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3/10/17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0. 17.
반응형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노라.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거룩한 순교자들의 신앙 고백으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시니 순교로 불멸의 월계관을 받은 복된 이냐시오를 본받아 저희도 굳센 믿음으로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소서.

 

2023년 10월 17일 (화)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0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루카 11,41)

 

http://pieonane.com/1761#today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루카복음 11장 41절

오늘성경구절이미지_231017.jpg
0.34MB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0월 17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

 

 

루카복음
11장 37-41절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그때에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0월 17일 (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현균 야고보 신부

 

📌 성 이냐시오 소개 00:05

📌 미사시작 01:10

📌 강론시작 07:50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17일 (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장화기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10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17일 (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4:36

📌 미사시작 1:03:56

📌 강론시작 1:10:49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율법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 찾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한 바리사이를 꾸짖으시는 장면을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어떤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고 그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끝나고 새로운 사건이 시작됨을 알려 줍니다.

사건의 발단은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손 씻기를 규정으로 명시하지는 않지만, 유다교 전통에서 중요한 관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손 씻기는 공동체 사이의 경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표지이자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손을 씻는 관습을 벗어나는 행동은 손님을 초청한 주인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리사이는 손을 씻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의 반응에 예수님께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의 눈에 바리사이들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들은 손 씻기와 같은 제의적 정결에 관심을 쏟았지만, 외적 행위를 내면의 상태와 일치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사용하는 잔과 접시는 깨끗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속은 탐욕과 악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릇의 겉을 씻는 정결 예식을 강조하고 내면의 더러움을 감추려는 바리사이의 위선을 비판하십니다. 

이제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선의 실천입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 자선 행위로 탐욕과 악을 씻고 하느님 앞에서 정결한 이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 규정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되돌아보도록 요청합니다. 바리사이의 율법 이해와 적용은 우리에게 부정적 본보기입니다. 우리는 율법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미래에 큰 결실을 볼 수 있다.

 

갑곶성지에 처음 소임을 받아 갔을 때, 큰 나무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몇 그루의 큰 나무가 있기는 했지만, 그 숫자가 너무 적어서 휑하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데, 어느 신부님께서 작은 벚나무 15그루를 심으라면서 성지에 놓고 가셨습니다. 이 15그루 만으로 이 횅함을 없앨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래도 신부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서 보내주신 것이라서 정성껏 심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다시 성지에 가게 되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심었던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벚나무가 너무 크게 잘 자라 있는 것입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미래에 큰 결실을 볼 수 있습니다. 씨앗을 심어야 나무 한 그루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별것 아니라는 생각보다는 지금 당장 작은 씨앗 하나 심는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작은 습관도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어떤 과자 광고 문구 중에 ‘손이 가요, 손이 가, ***에 손이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딱 하나 먹고 나면, 이를 멈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스마트폰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메시지 확인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을 보면,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뉴스도 보고, 인기 영상도 보고, SNS 등도 확인하면서 오랜 시간을 스마트폰 만지작거리는 데 시간을 쓰게 됩니다. 
 
작은 악습도 멀리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별것 아니어도 이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면, 미래를 위한 과감한 시작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해 놓고, 유다인의 관습대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그분의 모습을 불편하게 쳐다보는 바리사이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찬 모습이 아닌, 자선을 통해 더러워진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주일 미사 참석 한 번 한 것으로 신자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생각한다면, 또 교회 안에서는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가정이나 사회 안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사는 것이 바로 겉과 속이 다른 모습입니다. 따라서 가장 기본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선, 바로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십니다. 이 사랑이 나의 마음 전체를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주님의 뜻이기에 아주 자그마한 것이어도 가장 큰 결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교우가 제게 말씀하십니다. 성당에서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에 더 성당에 오고 싶다고 하십니다. 성당 의자에 편안히 앉을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모습에 ‘역시 신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십니다. 자기 아이가 성당에서 시끄럽게 떠드는데도, 웃으면서 “아이가 참 밝네요.”라고 받아주시는 모습에 편안한 마음으로 성당에 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자그마한 사랑 실천이지만, 그 결실은 어떤 전교 활동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그마한 사랑은 적극적으로, 하지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악은 철저히 피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을 말하는 입은 신조차 막을 수 없다.

- 신용목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위선으로는 지속할 수 없는 행위가 하나 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안 좋은 생각을 품습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율법이라기보다는 관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꼬집습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나쁜 욕망으로부터 깨끗해지는 방법도 제시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세 범주로 나뉩니다. 모든 행위는 ‘욕구’에 의해 발동됩니다. 인간의 기본 욕구는 ‘생존 욕구’입니다. 곧 더 가지고 더 먹고 더 세지려는 욕망입니다. 아기들의 모든 행동은 이 생존 욕구에 기인합니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행위가 첫 번째 범주입니다. 
두 번째 범주는 그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오는 방어기제입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이 하는 행동들입니다. 곧 손과 접시를 깨끗이 씻는 행위입니다. 이것으로써 그들은 자기들이 깨끗함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이는 속이 더러움을 감추기 위한 위선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범주입니다. 

두 번째 범주의 행동은 첫 번째보다 더 안 좋습니다. 본인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남을 속이는 것은 물론이요 본인들도 속기 때문입니다. 본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본인들은 남들보다 깨끗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스스로 나아질 기회를 잃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행동은 첫 번째에 속했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었으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위선적 행동으로 깨끗해질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범주는 생존 욕구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동입니다. 이러한 목적이 그 사람을 깨끗하게 만듭니다. 교회에서는 그 방법으로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하라고 권합니다. 생존 욕구에서 벗어나려는 목적으로 하는 기도와 단식과 자선은 모두 그 사람을 깨끗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어떻게 인간이 깨끗해질 수 있는지를 몸소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단식을 제외하고 ‘자선’만을 강조하실까요? 사실 기도와 단식은 위선적인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행위로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기도는 오래 하고 단식하며 힘든 얼굴을 하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자선만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망은 욕망의 가장 근저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도 십일조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자선을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것에서 재산에 줄어드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 중 어떤 누구도 매일 기도할 수 있고 매일 단식할 수 있는 사람은 있어도 매일 자선을 베풀어 성인들처럼 가난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재물이 욕망의 근저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선악과를 바치는 것, 곧 십일조를 바치는 것, 제때 소출의 일부를 주님께 드리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영화 ‘황시의 아이들’(The Children of Huang Shi)은 1930년대 중국의 진실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1937년 중국에서 일어난 일본군의 침략 중에 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합니다. 중심인물은 영국 기자 조지 호그는 특종을 잡을 욕심에 일본군의 무자비한 난징 학살 현장을 취재하던 종군기자입니다. 그는 일본군에 붙잡혀 사형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잭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지만 부상으로 돌아갈 처지가 못 된 그는 안전한 ‘황시’로 몸을 피합니다. 

황시에는 고아원이 하나 있었는데 60명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조지는 처음에는 고아들을 위해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아이들과 가족 같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또한, 그는 아이들을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700마일을 걸어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 여정 중에 그는 아이들을 위험에서 보호하려는 노력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교육도 제공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를 통해 조지는 단순히 기자에서 아이들의 보호자, 교사, 그리고 친구로 변모하게 됩니다.

이 여정을 통해 조지는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며, 고아들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진정한 사랑, 희망, 헌신에 대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사람의 내면의 변화와 성장,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인간의 강인함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욕심은 사랑할 때 사라집니다. 

자선이 그만큼 강력한 힘을 얻는 이유는 바로 ‘사랑’에 가장 근접해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도와 단식도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 악한 욕망의 반대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선은 사랑에 근접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악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쉰들러는 돈만 아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유태인들을 돕기 위해 자기 재산을 쓰다가 결국 재산을 다 잃고 맙니다. 그런데도 마지막에 자기 차를 팔지 못한 것, 금 배치를 팔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그것을 팔았더라면 몇 명은 더 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욕망은 재물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재물로 얻은 기쁨이 재물에 대한 욕심을 사라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선은 그만큼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데 강력한 무기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더럽히는 것과 깨끗하게 하는 것

 

공교롭게도 오늘 독서와 복음 모두 더럽히는 것과 깨끗하게 하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가? 그전에 무엇이 더러운 것인가?

 

제 생각에 더러움이란 죄의 더러움일 것입니다. 이력서로 치면 이력서에 범죄의 이력으로 이력서가 깨끗하지 않고 지저분한 거지요. 그러므로 인간을 죄짓게 하는 것이나 인간을 더럽히는 것은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더럽히는 것입니까? 음식과 관련한 조상들의 전통과 관련하여 주님께서는 복음의 다른 곳에서 이미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지요.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사람 밖의 먼지나 오물이 우리의 손이나 발을 더럽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안까지 더럽게 하거나 마음이나 존재를 더럽힐 수는 없지요. 그래서 오늘 주님이나 바오로 사도 모두 욕망 또는 탐욕이 사람을 더럽히고 죄짓게 하는 것의 하나로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제 생각에 욕망은 욕구와 욕심 사이의 징검다리입니다. 욕구는 인간의 본능과 같아서 욕구 자체를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식욕이 있는 것이 어찌 죄이겠습니까? 성욕이 있는 것을 어찌 죄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욕구 자체는 죄가 아니고 먹고살도록 또는 후손을 잇도록 하느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도 악이 아닙니다. 돼지와 돼지고기가 무슨 악이고 죄짓게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다 선이 아닙니까? 좋은 것들이기에 그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죄의 씨앗이고, 욕망이 욕심과 탐욕으로 발전하여 그것을 자기 소유로 한 것이 죄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참으로 개탄할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문화가 이 욕망을 정당화하고 부추긴다는 것이고, 우리 마음 안에서 사랑 대신 욕망이 자리하게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교황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기쁨에서 지적하시며 오늘 바오로 사도와 주님 말씀처럼 복음이 그리고 사랑이 이 욕망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라고 하시고, 그러면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속에 담긴 것, 그것이 뭡니까? 욕망입니까? 사랑입니까? 사랑이 욕망을 정화하게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각박하고 변덕스러운 우리 시대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아픔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자선의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소유와 재능을 나누는 자선으로 드러납니다. 이와 같이 진실한 믿음은 관계를 살필 줄 아는 사랑의 마음으로 드러납니다.

욕망을 절제하는 것에서 참된 만남은 시작됩니다. 자선은 그래서 우리자신을 아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픈 사람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합니다. 우리모두는 사랑이 필요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깨끗한 믿음을 추구합니다. 깨끗한 믿음은 깨끗한 자선입니다. 생명의 보편적 진리는 자선을 베푸는 실천에 있습니다. 자선은 우리모두를 행복의 길로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주고 받는 사랑이 서로를 깨끗하게 합니다. 마음이 맑으면 우리의 삶도 우리의 만남도 맑아집니다. 최상의 가르침은 마음이 맑아지는 자선의 실천임을 기억합시다.

자선은 또 다른 자선을 낳으며 우리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물들입니다. 신앙의 가치는 자선의 가치로 마음을 밝힙니다. 빛이 되는 기쁜 날 되십시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