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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10/11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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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권능 안에 있어, 당신 뜻을 거스를 자 없나이다. 당신이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만드셨으니, 당신은 만물의 주님이시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공로와 소망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감히 청하지 못하는 은혜도 내려 주소서.

 

2023년 10월 11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0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루카 11,1)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루카 11,1)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루카복음 11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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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0월 11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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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우리는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네.

 

 

루카복음
11장 1-4절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0월 11일 (수)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조용준 니콜라오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8:18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11일 (수)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장화기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0:19

📌 강론시작 10:39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11일 (수)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3:10

📌 미사시작 1:02:00

📌 강론시작 1:10:29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주님의 기도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서에서 ‘기도’를 주제로 다루는 첫 번째 본문입니다(11,5-13 참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도하는 것을 배우기를 바랐습니다. 

“주님, ……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가 소개하는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 복음서의 ‘주님의 기도’보다(6,9-13 참조) 간결합니다. 5개의 명령문으로 이루어진 기도문은 두 가지 기원(2인칭 단수)과 세 가지 청원(1인칭 복수)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찬양하고 그분의 다스림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되고 실현되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에, 세 가지 청원이 이어지는데, 먼저 필요한 양식을 주시기를 청하며, 이어서 죄의 용서와 유혹에서 보호하여 주시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추가로 주목할 것은 제자들의 요구에 앞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1,1 참조). 이를 통하여 루카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을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분으로 묘사하면서(10,21 참조), 예수님께서 먼저 기도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의존하시면서 한결같고 견고한 믿음 안에서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기도’에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 그리고 겸손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기도를 바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려 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의 네 가지 모습

 

사람은 다음 네 가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1) 나도 알고, 남들도 아는 나의 모습

2) 나는 알지만, 남들은 모르는 나의 모습

3) 나는 모르지만, 남들은 아는 나의 모습

4) 나도, 남들도 모르는 나의 모습

 
대부분 첫 번째와 두 번째 모습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가 제일 잘 안다고 여기며, 그중에 어떤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며 불평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안에 세 번째와 네 번째 모습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즉, 자기도 모르는 새로운 나의 모습이 있고, 때로는 남들이 나에 대해 더 잘 알수도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들에게 거짓된 모습을 보이려 하기보다 자기 모습을 더 잘 알기 위해 노력합니다. 반대로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이가 바라보는 자기 모습에만 더 큰 관심을 두기에 늘 거짓과 위선 속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실로 지혜롭기를 원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지혜롭다고 인정받던 바리사이, 율법학자 등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위선자’라는 표현으로 꾸짖으시며, 이런 거짓된 지혜로움에서 벗어나길 바라십니다. 위선자란 자기를 세상에 숨기고 더 나아가 하느님께도 숨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거짓된 나를 숨기지 않는 참된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나를 잘 알 수 있도록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직접 가르쳐주십니다. 그 기도는 우리가 매 미사 때 바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 시작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길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높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낮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에는 ‘하느님’이라고도 함부로 부를 수 없었는데, 이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만큼 하느님과 우리의 간격을 좁혀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모두 잘 알고 계시고, 사랑으로 함께하시는 분임을 ‘아버지’라는 표현으로 강조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으로 가까이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사랑에 대답해야 할까요? 자기를 숨기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겸손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겸손함은 반짝이는 빛이다. 정신이 지식을, 마음이 진실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킨다.

- 폴린 드 뮐랑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기도를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법 : 어린이처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그들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자 요한대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그 기도를 바치면 되는데 왜 예수님께 왜 또 기도를 배우려 할까요? 세례자 요한보다 예수님이 더 높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각자가 바치는 각자의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 기도문이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합니다. 옆집 아이가 할 수 있는 말과 내 자녀가 나에게 할 수 있는 말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곧 기도문 자체가 내가 누구인지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기도만큼 높은 기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기도를 바치신 분은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었습니다. 그 말을 가르쳐주셨다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나의 정체성의 확립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고 하십니다. 기도의 목적은 나의 의로움과 하느님 나라를 구하려는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를 가장 잘하는 존재가 아기들입니다. 아기들은 같은 말을 반복함으로써 부모가 누구인지, 자기가 누구인지 확신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목적입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저녁마다 성당에 기도하러 들르십니다. 그런데 10초도 안 돼 다시 나오십니다. 본당 신부님은 매일 너무도 짧게 기도하시는 할아버지를 ‘기도할 줄 모르시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마지막 때가 온 것입니다.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할아버지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병원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사제는 “할아버지, 뭐가 그리 좋으세요?”라고 묻습니다. 할아버지는 대답하십니다. 

“예, 신부님. 저는 기도할 줄 몰라서 매일 성당에 들러 ‘예수님, 저 왔어요!’라고 인사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께서 매일 오셔서 ‘요셉아, 내가 왔다’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자녀가 된 행복이고 그분의 의로움은 그분께 하느님 자녀로 인정받음입니다. 위 할아버지는 다른 것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가 되기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받았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외아드님이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를 바칠 자격은 예수님에게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에서는 마태오복음에 나와 있는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와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가 빠져있습니다. 당시 여러 버전의 주님의 기도가 있었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였던 마태오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말을 많이 하는 것일까요? 

기도는 수준이 높아질수록 그 말이 단순해집니다. 아기들이 “엄마, 엄마, 엄마…” 하는 기도가 더 셀까요, 아니면 많은 말로 부모를 설득하는 자녀의 기도가 더 셀까요? 

부모를 말로 설득하려는 노력 안에는 부모에게 온전히 의탁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단순하게 엄마라는 말을 반복하는 아기가 부모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받습니다. 주님의 기도나 묵주기도, 혹은 자비의 기도가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게 되는데, 그래도 그러한 기도가 더 힘이 강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많은 말을 하는 기도보다는 기도가 단순해질수록 더 높은 수준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같은 말을 반복한다고 다 높은 수준의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기처럼 그 단순한 “엄마!”란 말에 자기 온 감정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한 주님의 기도라도 한 기도 말에 오래 머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선교사가 문명과 접하지 않은 한 섬에 선교를 들어갔다가 시간이 없어 주님의 기도만 알려주고 나왔습니다. 3년 뒤에 그 선교사가 그들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마을 주민들은 물 위를 걸어서 선교사를 맞으러 나왔습니다. 깜짝 놀란 그들은 선교사에게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저희가 선교사님이 가르쳐준 기도를 다 기억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만은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을 반복해서 바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이 아버지이신데 우리에게 불가능한 게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물 위를 걸어보니 마을 사람들 모두가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도 말이 단순하다는 말은 그 말 안에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담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기가 반복하는 “엄마, 아빠!”란 말엔 아기가 하고 싶은 모든 말이 들어있습니다. 점점 어린이처럼 기도가 단순해질 때 기도는 더 높아집니다. 

저는 성체조배 할 때 주님의 기도만을 바칩니다. 보통 주님의 기도를 한 번 하는 데 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기도할 때 호흡에 맞춰 숫자를 셉니다. 잠이 안 올 때 상상으로 양의 숫자를 세는 것과 같습니다. 숫자를 세면서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분심이 되면 어디까지 숫자를 셌는지 잊어버립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를 끊어가며 바치고 그 의미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70번 호흡을 셉니다. 그러면 주님의 기도 한 번 바치는 데 한 시간이 걸립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의 기도를 하며 성경 묵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같이 회개하고 같이 행복하라는

 

잘 아시다시피 요나는 자기가 주님의 예언자로 니네베에 파견되는 것이 싫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자기의 회개 선포로 니네베가 회개하는 것이 싫었고 그래서 주님의 자비가 그들에게도 내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자 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비하시고 분노에 더디신 것은 좋은데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러시는 것은 좋지만 내가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적대자에게도 그러시는 것은 싫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듭니다 왜 이런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로 삼으셨는지 이런 사람은 우리나 별로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도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만 누군 안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나는 용서받아도 내게 원수인 사람은 받지 않게 되기를 원하지요. 

이런 우리이기에 주님께서는 오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가 원수를 용서하듯 우리를 용서해달라고 청하라고 하셨지요. 

저는 주님의 기도 이 부분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질문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듯 우리 서로 용서케 해달라고 해야지 어찌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는지 말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듯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원수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런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용서치 않는데 당신이 먼저 용서하시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내가 용서하기 싫은 원수를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면 그런 하느님이 좋고 그런 하느님을 내가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내가 먼저 용서할 기회를 하느님께서 가로채시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용서 없이도 하느님은 용서하실 수 있으십니다. 오늘 요나는 용서할 마음도 하느님 자비를 받게 할 마음도 없지만 하느님은 니네베인들을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시잖아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굳이 요나에게 니네베의 회개를 선포케 하십니다. 그것은 요나가 회개를 선포함으로써 자신도 회개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요나와 다를 바 없는 우리도 회개의 선포자가 되라는 뜻이고 회개의 선포자가 되기 위해 원수를 용서치 않으려는 내가 먼저 회개하라는 그에게 하느님 자비가 내리는 것을 싫어하는 내가 먼저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먹기 싫은 음식을 강요하듯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 내가 행복하고 모두가 행복하기에 그렇게 하라는 행복 권고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선포하기 위해 먼저 회개하라는 그럼으로써 같이 회개하고 같이 행복하라고 주님의 초대를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나날이 기도가 필요한 삶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기도는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부터 기도는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주님의 삶이며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만드신 공동체는 기도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공동체의 뼈대도 기도이고 우리 개인의 삶도 기도로 익어갑니다. 

기도로 아버지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당신의 기도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온전히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드러나도록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드립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아버지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사랑의 나라 용서의 나라입니다. 

매순간 아버지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이 기도입니다. 청원의 기도는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하느님을 모시면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우리를 살게 하시는 놀라우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살게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게 하시며 우리자신을 보게 하십니다. 

용서를 청할 수 있는 사람만이 용서를 체험합니다. 그래서 용서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가장 큰 신비입니다. 나약한 우리들이 계속하여 빠져드는 유혹의 구렁텅이도 우리 힘이 아닌 아버지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함을 기도로 깨닫습니다. 주님의 기도로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는 사랑과 용서의 결합체이며 감사와 봉헌의 공동체임을 체험합니다. 

오늘을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 주님의 기도로 새날을 새롭게 시작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닮아야 할 주님의 삶입니다. 기도로 닮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기도로 열리고 기도로 흐릅니다. 사랑은 진심으로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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