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 당신께 돌아오는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주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일깨우시어 저희가 거룩한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며 주님의 자비로 더욱 큰 은총을 받게 하소서.
2023년 11월 29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1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9)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루카복음 21장 19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다니엘서 5,1-6.13-14.16-17.23-28)
사람 손가락이 나타나더니,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 오늘 복음
(루카 21,12-19)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05:00)
- 용현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10:00)
- 명서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10:00)
-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11:00)
- 팔로티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15:00)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리라.
루카복음
21장 12-19절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1월 29일 (수) 05:00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임현호 도미니코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9:27
의정부 용현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29일 (수) 10:00
의정부 용현동성당
이충열 티토 신부
📌 미사시작 15:16
📌 강론시작 23:35
명서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29일 (수) 10:00
명서동성당 미사
구성진 율리아노 신부
📌 미사시작 00:01
📌 강론시작 10:01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29일 (수) 11:00
남양성모성지 미사
이상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미사시작 33:24
📌 강론시작 41:17
팔로티회 실시간 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1월 29일 (수) 15:00
팔로티회 홍천
장화기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12:41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1월 29일 (수) 16:00
팔로티회 분당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0:44
📌 미사시작 1:31:31
📌 강론시작 1:40:53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오해와 갈등, 미움과 원망을 참아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우리 바람과 기대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이자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사셨습니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당신 자신을 한없이 낮추시어 비천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교회는 대림 시기를 보내며 인간이 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겸손하신 육화, 곧 강생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삼 년의 공생활 동안 동고동락하였던 제자들의 발을 손수 닦아 주실 뿐 아니라 당신을 저주하고 침 뱉으며 못 박은 이들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고,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사랑과 겸손의 절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만일 십자가 희생과 죽음이 없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영광으로 들어가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부활과 십자가는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의 영광으로 들어가고자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신 스승처럼, 우리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박해와 고통, 오해와 갈등, 미움과 원망을 참아 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는 첫째, 이러한 시련을 통하여 우리 믿음은 단련을 받아 정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러한 역경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에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일치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성실히 짊어진 뒤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이 상급으로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마태오 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광야에 왜 가셨을까요? 마귀가 유혹해서 가신 것일까요? 아니면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의지로 가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당신 의지로 가셨을 것 같지만, 마태오 복음 4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 의지를 세워 광야에 가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로 가신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원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루시도록 내어 맡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서 이루시도록 자신을 이렇게 내어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찾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찾아 나선다면 하느님 자리는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유혹을 받는 광야에 간다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쁜 것이 되는 것은 유혹에 빠졌을 때이고, 유혹을 이겨냈을 때는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가장 큰 기쁨의 순간이 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유혹의 순간이 올 때, 왜 이런 유혹을 주시냐고 울부짖어야 할까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뻐해야 할 때였습니다. 이로써 하느님의 영광이 이 세상 안에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은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이루시도록 모두 내어 맡기실 때 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증언하고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박해와 고문, 재판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제자들을 그렇게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왜 그런 힘든 시간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지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바로 제자들에게 유혹의 공간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듯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3)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곧 우리의 구원과 직결됩니다. 그래서 순간의 만족을 얻는 삶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가져올 수 있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이겨내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루카 21,19 참조).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들은 가치보다 가격에 더 주목한다. 하지만 가격은 당신이 지불하는 것이고, 가치는 당신이 얻는 것이다.
- 워런 버핏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 안의 목숨과도 바꿔서는 안 되는 두 가지
오늘 복음 말씀도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표징의 일부입니다. 이 앞에서는 세상이 생명력을 잃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전쟁과 기아, 전염병과 자연재해 등이 일어날 것인데 이는 자기 주위에 생명력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면 그 사람이 죽어가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사람이 건강할 때는 주위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봉사할 수 있지만, 약할 때는 오히려 봉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날씨나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오히려 주위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생명력이고 은총이라 합니다.
은총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과 함께 ‘진리’에 관한 내용입니다. 세상 마지막 때가 되면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을 모든 사람이 박해할 것입니다. 이때 그들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라고 하십니다.
저도 책을 낼 때 그런 말을 쓰면 분명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합니다. 그들은 저를 위해 하는 말이지만, 저는 그들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고 싶습니다. 내 안의 진리를 두려움으로 깨버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나의 죽음으로 내 안에서 소멸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내 안에 진리와 은총으로 존재하시는데, 믿음이 있다면 이는 죽임을 당하더라도 지켜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잔 다르크 성녀는 그야말로 선한 영향력을 미친 존재입니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 먼저 은총이 충만하였습니다. 1412년경 프랑스 돔레미(Domrémy)에서 태어난 잔 다르크는 13세 때 하느님에게서 오는 환시를 봅니다.
16세 때 전쟁에 참여하고 17세 때 적군에게 잡혀 그쪽 교회의 재판을 거쳐 19세 때 산 채로 화형당합니다. 그녀 덕분으로 1429년 오를레앙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어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습니다. 잔의 도움으로 대관식을 한 샤를 7세는 그녀의 석방을 위해 협상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1920년에 이르러서야 잔 다르크는 재평가되었고 시성됩니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글을 배우지도 못한 시골 처녀인 그녀의 변론들은 신학자들을 무색게 할 정도로 오류가 없고 강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신이 믿는 ‘진리’에 대해 죽음도 그녀를 변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죽음으로 위협하는 그들에게 그녀는 말합니다.
“모든 전투의 승패는 마음에서 먼저 결정됩니다.”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을 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내가 아는 죄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칩니다. 우리가 가진 전부는 단 한 번의 삶이며, 우리가 믿는 대로 살아가고 나면 사라집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포기하고 믿음 없이 사는 것은 죽는 것보다 끔찍하고, 젊어서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합니다.”
하느님이 세상 사람들의 위협에 영향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내 안에서 은총과 진리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목숨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내가 믿고 주장하는 것이 흔들린다면 이는 자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지 못했음을 증명합니다.
자신 안에 생명을 바칠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면 아직 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참 진리가 있고 그것을 위해서는 목숨도 두렵지 않아야 영원한 생명을 품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남에게 영향받지 않습니다. 그 영향을 멈추는 방법은 죽음뿐입니다. 그러나 죽음조차도 그 영향력을 멈추지 못합니다. 이것이 내 안에 성령께서 계시다는 증거이고 내가 영원한 생명을 지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는 지옥을 거부하는 분위기, 성체를 왜 영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심지어 삼위일체를 잘못 이해하여 하느님을 한 분으로 고백하기도 합니다.
거의 진리가 교회 내에서도 사라져가고 이것을 거부하는 이들은 박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살아있는 자가 되기 위해 잔 다르크처럼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신앙인이 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묵직한 묵상거리들
어제 사람들에게 파멸의 시간이 와도 두려워하거나 속거나 따라가지 말라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제자들에게 박해받게 되면 오히려 증거의 기회로 삼으라고 하시고 그 과정에서 인내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속거나 따라가지 않는 정도만 되도 되지만 제자들은 그것으론 부족하고 주님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묵상할 것을 갖습니다.
첫째는 기회와 관련한 묵상거리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기회를 잡지 못하고 놓치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기회를 잡더라도 고작 승진이나 출세의 기회나 잡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신자이며 제자인 우리는 다른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처럼 세속적인 기회가 아니라 당연히 영적인 기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주님을 증거 하는 기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기회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기회란 주님을 위한 것이며 동시에 나를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로 묶으면 우리가 증거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고, 그래서 그들에겐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대도 관념도 없고, 그래서 이 세상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 삶을 삽니다. 그러니 기회를 잡더라도 세속적인 기회만 잡게 되겠지요.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강한 갈망이 없으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어도 된다는 얘기가 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박해와 손해라는 기회비용을 치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기회비용이라는 두 번째 묵상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기회비용이란 애초에 경제적인 용어로서 시간, 돈, 능력 등 주어진 자원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인간은 다양한 기회를 모두 선택할 수 없고 그래서 어떤 기회의 선택은 곧 나머지 기회들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그대로 적용하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이나 하느님 나라와 같은 영적으로 큰 가치를 선택게 되면 이 세상의 가치를 포기하고 박해와 손해를 감수하는 기회비용을 치러야겠지요.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박해를 감수하는 기회비용뿐 아니라 박해를 감당하는 기회비용도 치러야 하는데 감당하는 기회비용을 다른 말로 하면 인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박해를 감수하는 것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감수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수한 것을 감당해야 하기에 다시 말해서 감수한 다음엔 그것을 인내해야 하기에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라는 중요한 말씀을 오늘 마지막으로 하시는데 이것이 우리가 건너뛰지 말아야 할 세 번째 묵상거리입니다.
사실 박해가 아니더라도 약함과 병고를 인내해야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가게 됨을 나이 먹고 늙어갈수록 무겁게 묵상하는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걱정과 불안을 주님과 나누면 걱정과 불안은 인내와 용기가 되고 지혜가 되어 있습니다. 생명을 얻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기에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나아가야 할 생명의 방향을 아는 것이 종말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미움을 떼어내는 집착을 떼어내는 하느님 사랑에 우리는 집중할 뿐입니다. 미움과 박해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꿋꿋이 주님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주님의 길이 구원의 길입니다. 인내로써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을 정녕 믿습니다. 우리는 늘 우리자신 때문에 걱정을 먹고 살지만 예수님께서는 인내로써 걱정을 뛰어넘는 구원의 진리를 걱정이 많은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인내와 끈기가 우리를 살리는 삶의 지혜입니다. 근심과 걱정 삶의 조바심이 부질없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걱정의 포로 미움의 노예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구원의 협력자들입니다. 걱정은 하느님의 지혜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하나하나를 되새기며 하느님을 향합니다.
하느님의 희망은 뒤를 돌아보는 집착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희망은 매 순간 베푸시고 지켜주시는 사랑과 자비를 되새기는 감사입니다. 인내는 감사를 향하고 생명은 구원을 향해 있습니다. 구원을 향하는 생명의 오늘입니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3/12/02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3.12.02 |
---|---|
23/12/01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3.12.01 |
23/11/30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3.11.30 |
23/11/28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3.11.28 |
23/11/27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3.11.27 |
23/11/26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3.11.26 |
23/11/25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3.11.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