됩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그 길을 어떻게 닦느냐인데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데 방해되는 것들, 곧 방해물인 죄들을 치우는 것이고 회개하는 겁니다.
그것을 저는 올해 신망애 삼덕의 관점에서 봤습니다. 신망애 삼덕을 일컬어 향주삼덕(向主三德)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께 향하는 또는 주님을 향하여 가게 하는 세 가지 덕이라는 뜻이지요.
우리에게 이 향주삼덕만 있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침없이 오실 텐데 이것이 없으니 주님께서 우리 문 앞까지 오셔서는 들어오지 못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침없이 오시도록 우리는 첫째로 믿음을 지녀야 하고 반대로 불신과 의심을 우리 안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불신이나 의심이 제게는 교만과 무관심과 즉시 연결됩니다. 교만은 주님이 오시건 말건 무관심하게 하고 무시하게 하며, 그래서 실천적 무신론 또는 불신론에 빠지게 하지요.
그러니까 주님이 오셨어도 오시건 말건, 주님이 내 옆에 계시건 말건, 내 안에까지 들어 오시지 못하여 주님께서 내 안에는 아니 계시고 그래서 주님과 상관없이 내 뜻대로 내 좋을 대로 사는 상태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도록 주님께 희망을 걸고 반대로 다른 것에는 희망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야 하는데 아직 세상에 희망이 있고,세상에 희망을 두는 사람은 주님께 희망을 두기 어렵겠지요. 그래서 세상에 희망을 두다가 실망하고 절망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스러질 때가 새로운 희망을 둘 때임을 알아채고 롯의 아내처럼 스러질 것에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것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희망을 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것이 스러질 터인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희망의 또 다른 측면이 갈망입니다. 희망이 원하는 것의 성취 차원이라면 갈망은 원하는 사랑의 성취 차원입니다.
희망이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라면 갈망은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인간적인 사랑으로 대충 대리 만족하기에 하느님 사랑이 없어도 고갈을 느끼지 못하고 갈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희망의 반대가 절망이라면 갈망의 반대는 욕망이며 이 욕망을 몰아내고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닦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우리의 허물을 고쳐 나가는 것이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존중어린 삶이 됩니다. 존중이 사라지면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평화도 사라집니다. 존중은 인격적 관계를 맺는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것은 존중입니다.
존중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회개의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회개와 실천은 먼저 하느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집중은 우리 마음에 하느님을 품고 사는 삶입니다. 하느님을 품고 사는 삶이란 우리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존중의 삶입니다.
존중의 삶은 관심의 삶으로 주님의 길을 환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삶을 치유하는 것은 존중입니다. 무시하고 깔보는 교만이 아닌 겸손을 통한 내적수용입니다. 존중을 부정하면 하느님까지 부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랑의 길은 존중으로 환하게 열립니다. 인권과 사회 교리는 이와 같이 존중으로 완성됩니다. 우리 모두를 살리는 것은 존중입니다. 제 자신과 이웃, 하느님을 존중하지 못한 지난 시간을 진실로 회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삶으로 삶을 치유하시고 당신의 길로 우리의 길을 치유하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존중으로 우리의 길을 되찾아 길을 곧게 내는 존엄한 인권 주일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참된 존중이 참된 복음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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