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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10/19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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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옵니다.

주님, 주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어 저희가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2023년 10월 19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0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로마 3,28)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로마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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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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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로마서 3,21-30ㄱ)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1,47-54)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0월 19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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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루카복음
11장 47-54절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7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48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49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0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51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52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53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54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0월 19일 (목)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인용 도미니코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24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19일 (목)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장화기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5:58

📌 강론시작 16:07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19일 (목)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 성체조배 0:02:50

📌 미사시작 1:01:35

📌 강론시작 1:09:1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우리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오늘 복음은 율법 교사를 향한 불행 선언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시는 불행 선언을 듣고 있던 율법 교사는 그분께 불만을 품고 반문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함께 율법 교사를 향하여 위선적 행위를 지적하시며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를 향하여 불행을 선언하시는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던 조상들의 행위를 증언하면서 동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준수에 관심을 기울이는 율법 교사들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이들을 배척하고 있음을 비판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언자들이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하였듯이 예수님께서도 같은 운명에 놓이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불행 선언의 두 번째 이유는 율법 교사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기에는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지식의 열쇠가 주어졌습니다. 율법 교사들은 그 열쇠를 가지고 지혜가 세운 집에(잠언 9,1 참조)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문자적 이해와 형식적 준수에만 관심을 가졌고, 율법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풀어내고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불행 선언은 율법 교사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겨누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서 예수님을 비판하던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 대해 알고 싶다는 것

 

예전에 어느 가정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워낙 책을 좋아해서인지 습관처럼 방문한 집의 책장을 주의 깊게 봅니다. 이 집의 책장에는 대부분 의학서적, 그리고 건강에 관한 책이 가득했습니다. 의료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이 가족 중에 있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의료 관련 일을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아뇨. 제 아내가 암 환자거든요. 그러다 보니 이런 책만 보게 됩니다.” 
 
아내의 건강을 생각하면서, 의료 관련 서적과 건강에 관한 책들을 계속 읽었던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의 병을 알려는 그 형제님의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건 그에 대해 알고 싶다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의 병을 더 알고 싶었던 것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건강이 좋아지는 음식이나 운동 등을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만약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떠할까요? ‘왜 나 힘들게 아픈 거야?’라면서 짜증만 낼 것입니다. 아내의 고통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아내의 고통보다 자기 고통이 더 크다고 착각합니다. 문제는 아픈 아내에게만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불행하여라.”라면서 따끔한 회초리를 날리십니다. 그들의 위선과 교만을 꾸짖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유다 사회에서 분명히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쓴소리를 내뱉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고 하느님의 뜻이라고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런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불행하여라.”라면서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지요. 오히려 앙심을 품고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합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을 받아들였다면 더 알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의 대상인 이웃을 바라면서 그 이웃을 알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위선과 교만이 가득했습니다. 그 위선과 교만으로 인해 사랑을 보지 않았고, 사랑의 대상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 대해 알고 싶다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좀 더 알려고 노력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자기 자신만 최고라는 위선과 교만을 벗어버리고 사랑의 대상인 이웃을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 아닌, ‘행복 선언’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간은 자신의 모습이 완성됐다고 착각하지만, 누구나 미완성의 존재다. 지금까지 당신이 경험한 대로 현재의 당신 모습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며 금방 바뀐다.

- 대니얼 길버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지식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갇히지 마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천상 지식의 흐름을 막는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을 나무라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들의 문제점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지식을 인간이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 교만에 있었습니다. 인간이 모이면 그 모임 안에는 그 모임을 가능하게 하는 지식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공동체에 속하게 되면 그 공동체에 흐르는 지식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지식은 공동체에 담기고 그 공동체에 속하면 그 지식의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문제점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도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라며 각자의 지식대로 분열되는 교회를 비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하나이고 그 교회만이 “진리의 기둥”입니다. 

류시화의 『인생 우화』는 폴란드의 ‘바보들의 마을, 헤움’에서 일어난 일들을 우화로 엮은 책입니다. 우화의 형태로 세상에 존재하는데 잘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한 이야기들입니다. 여기에 「해를 보여주지 않는 이유」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근처의 상업 도시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온 마을 의회 대표 베렉이 그 도시 시청 벽에 걸린 해시계에 대해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침 그 동네에 시간의 기준이 될 해시계가 없어서 각자 조금씩 차이가 나는 시계들을 맞출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의회를 열어 해시계를 만들어 마을 중앙 광장에 설치하기로 결의합니다.

해시계가 완성되었을 때 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엄청난 노력과 재정을 들여 만든 해시계가 진흙 웅덩이 속에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또 해시계는 이미 그 마을의 자랑이 되었기에 혹시 다른 마을 사람들이 해시계가 그렇게 취급되는 것을 보면 자신들의 이미지가 안 좋아질 것이 두려웠습니다.

헤움 사람들은 다시 의회를 열어 해시계를 어떻게 보호하면 좋을지 상의하였습니다. 그들은 해시계 옆에 벽을 만들어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게 하고 지붕을 씌워 비를 맞지 않게 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또 막대한 재정을 들여 누가 보아도 자랑스러운 해시계 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마을 중앙에 세워진 어떤 도시에도 없는 해시계 박물관을 보며 내심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해시계는 지식의 총체입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한 공동체 안에 갇히면 어떻게 될까요? 쓸모없게 됩니다. 해시계는 해를 받아야 합니다. 모든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교만하여 항상 그 지식에 담을 쌓고 지붕이 되려고 합니다. 따라서 지식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게 하려면 담과 지붕을 헐어내어 하늘의 빛을 받게 해야 합니다. 

저는 논문을 발타살의 교회론에 관해 썼습니다. 처음 논문 제목은 “발타살 신학 안에서의 마리아-교회, 그리스도의 신부”였습니다. 폰 발타살은 교황청 교회 일치성 장관이었고 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현대 신학자입니다. 그러나 논문을 다 읽으신 지도 신부님은 “발타살 신학과 마리아-교회, 그리스도의 신부”로 바꾸어 책을 내주셨습니다. 

발타살 신학 안에 저의 논문 내용이 머물지 않고 오히려 그를 비판하는 내용도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타살 신학 안에서의”가 아니라 “발타살 신학과”로 바꾸어 저의 생각과 바타살 생각이 다름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삼위일체 신학이 발타살과 다릅니다. 

발타살은 삼위일체를 남자와 여자로 볼 때 성령을 그 자녀로 보았지만, 저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오가는 선물로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들 모습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는데 성령께서 그 관계 안에 들어가 있으셔야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미 성립된 후에 태어나는 자녀가 성령이어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저는 논문을 쓰면서도 아무리 위대한 학자라고 하여도 그 안에 사로잡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참 스승은 예수님이시고 그 지식을 지닌 공동체는 상지의 옥좌이신 성모님으로 하는 가톨릭교회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학파에 속하면 분명 완전한 진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자세를 취할 때 “네가 발타살과 그의 학파 박사 신학자들보다 더 공부를 많이 했고 똑똑하다는 말이냐?”라며 교만하다고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진정한 스승은 그리스도, 마리아, 가톨릭교회뿐입니다. 

저는 최대한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지식을 “직접” 들어야 하겠다는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를 거쳐서 오는 지식은 오염되게 마련입니다. 그래도 성인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매우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마리아 발토르타의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입니다. 

이것의 진위는 우리가 판단할 능력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어느 정도 알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금서로 지정했다가 결국엔 신자들이 판단할 것이라고 출판을 허가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아볼 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눈은 우리가 어떤 특정 학파나 집단에 속하려는 마음이 있을 때 가려집니다. 사람을 따르지 맙시다. 요한 사도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이들,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1요한 2,27)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은총을 청해야지 강요해서는 안되는 법

 

오늘 주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이 불행한 이유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케 되지요. 지식이란 어떤 지식을 말하는 것이고 들어간다면 어디로 들어가는 것을 말함인지. 

단순 명확하게 얘기한다면 들어갈 곳은 천국이고, 지식이란 천국에 들어가는 법을 아는 지식이며, 그러니까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렸다는 말은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가는 법에 대한 지식의 열쇠를 율법 학자들이 치워버렸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것을 오늘 로마서 말씀과 연결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는 모두가 죄인이고 모두가 의롭지 않으며 그래서 아무도 스스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잘 지키면 의롭게 되고,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자신도 믿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쳐, 결국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이 율법을 잘 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많은 율법 학자가 율법에 대해 많이 알기는 하지만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요. 

복음을 보면 율법에서 제일 중요한 두 계명에 대해 현명하게 대답하고,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 보다 사랑 실천이 더 낫다고 대답하여 주님의 칭찬을 받은 율법 학자도 있지만 대다수는 율법의 정신과 핵심을 잘 알지 못하여 율법에 얽매이는 율법주의자들이었을 뿐입니다. 

이런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서는 천국 문을 열 수 없습니다.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 곧 은총에 대한 믿음으로만 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천국 문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하느님도 내가 열어드려야 내 안에 들어오시는 것처럼 천국 문도 하느님께서 열어주셔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열어주시기를 바라지 않고 내가 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의 준수나 나의 공로로 열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행위나 공로와 상관없이 거저 주시는 하느님 사랑 곧 은총에 대한 믿음으로 열어주시기를 청할 때 하느님은 거저 주시는 사랑으로 천국 문을 열어주십니다. 

은총과 자비는 청해야지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이잖아요? 천국 문을 내가 억지로 열려고 해서는 더더욱 안 되고요. 

이것을 아는 것이 천국 문을 열기 위한 올바른 지식입니다. 은총을 믿고 청하는 것이 천국 문이 열리는 행복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오로 사도와 같은 지식과 같은 믿음을 가집시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골짜기 마다 가을 들꽃으로 가득한 요즈음입니다. 복음을 바로 보게 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상황을 똑바로 보아야 풀어나갈 길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과 예언자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책임감도 생기는 것입니다. 과거를 뼈저리게 반성하는 거기에서 만나게되는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입니다.

깊은 역사의식과 민족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나쁘고 악한 것을 쳐내는 지혜의 칼이 필요합니다. 역사의 골짜기를 흐르는 수 많은 예언자들의 의로운 피를 기억합니다. 빈약한 변명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무책임한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성숙한 삶의 시작입니다. 용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하려는 실천에서 삶은 새로워집니다. 끝없이 하느님의 뜻을 배반하는 피의 역사는 이제 멈추어야 합니다.

새로움은 책임을 딛고 일어납니다. 책임이 있는 곳에 참된 용서가 있고 참된 희망이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피가 우리들의 교훈이 되고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회개의 빛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서로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예언자적인 삶에 충실한 사랑의 자녀들이길 기도드립니다. 눈물의 골짜기가 기도하는 백합의 골짜기가 됩니다. 성찰과 기도 교훈과 지혜는 이 시대를 밝히는 예언자들의 등불입니다. 등불과 함께 환히 타오르는 신앙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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