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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12/04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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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들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땅끝까지 전하여라. 보라, 우리 구세주 오시리니, 이제 두려워하지 마라.

주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비오니 그분께서 저희를 찾아와 문을 두드리실 때 깨어 기도하고 찬미하며 그분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2023년 12월 4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2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어서 오시어 저희를 구원하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시편 80,4)

 

어서 오시어 저희를 구원하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시편 80,4) 성경말씀카드 시편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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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0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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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2,1-5)
    주님께서 영원한 평화의 하느님 나라로 모든 민족들을 모아들이신다.

  • 오늘 복음
    (마태오 8,5-11)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하늘 나라로 모여 올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2월 4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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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 하느님, 어서 오시어 저희를 구원하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마태오복음
8장 5-11절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하늘 나라로 모여 올 것이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미사 바로가기
2023년 12월 4일 (월) 05:00
김상엽 유스티노 신부

 

✚ 교황님 12월 기도지향 00:22

✚ 미사시작 00:37

✚ 강론시작 07:13

 

 

 

의정부 용현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2월 4일 (월) 10:00
의정부 용현동성당
김유철 요한 보스코 신부

 

✚ 미사시작 07:17

✚ 강론시작 14:59

 

 

 

팔로티회 실시간 미사

 

 

2023년 12월 4일 (월) 16:00
팔로티회 분당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3:19

✚ 미사시작 1:32:28

✚ 강론시작 1:41:0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예수님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카파르나움에 주둔하던 로마군 지휘관으로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던 그는, 아마도 이 고을에서 손꼽히는 세력가였을 것입니다. 그런 이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을 한껏 낮추는 자세를 보입니다. 

차원이 다른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알아본 것입니다. 이 인식은 믿음과 곧바로 연결됩니다. 백인대장은 자기 군사들을 복종시키는 권한을 예로 들며, 이보다 더 큰 권한을 지니신 분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굳이 자기 집에 모시지 않더라도 권위 있는 말씀만으로도 자신의 종이 나으리라 확신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대단한 믿음을 지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한과 능력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알아본 이상, 자기 신분(이방인)이나 직책(백인대장)이나 체면(세력가) 따위는 그의 안중에 없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자기 믿음을 드러내 보이고자 노력하였고, 결국 어떤 유다인도 들어 보지 못한 예수님의 찬사를 듣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약한 믿음 때문에 때로 질책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마태오 복음서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8,26; 참조: 14,31; 17,20).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그분의 현존과 능력을 의심할 때가 때로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작고 보잘것없는 믿음이라고 자책하기보다는, 백인대장이 보여 준 확신에 찬 행동들을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17,20)도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께 조금씩이나마 성장하는 우리의 믿음을 보여 드리도록 노력합시다. 

어느덧 크게 자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감탄하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백인대장의 믿음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 남을 아프게 하는 말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일부러 아프게 하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평상시에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큰 아픔을 주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미망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까? 이 뜻은 남편을 여의고 혼자 된 여인입니다. 그런데 한자 뜻을 살펴보면, 아닐 미(未), 죽을 망(亡), 사람 인(人)으로 ‘죽지 않은 사람’입니다. 바로 여기에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따라 죽어야 한다는 유교적 사상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살색’ 역시 황인종 중심의 사고로, 피부색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표현입니다. 또 ‘결정 장애가 있다’도 그렇습니다. 무언가를 결정할 때 주저하는 사람을 두고 흔히 하는 말이지만, 장애를 단순한 불편함이 아닌 부족하고 열등한 것이라고 바라보는 시선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는 말을 자기도 모르게 사용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도 그런 잘못을 많이 범했음을 반성합니다. 실제로 제 말을 듣고서 크게 상처를 받았다면서, 한동안 저를 많이 원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계속해서 실수할 수 있는 우리였습니다. 따라서 최대한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는 말을 하는 데 노력해야 그나마 아픔을 주는 말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합니다. 자기 종이 중풍으로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백인대장의 대답이 의외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말이 기억나십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고 계속해서 표징만 보여달라는 말이었고, 예수님이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서 기적을 행한다면서 철저하게 반대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로마의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진정한 회개와 겸손의 말이었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의 말이었습니다. 이 말에 감탄하시며 이렇게 이르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우리는 과연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특히 주님께 하는 말은 어떠했습니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에서 나오는 겸손과 감사의 말이었습니까? 아니면 주님께 대한 불평에서 나오는 불평과 원망의 말이었습니까? 우리의 말에 주님께서는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슬퍼하실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길이 막혔다면 원점으로 돌아가세요. 미로에서 헤매느라 실마리를 찾지 못할 때는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의외로 색다른 발견을 가져다 줄 수 있답니다.

- 쿠니시 요시히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 구조를 갖추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종인 중풍 병자를 고치십니다. 로마 백인대장은 종을 위해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서 고쳐주시겠다고 하시는데,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미사 때 성체를 바라보며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원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에 지배당하는 상황이었고, 일제 강점기로 보자면 일본군 높은 장교가 한 시골 선생에게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으니 한 말씀만 하시면 자신의 종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겸손해질 수 있었을까요? 희망과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교만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가끔 남자와 여자가 사귀다 보면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자신이 잘났기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처음엔 ‘나 같이 자격 없는 사람을 사랑해주다니 정말 감사하네!’라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저 사람이 나에게 자격이 되나?’라는 교만한 생각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면 둘의 사랑은 실제적으로는 끝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겸손이 사라지면 사랑도 믿음도 희망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진정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사랑이 자기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사랑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예가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을 너무 사랑했지만, 그래서 많은 애정을 쏟았지만, 결국 아들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가 아들의 아내를 못살게 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어머니에게 잘못이 무엇일까요? 사랑을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우리의 어머니가 되시기 위해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아버지께 순종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혼자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순종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순종을 배우지 못했다는 말은 큰 자아만 남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어머니가 자녀를 참으로 사랑한다면 남편과 자녀에게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를 상상해봅시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고 있을 때 교만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 덕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고도 배 위에 머무는 이들은 교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예수님인가? 물 위를 걸으려고 하게?”라며 베드로를 나무랄 것입니다.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나를 가장 사랑해주신 분처럼 나도 그분을 사랑하고 나의 자녀들도 그분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순종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따라서 백인대장이 이미 종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사랑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원천을 쉽게 알아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겸손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도 맞겠지만, 믿기 때문에 겸손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도 예수님께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주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나는 일분일초도 생존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분임을 믿는 것은 이렇게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하여 주님께 합당하지 못한 존재임을 알게 합니다. 이때 심지어 저는 예수님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격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겸손함은 결국 하느님 앞에서는 너무 당연하고 이웃 앞에서도 상대를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다는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따라서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하지도, 믿지도, 그래서 희망할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이웃에게는 사랑을 하느님께는 믿음을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대림 시기 첫날인 오늘 백인대장 얘기를 교회 전례가 들려주는 것은 창세기의 그리스도론을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얘기가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옵니다. 1장은 어디 계시는지 알 수 없는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얘기입니다. 

이 하느님은 신비의 하느님이고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곳에 계시는 분입니다 

이에 비해 2장의 하느님은 인간이 있는 땅에까지 내려오시어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코에 숨을 불어 넣어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땅에까지 내려오시어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러 땅에 다시 내려오시는데 그분이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십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땅에까지 내려오지 않고도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하느님이 굳이 땅에까지 다시 오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능력으로만 구원하시지 않고 사랑으로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백인대장이 자기 종을 치유해달라고 청하자 주님께서는 즉시 “내가 가서 고쳐주마.”라고 하시는데 백인대장은 주님이 자기 집에까지 오실 필요가 없다고, 말씀으로 충분히 치유하실 수 있다고 믿음을 보입니다. 

이 대림 시기에 우리도 백인대장과 같은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종에게는 사랑을, 주님께는 믿음을 지닌 백인대장과 같이 이웃에게는 사랑을, 하느님께는 믿음을 지닌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모든 이들을 편안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모든 자녀들이 행복하길 바라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통하여 진정한 삶의 참된 의미를 만나게 됩니다. 신분의 굴레에서 풀어주시며 고통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여 주십니다. 사람은 참사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말보다는 실행을 앞세워야 합니다. 

이 세상 전부가 하느님의 소중한 것이며 하느님의 아픔들입니다. 하나하나의 아픔이 하나하나의 깨달음으로 바뀝니다. 새로운 삶의 영원한 기쁨과 환희를 예수님을 통해 뜨겁게 체험합니다. 보살피고 보호하고 기도하는 백인대장의 믿음에서 진정한 믿음이란 소중한 것을 지켜나가는 오늘의 마음임을 절실히 만납니다.

아픔으로부터 방향을 돌려 믿음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믿음이란 치유의 체험입니다. 믿음으로 오시고 믿음으로 맞이하는 믿음의 참뜻입니다. 믿음이 생명의 빛이며 믿음이 우리에게 온 새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듯 소중한 관계를 고쳐 주시는 행복한 믿음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믿음과 기도로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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