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지 않으리라.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게서는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에서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노라.
하느님, 복된 요한 사제에게 온전히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열렬히 사랑하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를 본받아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을 뵈옵게 하소서.
2023년 12월 14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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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시편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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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5장 9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41,13-20)
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너의 구원자이다. - 오늘 복음
(마태오 11,11-15)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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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하여라.
마태오복음
11장 11-15절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13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14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15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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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4일 (목)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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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충열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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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늘 우리 손을 붙잡아 주시는 주님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일부 사람들은 상대를 비하하거나 업신여길 때, 벌레 같다거나 벌레만도 못하다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이런 심한 표현이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니 조금은 당황스럽습니다. 당신께서 몸소 선택하신 백성인데도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하여 봅니다.
어제 독서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이런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여기서 말하는 ‘길’과 ‘권리’는 이스라엘의 생각과 기대로 가득 찬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외세의 침략과 유배 생활에서 겪었듯이 그들의 예상과 바람대로 이루어진 것이 없게 되자, 자기들이 걷고 싶은 길과 누리고 싶은 권리를 하느님께서 철저히 외면하셨다며 불평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그들과 논쟁하듯 당신 자신을 항변하십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의 모든 계획을 꿰뚫어 보고 있으며, 일이 그 계획대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여기지만, 하느님 백성의 길과 권리를 결정하는 이는 그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당신이심을 일깨우십니다(어제 제1독서 참조).
주님께서는 ‘벌레’와 같은 당신 백성의 처지를 제대로 보게 하시지만, 또한 그 처량한 사정에 놓인 그들을 몸소 도우시겠다는 약속도 함께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이는 하느님의 교육법이기도 합니다. 강한 어조의 훈계로 그들의 처지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하시며, 그렇게 당신께 온전히 의존하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알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하였듯이, 우리도 예상에서 벗어난 길을 걸을 때가 있습니다. 시련 속에서 ‘과연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하고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가련한 처지를 잘 아시고 늘 우리 손을 붙잡아 주심을 기억하여야겠습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식과 신앙은 비례하지 않는다.
미국에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서와 신학을 두루 섭렵한 석학이었고, 그래서 하느님에 관한 강의를 많이 했으며 신학교에서도 강의 활동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스스로 하느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풍부한 지식을 갖춘 신학자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이제 사제로서의 직분을 떠나겠다는 충격적인 말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지요.
“나는 하느님의 지식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뒤진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신앙은 하느님이란 말밖에 모르는 어떤 할머니보다도 못했습니다.”
지식과 신앙은 비례하지 않습니다. 물론 지식을 통해 신앙의 이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머릿속만 채우는 하느님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마음 안에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들이 존경하는 신부들을 바라봅니다. 많은 신학적 지식을 갖춘 신부보다 사랑의 마음을 갖춘 신부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능력 있고 재주 많은 신부보다 기도와 묵상을 열심히 하며 신앙적 열심을 보여주는 사랑 있는 신부를 원합니다. 그런데도 과연 사랑에 집중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합니다.
중요하다고 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삶을 우리는 살고 있을까요? 지식을 채우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대한 뜨거운 마음을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이러한 우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하느님에 대해 충만한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로 당시의 종교지도자인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등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지식만 있을 뿐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지식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광야에 나가서 오실 주님을 준비하기 위해 낙타털 옷과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면서 회개의 세례를 베풉니다. 충분히 사람들 위에 설 수도 있었겠지만,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께 대한 참 신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에 반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늘 나라를 폭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삶을 살면서도 마치 그 삶이 하느님의 뜻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까지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폭행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요? 주님께 대한 신앙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무엇인가를 해라. 잘 되지 않으면 다른 무언가를 해라.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없다.
- 짐 하이타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을 믿어도 지옥에 떨어질 수 있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를 폭행하는 것을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죄라고 해서 독성죄라고 합니다.
독성죄는 세례자 요한을 거치지 않고 하느님의 것을 취하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것이 피조물인 인간에게까지 폭력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수 있을까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있을법한 한 부부의 이이기입니다. 어떤 남자는 직장 일을 열심히 하며 아내를 굳게 믿는 순정파 남편입니다. 둘에게는 아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보다 능력이 없는 남편을 무시하며 남편을 만나기 전 남자와 다시 만나는 아내가 있습니다. 길면 꼬리가 밟히는 법. 남자는 조금씩 아내의 불륜 사실을 눈치챕니다.
하지만 남편은 다시 아내가 뉘우치고 돌아왔을 때 어색하지 않도록 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점점 더 대범해져서 남편이 잠깐 집을 비워도 남자를 들입니다. 급기야 그 남자를 만나기 위해 아기의 분유에 수면제까지 탑니다. 이런 아내와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남자를 보며 남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더는 아내가 아기에게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할 것이란 판단이 들면 아내를 떠나고 어쩌면 둘에게 복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내를 떠나야 하는 남편도 슬프겠지만, 더 고통스러운 복수는 불륜을 저지른 둘의 몫이 될 것입니다.
부부는 일단 혼인했다면 어쩔 수 없이 상대에게 모든 것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결혼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결하지 못한 배우자와 혼인했다면 아무리 그녀와 헤어져 살 능력이 되더라도 한 번은 물려야 합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한순간에 모든 인간을 먼지로 만들어버릴 수 있으셔도 그분은 사랑이시기에 한 번은 폭행당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독성죄까지 일어날 수 있도록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설 마음이 없는 인간이라면 결국 어떻게 할까요? 관계를 끊어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엘 5장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이 아들 벨사차르 왕은 큰 잔치를 벌이고 그와 그의 손님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신성한 그릇으로 포도주를 마십니다. 잔치 도중 신비한 손이 나타나 벽에 메시지를 씁니다.
벨사차르는 매우 놀라 그 글을 해석해 달라고 박사들과 마술사들을 불러왔지만, 그들은 글을 해석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 다음 왕비의 제안으로 다니엘을 데려옵니다. 지혜와 꿈과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능력으로 유명한 다니엘은 글을 읽고 해석합니다.
다니엘은 ‘므네 므네 트켈’, 그리고 ‘파르신’이라는 메시지를 해석하여 하느님께서 벨사차르의 통치를 심판하시어 그의 나라를 메디아 인들과 페르시아 인들에게 주시겠다는 뜻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날 밤 벨사차르는 살해됩니다. 이 글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므네’는 하느님께서 임금님 나라의 날수를 헤아리시어 이 나라를 끝내셨다는 뜻입니다. ‘트켈’은 임금님을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프레스’는 임금님의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다니 5,25-28)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것이 되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분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지. 여기서 세례자 요한이 필요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내가 죽고 내가 그분의 것이 되어 그분께 이용당하는 것이 내가 살아서 그분을 나의 금송아지로 이용하는 것보다 더 행복함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인물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예수님은 처음에 그들에게 폭행당하십니다. 그러니 먼저 회개합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파라오가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파라오로부터 이스라엘을 탈출시키기 위해 이집트로 들어갔습니다. 이때가 세례자 요한의 역할입니다. 홍해를 건넌 뒤로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목자, 곧 메시아의 역할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파라오를 부정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파라오는 ‘나는 나다’라고 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지금까지 그와 대치되는 ‘나’의 상징입니다. 창세기 에덴동산의 뱀과 같습니다. 뱀을 긍정하면서 하느님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독성죄가 벌어집니다. 하느님을 폭력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선악과를 바치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자아가 강하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독성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억지로라도 감사의 봉헌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정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감사하게 봉헌하는 이들은 결코 성체를 영하며 독성죄에 빠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체를 영해도 구원될 수 없는 이유는 그 사람이 세례자 요한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진정 큰 사람은?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기에 요한이 큰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이 큰 사람인가요?
제 생각에 목전의 이익만을 보는 사람은 큰 사람이 아닙니다. 비난을 들을 수 없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안 될 때 조급해하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고통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질 줄 모르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묵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과 요한의 관계를 보며 남을 작게 만드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요한은 주님을 신발 끈을 풀어드릴 수조차 없는 큰 분으로 받들고 그런 요한을 주님은 사람 중의 큰 사람이라고 치켜세우십니다.
소인배는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도토리 키 재기 하며 서로를 깎아내리고 남을 작게 만들며 자기가 커지려 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작게 만드는 사람은 큰 사람이 아니고 낮출 줄 모르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요한의 관계를 보면 이런 것을 또 볼 수 있습니다. 인물이 인물을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큰 사람이 큰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이지요.
요한은 주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즉시 그분이 오시기로 된 분임을 알아봅니다. 하늘에서 땅만큼 낮추어 오신 크신 분을 땅에서 하늘 님으로 알아보는 요한은 진정 큰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만남이 하늘 나라의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만남이 아름다운 하늘 나라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까? 사람이 기쁨이고 기쁨이 사람입니다. 이렇듯 인물이 인물을 키웁니다.
먼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더 큰 사람이며 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사람을 잃으면 길도 잃게 됩니다. 사람이 곧 길입니다. 사람다운 사람 세례자 요한은 사람이 되는 길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위해 자신의 삶으로 길을 마련합니다. 그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의 길입니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만나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기쁨의 이유는 십자가의 성 요한처럼 고통 끝에 얻은 참기쁨을 우리에게 나누어 줍니다.
담백한 복음의 기쁨입니다. 복음으로 살게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마음을 돌려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대림의 길은 사람의 길입니다. 사람의 길은 폭행을 멈추고 하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의 삶입니다.
하늘 나라 안에 아름다워야 할 사람의 삶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며 어떠한 길을 가고 있는 지를 복음 안에서 묻고 살피는 회개의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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