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옵니다.
주님, 주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어 저희가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2023년 10월 15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0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8주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마태 22,9)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마태오복음 22장 9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25,6-10ㄱ)
주님께서 잔치를 베푸시고,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리라. - 제2독서
(필리피서 4,12-14.19-20)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22,1-14)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마태오복음
22장 1-14절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1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0월 15일 (일)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문창우 비오 신부
📌 제주중앙성당 소개 00:23
📌 미사시작 00:47
📌 강론시작 15:48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15일 (일)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4:51
📌 강론시작 14:45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초대에 응답하는 자세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에(21,1-11 참조)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이 다시 시작됩니다(21,23-27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르치시고자 비유를 사용하시는데, 오늘 복음은 앞선 두 개의 비유에(21,28-32.33-44 참조) 이어서 세 번째 비유, 곧 혼인 잔치의 비유를 소개합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잔치’는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표현하고자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의 시온산으로 모이는 날을 종말론적 기다림에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시는 ‘잔치’라는 표상으로 그려 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로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 시대가 왔음을 알리시며 그 초대에 응답할 것을 요구하십니다(8,11 참조).
오늘 복음의 비유는 하늘 나라의 선포에(4,17 참조) 대한 엇갈린 반응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하늘 나라의 임금이신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과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당신께서 마련하신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초대받은 이들, 곧 유다 지도자들로 대표되는 ‘선택받은 이들’은 그분의 초대를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이들에게 폭력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초대받지 않은 이들을 잔치에 초대하셨고, 그들은 초대에 응답하였습니다.
이는 초대를 거부한 자들이 구원에서 배제될 것이라는 경고로 이해할 수 있으며, 소외된 이들로 대표되는 이들도 하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맺은 뒤에 하느님 앞에서 음식을 나누었듯이(탈출 24,11 참조), 마지막 날에 우리도 하느님 앞에 모여 음식과 함께 기쁨을 나눌 것입니다. 잔치의 초대에 응답하는 우리 각자의 자세는 어떠한지 살펴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쾌락에서 벗어나는 삶이 중요 하다.
신경외과의사가 쥐를 가지고 행복 중추에 관한 연구 실험을 했습니다. 먼저 쥐의 행복 중추에 전극봉을 삽입했습니다. 그리고 쥐들이 앞의 레바를 누르면 자기의 행복 중추를 자극할 수 있게 했습니다. 즉, 자기 행복(쾌락)을 스스로 선택하게 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기 조절을 하면서 레바를 눌렀을까요? 쥐는 계속해서 레바를 눌렀습니다. 그런데 조금도 쉬지 않고 계속 누르는 것입니다. 결국 정신 없이 누르느라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쾌락에 사로잡혀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인간은 다를까요? 쾌락에 빠져서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합니다. 쾌락이 주는 기쁨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 역시 계속 쾌락 레바를 누르고 있습니다.
계속 행복감을 느낄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지독한 우울감에 빠지게 됩니다. 행복 중추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우울 중추가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 중추의 자극이 계속 강하게 주어지면, 바로 옆의 우울 중추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100% 행복으로 보이는 쾌락을 목표로 삼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쾌락에서 벗어나는 삶이 중요했습니다. 순간의 만족뿐인 것을 계속 가지기 위해 행복 중추 레바를 계속 누르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참 행복을 가르쳐주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의 뜻인 사랑에 집중하며 부작용 없는 진짜 행복을 만들어야 합니다.
임금이 종들을 보내서 왕자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초대장은 미리 보내는 것이 당시 풍속이었고, 임금의 손님이니 그 지위는 전혀 낮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잔치에 오지 않습니다. 임금이 다른 종을 보내서 다시 초대했지만, 이 초대에도 응답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 종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임금의 권위를 부정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왜 그들은 있을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된 것일까요? 임금의 뜻이 아닌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살아야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임금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는 하느님과 사람들이 맺는 새로운 계약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초대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계약을 맺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임금이 군대를 보내서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리게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것이 더 좋다면서 이 초대를 무시하고, 하느님의 권위를 무시했던 것이 아닐까요? 또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은 예복을 입고 와야 하듯이, 하느님 나라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고자 성실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 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
- 존 드라이든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걸음마를 멈춘다는 말은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다는 말과 같다.
세례를 받고 보통 1년 정도 뒤에 견진성사를 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며 견진성사를 미루기도 합니다. 세례와 견진을 마치 별개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받으면 견진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 예식에 이미 이마에 기름을 바르는 견진성사 예식이 들어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것을 설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임금은 아드님의 혼인 잔치에 아무나 초대합니다. 처음 초대했던 이들은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려 하지 않고 그분을 죽였습니다. 이에 이방인들이 초대받게 됩니다.
그러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아 세례를 받은 이들 가운데서도 쫓겨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혼인 예복을 갖추지 않은 사람입니다. 혼인하는 날 잠옷 바람으로 왔다면 그것이 혼인 준비가 안 된 것을 증명해줍니다. 옷은 그 자리에 합당한 준비와 노력을 했음을 알려주는 표징입니다.
혼인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성체성사를 의미합니다. 그 성체성사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은 세례받은 이들입니다. 세례받은 이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몸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도 하나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면 자신도 뛰어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이 혼인 예식에 참여하게 합니다.
그러나 기어 다니는 아기가 자기도 부모처럼 두 발로 걸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바로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과의 오랜 싸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견진의 과정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는 세례를 받고 40년의 견진을 거칩니다. 그들은 이전의 파라오를 섬기기 위해 노예살이했던 본성인 소유욕, 성욕, 지배욕을 포기하고 청빈과 정결과 겸손의 열매를 맺는 자신과의 싸움을 평생 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하지 않는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의 신부를 찾으라고 종을 하란 땅에 보낸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 부르심에 응답한 여인이 레베카입니다. 레베카는 착한 여인이었고 그래서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었지만, 또한 종이 주는 옷과 장신구로 몸을 꾸며야 했습니다. 이사악은 레베카의 얼굴을 몰랐지만, 아버지 아브라함이 준 옷과 예물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자기 처소로 맞아들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종이 선물한 옷과 장신구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는데 피는 세례를 주며 물은 견진을 상징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죄를 끊을 결심을 하고 견진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에 합당한 옷을 입습니다. 이 과정 안에서 수없는 넘어짐이 발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뱀에 물렸습니다. 파라오의 종살이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하느님께 불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들에게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방법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상징하는 구리뱀을 장대에 달아 그들이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들도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덴젤 워싱턴은 “앞으로 넘어지라”라고 말합니다. 대학에서 퇴학당하고 군대에 들어가려고 생각하며 어머니 미장원에서 앉아 있을 때 한 손님이 종이에 이런 말을 적어줍니다.
“소년이여, 넌 세계를 돌아다닐 거야. 그리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거야.”
덴젤 워싱턴은 이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이루어질 때까지 수없이 넘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끝을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목적지를 정하는 것은 세례와 같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서는 견진의 과정을 거치며 자신이 세례받은 사람임을 증명합니다.
다음은 자신에게 그러한 믿음을 준 이와 결국 하나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입니다. 같은 죄로 수천 번 고해성사하십시오. 이것이 세례받았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혼인 예복을 만들어 입는 견진성사를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걸음마를 멈춘 아기는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관심과 무관심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을 위해 잔치를 베푸시리라.”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오늘 독서는 주님께서 산 위에서 잔치를 베푸시고 민족들을 초대하는 얘기입니다.,오늘 복음은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비유입니다.
이 둘을 하나로 묶으면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혼인 잔치를 산 위에서 차리고,모든 민족의 사람들을 초대하신다는 얘기인데 복음에서는 이 잔치에 먼저 정중히 초대받은 사람은 오지 않아 벌을 받고 길거리에서 불러온 뜨내기는 예복을 입지 않아 벌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오늘의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이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와 죽음을 앞둔 늙은이가 있는데 누가 이 잔치에 응하고 누가 거절할까?
이런 상상을 하다 보니 또 제가 자주 하는 질문이 생각났습니다. 천당 가고 싶으신 분 있으면 손드시라고 하면 모두 손을 드는데 지금 당장 가고 싶으신 분 있으면 손을 드시라는 질문 말입니다.
이때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창창한 젊은이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 중 누가 손을 들고 누가 선뜻 손을 들겠습니까?
젊은이일까요?
늙은이일까요?
오늘 마태오 복음과 같은 내용의 루카 복음을 보면 초대에 거절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방금 장가들어서 갈 수 없다고 하는데 지금 자기 연애 사업이 한창인 젊은이가 남의 결혼 잔치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앞으로 행복하게 살려면 취직해야 하고 그래서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데 이미 취직하고 결혼도 하는 다른 사람의 행복한 결혼 잔치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자기는 취직 못해서 결혼도 못하고 있고 그래서 이미 화가 나 있는데 다른 사람의 행복한 결혼 잔치에 오라고 하면 더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남의 행복한 결혼 잔치에 관심이 없고 오히려 화가 나는 젊은이는 늙은이보다 하늘나라의 임금님 아들 결혼 잔치에는 더욱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젊은이가 이런 것은 그래도 이해해줄 수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젊은이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초대받은 늙은이가 관심이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초대가 아직도 달갑지 않고, 아직도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들 걱정도 좀 더 하고, 손주도 좀 더 봐줘야 하고, 나는 아직도 이 세상에서 쓸모가 있으니 더 일해야 하고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문제지만 초대에 응하려고 해도 준비가 안 된 경우도 문제입니다. 갑자기 초대받고 얼떨결에 거절하지 못하고 가긴 갔는데, 혼인 잔치에 갈 예복이 준비되지 않아 그냥 간 경우입니다. 부조금은 없더라도 예복은 걸치고 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하늘나라 혼인 잔치의 예복입니까?
돈입니까?
공로입니까?
이 세상 업적입니까?
제 생각에 마음입니다. 무관심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관심이란 무엇에 관한 마음인데 하늘나라에 관한 무관심이 아니라 관심입니다. 그래서 초대에 감사하는 마음이고, 더 나아가서 사랑과 갈망입니다. 하느님을 늘 사랑하고 하늘나라를 늘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하느님은 우리의 약속이며 하느님은 우리의 잔치입니다. 하느님께로 가고 있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가장 좋은 약속과 잔치를 알면서도 집착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거들떠보지 않는 우리들 삶입니다.
지켜야 할 약속은 참된 만남이며 혼인 잔치는 새로운 사랑의 예복입니다. 그러나 늘 하느님의 사랑을 새까맣게 잊고 그 사랑을 거절하며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거절할 사유와 그럴듯한 이유가 늘 준비된 우리들 입입니다.
세상사는 알아들어도 하느님의 초대는 모르고 삽니다. 동문서답의 삶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이른 약속 늦은 약속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대체 무엇이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우리 식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자녀로 살기 때문입니다. 아낌없는 구원의 때를 놓치지 않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고마운 초대에 기쁘게 응답하고 기쁘게 감사하는 주님의 날이길 바랍니다. 혼인 잔치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순명의 잔치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잔치가 있고 서로를 비추는 만남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잔치 어리석은 초대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입니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3/10/18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3.10.17 |
---|---|
23/10/17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3.10.17 |
23/10/16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3.10.16 |
23/10/14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3.10.14 |
23/10/13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3.10.13 |
23/10/12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3.10.12 |
23/10/11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3.10.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