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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12/11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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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들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땅끝까지 전하여라. 보라, 우리 구세주 오시리니, 이제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귀여겨들으시고 성자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는 위대한 신비를 저희가 깨끗하고 정성된 마음으로 경축하게 하소서.

 

2023년 12월 11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2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앞장서 가시니 바보들도 길을 잃지 않으리라. (이사 35,8)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앞장서 가시니 바보들도 길을 잃지 않으리라. (이사 35,8) 성경말씀카드 이사야서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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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35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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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35,1-10)
    하느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 오늘 복음
    (루카 5,17-26)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2월 11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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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보라, 세상의 주인이신 임금님이 오시어 사로잡힌 우리의 멍에를 몸소 벗겨 주시리라.

 

 

루카복음
5장 17-26절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17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18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19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20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1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2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23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24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25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26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2월 11일 (월) 05:00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나충열 요셉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23

 

 

 

의정부 용현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2월 11일 (월) 10:00
의정부 용현동성당
김유철 요한 보스코 신부

 

📌 미사시작 12:07

📌 강론시작 19:41

 

 

 

팔로티회 실시간 미사

 

 

2023년 12월 11일 (월) 15:00
팔로티회 홍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0:00

📌 강론시작 08:1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공감할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까?

 

기적 이야기에서 설화적 긴장은, 보통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가 예수님께 다가와 치유를 청할 때 생깁니다. 질병이 이야기 안에서 해결되어야 할 어려움인 셈입니다. 

독자들은 ‘예수님께서 과연 그 환자의 병을 고쳐 주실 것인가?’ 또는 ‘예수님께서 그 병을 고쳐 주실 능력을 지니고 계시는가?’ 하는 긴장 속에서 이어지는 장면을 기대하며 지켜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기적 이야기에서는 질병 말고도 해결되어야 할 과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는데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건의 정황상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십니다. 그분을 보려고 군중이 몰려들어 집 안팎에는 빈자리가 없을 만큼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군중은 마치 중풍 병자와 예수님 사이를 갈라놓는 커다란 장벽처럼 보입니다.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병자는 치유될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 것입니다. 중풍 병자를 데려온 이들은 이러한 난관에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묘안을 생각해 내어 그가 장벽을 넘어설 수 있도록 끝까지 애써 줍니다.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겠다는 그들의 강한 의지에 참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중풍 병자의 딱한 사정을 마치 자기 일처럼 여길 줄 아는 뛰어난 공감 능력을 지녔습니다. 

남의 집 지붕에 올라가 함부로 기와를 벗겨 내는 일이 오지랖 넓은 행동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한 이들, 그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 준 사람들은 그런 곱지 않은 시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 병자에게 구원을 안겨 주실 분을 만나게 하여 줄 수 있다면 말입니다. 

자기 일만 생각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요즘 시대에, 우리는 이웃의 어려움에 공감할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까? 부족하다고 여겨지면 그러한 능력을 키워 나갑시다. 이웃 사랑의 실천은 공감하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거목이 되는 길

 

‘장자’에 유명한 거목 이야기가 나옵니다. 쓸모 있는 나무는 베여서 대들보나 서까래로 사용되지만, 쓸모없는 나무는 베이지 않고 거목으로 자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실패했거나 낙오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삶을 새롭게 긍정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형제님이 있습니다. 공부도 잘했고, 운동이나 기타 예능 쪽에서도 남들과 달랐습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좋은 직장에 취업해서 그곳에서도 그의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능력 많은 그에게는 너무 많은 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말도 쉬지 못하고 일해야 했습니다. 건강은 점점 나빠졌고, 어느 순간 공황 장애가 찾아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재능으로 좋은 직장, 안정된 부를 누릴 수 있었지만, 건강을 잃고 나서는 그 모두가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반드시 능력과 재능이 많아야 좋을까요? 또 부와 세상의 지위를 누릴 수 있다면 행복할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스스로 거목이 될 수 있는 삶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사랑 타령이었습니다. 돈 버는 법, 높은 지위를 얻는 방법, 그리고 병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이야기해 주셨다면 지금의 교회를 크게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은 전혀 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만 말씀하십니다. 사랑으로 스스로 성장시켜 큰 거목이 되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신체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체적인 고통 자체는 도덕적 악의 상징이고, 악에 그 이유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럴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존재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때, 사람들 사이로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지붕의 기와를 벗겨 내고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냅니다. 당시의 사람들 시선은 마치 죄인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에 맞춰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루카 5,20) 
 
우리 모두 주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죄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그 용서를 받는 영광을 얻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살 수 있도록 건강까지도 부수적으로 받습니다. 만약 그가 중풍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의 친구들이 지붕의 기와를 벗겨 내고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내지 않았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거목이 되는 길을 다시금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뿐이었습니다. 진짜 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하나의 모범은 천 마디의 논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다.

- 토마스 칼라일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는 세상에서 신비로운 존재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한 중풍 병자를 고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중략)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은총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주는 것을 ‘성사’(sacramentum)라고 합니다. 성사 중의 성사는 성체성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신성을 눈에 보이는 밀떡 형상으로 내주시는 것이 성체성사입니다. 이런 것들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신비’롭게 보입니다. 

세상이 밀떡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믿으며 우리가 2천 년 동안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사는 다 ‘신비’(mysterion)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신비로운 광경을 보고 교회 안에 죄의 용서가 이루어진다는 것까지 믿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도 다 성사이고 신비롭게 보여야 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것을 보여주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신비롭게 보이려면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예상을 뛰어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그 기적의 신비를 보고 믿음을 얻어 죄를 용서받습니다. 

아르헨티나 사람인 라울 소사(Raoul Sosa)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 신동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5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뛰어난 음악성을 보였던 10대 초반에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들과 다양한 실내악곡들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스무 살 때 그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그리고 지휘자로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청천벽력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1979년 불의의 사고로 오른손 셋째와 넷째 손가락이 마비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유명한 라울 소사가 이제 피아노 인생은 끝이 날 것이라 믿었습니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이 언제나 그러하였던 것처럼 라울 소사도 절망을 딛고 더 큰 거목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왼손 하나로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피아노를 치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손가락을 놀리는 날렵한 핑거링(fingering)은 청중들을 압도하며 큰 감동을 보여주었습니다. 한 손 피아노에 압도된 청중들은 그를 ‘기적의 피아니스트’라 부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참 신기하다!’라는 인상을 줍니다. 이런 인상을 주려면 반드시 그 사람 안에 ‘믿음’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 믿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네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이희아 씨가 있습니다. 의사의 유산권고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우갑선(50) 씨의 강력한 출산 의지로 태어난 아기가 ‘희아’ 씨입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10살에 세상을 떠난 성녀 히야친타의 세례명을 따 ‘희아’란 이름을 주었고 ‘세상의 기쁨의 싹’이 되라는 의미도 함께 주었습니다. 희아는 말합니다. 

‘나는 손가락을 두 개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 내 손을 생각해 보면 아주 귀한 보물의 손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희아 씨가 피아노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전에 하루 10시간이 넘는 맹훈련이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초등학교 6학년, 그렇게 고된 훈련에 작은 몸은 서서히 지쳐갔습니다. 어느 날부턴가 피아노를 보기만 해도 경기를 하고, 피아노 선생님을 보면 숨어버리는 등 ‘피아노 거부반응’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피아노를 그만두겠다고 했고 어머니도 자신의 욕심을 접으려고 했습니다.

기적은 병상에서 일어났습니다. 1979년 불의의 사고로 오른손가락이 마비되는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 피아니스트, 장애를 뛰어넘는 열정으로 지휘와 작곡을 비롯해 왼손만을 위한 작품을 작곡한 것뿐만 아니라 한 손만으로 연주하는 놀라운 기교를 개발해 청중을 압도하는 감동을 보여준 ‘기적의 왼손 피아니스트’ 라울 소사를 만난 것입니다. 

자신과 비슷한 장애가 있는, 어쩌면 자신보다 피아니스트로서 더 큰 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와의 짧은 만남이 그를 다시 피아노 앞으로 이끌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5년 동안 자신을 힘들게 했던 ‘즉흥 환상곡’을 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대표곡으로 전 세계 수많은 사람에게 터질 듯한 감동과 용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IMF 사태에 빠졌을 때 전 국민이 금붙이를 모아서 전례가 없이 빨리 그 위기를 극복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런 일이 신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단일민족이라는 자부심이 강합니다. 그래서 뭉치면 못 할 게 없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기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태석 신부나 마더 데레사 성녀처럼 믿음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도 교회 안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있음을 믿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성령 한 분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치유와 구원까지 이르는 관상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다가 느닷없이 ‘관상’이라는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관상 타령을 할까 합니다. 

관상은 하느님 관상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하느님뿐 아니라 나도 보고, 이웃도 보고, 다른 자연도 보는 것이라고 저는 자주 그리고 기회가 될 때마다 주장합니다. 

나를 보더라도 나의 고통을, 욕망을, 갈망을, 보고, 나의 고통을 보면서도 고통만 보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도 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도 보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보고, 나의 고통만 보지 않고 이웃의 고통까지 사랑으로 보는 것, 뭐 이런 것이, 관상이고 진정한 관상이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나의 고통만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고, 두려움으로 보는 것도 관상이 아니고, 사랑으로 보는 것이 관상이라고도 얘기합니다. 

나의 고통만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라 고통에 나의 시선을 빼앗긴 것이고, 두려움으로 보는 것도 실은 관상이 아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관상도 하느님을 보는 것이지만 하느님만 보고 다른 것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사로잡힘이지 진정한 관상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얼마 동안 완전히 하느님께 몰입되고 성인들이 탈혼 상태에 있듯이 하느님께 사로잡힐 수는 있어도 계속 그런 상태에 있다면, 그런 관상을 진정한 관상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하느님 관상은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보는 것이라고 제가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오늘 관상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한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 이사야서의 다음 말씀 때문입니다. 

Say to those whose hearts are frightened: Be strong, fear not! Here is your God.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러므로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을 보면/관상하면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는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중풍 병자와 동료들은 바로 이렇게 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어느 마음에 들어오셨을 때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은 주님께서 어쩌시나 보려고 왔지만, 이들은 치유를 받기 위해 옵니다. 

중풍 병에 맥없이 주저앉아있지 않고 어떻게서든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왜? 물론 치유 받기 위해서지만 그 이전에 주님의 능력을 보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때 이들이 본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보고, 그런 주님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치유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관상이 치유와 구원까지 이르는 것을 본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믿음이 가고자 하는 길은 내어맡기는 겸손의 길입니다. 올바른 믿음은 인격으로 드러납니다. 자신과 주위를 할퀴고 무는 인격체는 결코 올바른 인격체가 아닐 것입니다. 믿음의 자세는 그야말로 겸허함이어야 합니다. 백인 대장의 믿음은 실속없고 헛된 자기과시의 태도가 아닌 바로 겸허함 그 자체인 것입니다. 

믿음의 삶에서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의 길을 만납니다. 성탄을 준비하며 믿음의 본질인 겸허함에서 빗나갔던 지난 시간들을 반성합니다. 부작용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망치는 불량품같은 요소들을 제거합니다. 모든 악조건들을 극복하며 발전하여 나가는 모습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건강한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어려운 문제들을 지혜롭게 잘 해결하는 것은 하느님께 내어맡기는 기도와 내어드리는 겸허함에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찾아가는 길은 세상의 유행에 역행하는 길입니다. 자아도취와 자기과시가 아닌 겸손한 믿음이 순리입니다. 

자기교만으로 신앙의 순리에 역행하지 않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자기중심적 자기견해를 안 붙이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좋은 날입니다. 본연의 자세 본연의 자리 겸허함에서 이루어지는 성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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