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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11/30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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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를 보시고 부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리라.

주님,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간절히 비오니 일찍이 복된 안드레아 사도가 주님의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렸듯이 이제는 주님 곁에서 저희를 위하여 영원한 전구자가 되게 하소서.

 

2023년 11월 30일 (목)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1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 4,20)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 4,20) 성경말씀카드 마태오복음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마태 4장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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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1월 30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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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리라.

 

 

마태오복음
4장 18-22절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1월 30일 (목) 05:00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고태경 마태오 신부

 

📌 성 안드레아 소개 00:05

📌 미사시작 00:59

📌 강론시작 08:56

 

 

 

의정부 용현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30일 (목) 10:00
의정부 용현동성당
이충열 티토 신부

 

📌 미사시작 15:05

📌 강론시작 27:37

 

 

 

명서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30일 (목) 10:00
명서동성당 미사
임태근 모세 신부

 

📌 미사시작 02:40

📌 강론시작 10:32

 

 

 

팔로티회 실시간 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1월 30일 (목) 15:00
팔로티회 홍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40

📌 강론시작 09:57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1월 30일 (목) 16:00
팔로티회 분당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1:22

📌 미사시작 1:33:37

📌 강론시작 1:42:3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상우 바오로 신부

 

가장 탁월한 복음화 방법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에 교회는 ‘믿음과 선포’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는 장면이 간략히 소개되지만, 요한 복음서에서는 좀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형 베드로에게 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전합니다(요한 1,40-41 참조).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믿음 선포로 예수님을 만난 뒤 그분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드레아는 베드로에게 믿음을 전하며 주님을 믿도록 초대합니다.

한편 제1독서에서 바오로는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무엇을 믿으려면 먼저 믿음의 내용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참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듣지 않고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데, 선포의 대상은 늘 그리스도의 말씀인 복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복음을 선포하고 믿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여야 할 사명이 주어집니다. 

사사로운 자신의 생각이나 정치적 견해, 영화나 드라마 줄거리, 날씨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회의 공적인 믿음의 내용을 전하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입니다. 그런데 가장 탁월한 복음화의 방법은 일상 속 삶과 실천으로 솔선수범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를 따라오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우리는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고 있을까요? 하느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도 몰라서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자기가 늘 하던 것의 범주 내에서만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범주에서 벗어나는 부르심을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복음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오지요.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돈 많은 풍요라는 자기 범주 안에서 주님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그렇지 않았지요. 주님께서는 자기 범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즉, 자기가 늘 하던 범주라는 틀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자기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제대로 따를 수 있었습니다. 나보다 주님이 더 중요한 사람만이 제대로 응답할 수 있는 주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무조건 지키고 남는 여력으로만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부르심을 온전하게 따르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힘든 것입니다. 
 
자기에게 급한 어떤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도와주면 빠르게 일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친한 친구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했습니다. 자기의 모든 일을 제쳐두고 나의 어려움에 함께하는 친구가 좋습니까? 아니면 자기 일 먼저 하고 나서 여력이 되면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친구가 좋습니까? 이처럼 주님의 부르심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나의 응답을 통해 주님과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오늘 우리는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지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베드로 사도의 동생으로, 복음에도 나오듯이 형 베드로와 함께 고기잡이하는 어부였습니다. 그날도 이 두 형제는 호수에서 어망을 던지고 있었지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이번 달 초에 사목회장님을 새롭게 뽑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조언을 들어서 사목회장님 하시면 괜찮겠다고 생각되는 분에게 사목회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솔직히 거절하시면 어떻게 설득할까도 고심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기우였습니다. 이분께서는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물을 버리고 따랐던 제자들의 모습에 주님께서도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지금도 우리에게는 그분의 부르심이 다양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내 일이 먼저라고 하면서 그 부르심을 뒤로 미루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진심을 담아 들여다보면 세상이 무너져도 변하지 않을 사랑을 읽을 수 있다.

- 하윤재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죽을 때 밝혀진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성 안드레아는 서기 60년경 그리스 파트라스에서 엑스(X) 십자가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힐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통적인 십자가 대신에 X자 모양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이 십자가는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순교 기록에 따르면 그는 못 박히지 않고 십자가에 묶여 며칠 동안 매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 기간에 그는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전파했습니다. 그러한 극한 상황에서도 그가 인내하고 계속해서 전파한 것은 그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헌신의 증거로 여겨집니다. 

성 안드레아는 마치 다리와 같은 중간 역할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사도가 되어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5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하실 때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이를 한마디로 하면 ‘선교’라 할 수 있습니다. 선교는 자신 깊숙이 있는 하느님의 존재를 꺼내 보여 주어 그도 그분과 친교를 맺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꺼내주는 방식은 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의 죽음으로 아버지를 우리에게 소개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 ‘히치’(2005)에서 윌 스미스는 뉴욕시의 전문 데이트 컨설턴트인 알렉스 히치의 역을 맡았습니다. 히치는 남성이 관심 있는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돕는 전문가입니다. 

그의 최근 고객은 앨버트로 유명인 알레그라에 반했습니다. 앨버트를 돕는 동안 히치는 가십 칼럼니스트 사라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알렉스는 전문가답게 사라를 꼬시고 사라는 쉽게 넘어옵니다. 그런데 사라는 자신의 칼럼에 쓰기 위해 신비한 데이트 컨설턴트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앨버트는 히치의 조언으로 불가능할 것 같았던 알레그라와 데이트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자신이 사귀게 된 히치가 여자 꼬시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인 것을 알고는 크게 분노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알레그라의 귀에도 들어가 알렉스가 그 사람의 코치를 받고 자기에게 접근한 것을 알게 됩니다. 졸지에 알렉스와 앨버트는 여자들에게 차입니다. 

앨버트는 이제 다음 단계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렉스에게 묻습니다. 자신의 진심을 믿어주지 않는 사라에게 화가 잔뜩 난 알렉스는 이제 끝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에 진심이었던 앨버트는 알렉스에게 결국엔 기술만 가르쳤지 진짜 사랑을 모르는 겁쟁이라고 말하고 알레그라를 찾아갑니다. 앨버트의 진심에 감동한 알렉스도 사라를 찾아가 용서를 청하고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두 여자는 두 남자의 진심을 받아주어 두 커플이 동시에 결혼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알렉스는 사랑을 이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리가 되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어야 할 때 그에게서는 자존심이 나왔지, 사랑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 죽어갈 때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마음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기술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간직한 보석입니다. 

보석함이 썩거나 불에 타면 무엇이 나올까요? 보석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죽을 때에도 주님을 보여 주고 전할 수 있다면 그분이 나의 보석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가치를 아는 이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그러니 성 안드레아처럼 죽을 때에도 주님을 전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평생 무엇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고 살아왔는지가 증명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4등 안드레아

 

공관복음에서 안드레아 사도는 저평가된 분입니다. 형 베드로는 주님 교회의 반석이 되었지만 그는 같이 첫 제자였으면서도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지요. 

그리고 주님의 중요한 순간들, 곧 타볼산의 거룩한 변모 때와 죽은 소녀를 살리실 때와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실 때 주님께서는 첫 제자들 가운데 형 베드로와 제베데오의 두 아들은 동반하시고 안드레만 빼놓으셨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안드레아가 4등 안드레아였다는 표시이거나 안드레아가 아예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는 표시가 아닐까요? 

물론 주님께서 그러셨을 리 없을 테지만 그렇더라도 안드레아가 인간적으로는 자신만 주님 사랑 밖에 있다고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제베데오의 두 아들이 베드로를 제치고 주님 좌우에 앉으려고 하자 다른 제자들이 불쾌해했다고 하는데 이때 안드레아만 예외였을 리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주님 사랑에서 자기는 밀렸다고 인간적으로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공관복음의 안드레아는 존재감이 별로 없지만, 그러나 요한복음의 안드레아는 제법 중요한 존재입니다. 

스승 세례자 요한과 함께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고, 지나가는 주님을 세례자 요한이 가리키며 메시아임을 알려주자 주님을 따라가 주님이 계신 곳을 보고는 형을 주님께 데려갑니다. 

그러니까 안드레아는 제일 먼저 주님을 따른 존재요, 형을 주님께 인도하고 천거한 존재인데, 이런 면모는 요한복음에서 두 번 더 발견됩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주님을 찾아왔을 때 그들을 주님께 데려가고, 빵의 기적 때 오병이어를 가진 아이를 주님께 데려가 만나게 합니다. 

그리고 이밖에는 요한복음에서도 안드레아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4등의 존재로 있고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존재인 것이 실은 안드레아가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저는 오늘 이런 존재와 이런 사랑을 돋을새김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제가 이렇게 없는 듯 있는 사람이지 못하고, 존재감 없이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안드레아처럼 소리 없이 대단한 사랑을 하지 않고, 빈 깡통처럼 요란한 사랑을 제가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에 비해 존재와 존재가 만나게 하고, 사랑이 사랑을 만나게 하는 안드레아의 사랑은 얼마나 대단합니까? 

아무튼 4등으로라도 늘 주님과 함께 있는 것, 두드러진 활약은 못하더라도 사람들을 주님과 만나게 하는 것, 이것이 실은 겸손이 밑받침된 대단한 내공의 사랑이라는 것을 안드레아 사도를 통해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부르심이 곧 목적이 되고 따름이 곧 소명이 됩니다. 우리의 현실 안에서 살아 숨쉬는 생명의 복음을 듣습니다. 생명의 복음은 더 나은 행복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생명의 복음을 듣는 모든 순간이 은총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전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른 삶이 펼쳐집니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 자기를 살리는 삶입니다. 부르심과 따름의 본질이란 예수님과 함께하는 일상이 본질입니다. 만들어가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간절하신 마음 큰 사랑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큰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의 진실되고 바른 마음입니다. 

저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하나의 길을 예수님과 함께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최고의 가치 절대적인 의미이며 가장 참된 생명의 길인 복음의 길을 우리는 걸어가고 있습니다. 성 안드레아의 따름은 우리의 따름이기도 합니다. 이미 가장 좋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길에서 하느님과 함께 행복을 여는 기쁨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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